알츠하이머병: 명명의 경과
알츠하이머병: 명명의 경과
  • DementiaNews
  • 승인 2017.06.0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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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알츠하이머의 이름은 병명 알츠하이머병 에 담겨 널리 알려졌지만, 첫 번째 환자사례를 학계에 보고하기 전까지 그는 신경매독 및 혈관성 치매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병이 현대 의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에 이 장에서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명명의기원과 추후 연구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풀어보려 한다.

[ 아우구스테 데테르 Auguste Deter, 1850~1906 ]

1850년 5월 16일 독일 카셀Cassel 지방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아우구스테Auguste 라는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네 자녀의 아버지는 아우구스테가 아주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났다. 비록 집안은 빈한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비교적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불과 열 네 살의 나이에 아우구스테는 보조 재봉사로 일을 시작했다.

스물 세 살이 되던 해에는 칼 데테르Karl Deter 와 결혼하고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했다. 남편 칼은 철도회사 직원이었다. 테클라 Thekla 라는딸이 태어났고, 한동안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그러나 결혼 후 28년째 되던 1901년 3월 아우구스테는 남편을 돌연 간통 혐의로 고소했다. 망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아우구스테는기억력도 떨어지고, 집안일을 소홀히 하고, 물건을 일부러 감추고, 요리도 엉망진창을 만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물론 일상적인 대화에도 지장이 있었다. 불면증을보이고, 집에서마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침대시트를 끌고 길거리를마구 돌아다니는가 하면, 한밤 중에 몇 시간씩 소리를 질러댔다.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어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소름 끼치는 괴성으로 이웃을 위협하고,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조차 무조건 의심하기 시작했다.

칼은 결국 아우구스테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그녀는 기억력 장애,조증, 불면증, 초조 등의 증상으로 1901년 11월 25일 프랑크푸르트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1세였다.

 

알츠하이머가 그녀의 진료를담당했다. 그녀는 자기 이름은 제대로 말했으나 남편의 이름을 물어도 자신의 이름을 됐다. 이름을 써보라고 하자 쓰지 못했다. 연필, 열쇠, 담배 등을 알아보고 그 명칭을 댈 수는 있었으나, 식사 중에 지금 무슨 음식을 먹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돼지고기와 꽃양배추를 먹으면서 그저 ‘시금치’를 먹고 있다고 했다. 어떤 물건을 보여주고 나서 잠시 후 다시 물어도 무슨 물건을 보았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대답하기 어려울 때는 “말하자면,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어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저녁이 되면 증상이 확실히 더 심해졌다.

알츠하이머는 초로기 치매 presenile dementia 라는 진단을 내렸다. 아우구스테는 입원 기간 내내 크게 소리지르고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보였으나, 아주 드물게 제법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처신하기도 했다. 낮에는 진정시킬 목적으로 물을 채워둔 욕조에서 지냈고, 밤에는 보호 목적으로 잠금 장치된 격리실에서 지내야 했다. 어쩌다 격리실을 빠져 나오면 영문 모를 말을 목청껏 외쳐대며 도망 다녔다. “나를 찌르지는 않아요. 나를 찌르지는 않을 거에요.”라고. 알츠하이머는 아우구스테 관찰을 위해 그녀를 계속 병원에 머무르게 하지만 진료비가 칼에게는 너무 비쌌다. 칼은 어떻게든 비용을 마련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가능한 자주 아내를 찾아갔다. 그러나 결국 진료비가 보다 저렴한 곳으로 옮기겠노라고 병원 측에 수 차례 요구했다. 알츠하이머가 중재에 나서 아우구스테는 프랑크푸르트 정신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되, 사망 후에는 모든 진료기록과 뇌를 알츠하이머에게 맡기기로 했다.

1903년 알츠하이머는 에밀 크레펠린 Emil Kraepellin, 1856~1926 의 초청으로 하이델베르크를 경유하여 뮌헨 의과대학부속 정신병원으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

그가 떠난 후 1905년 아우구스테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줄곧 뭔가를 중얼거렸으며, 혼자서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대소변조차 가리지를 못하고, 스스로 식사도 할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알츠하이머의 진료기록을 보면 기억이 감퇴하는 과정과 양상이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는 아우구스테의 증상들을, ‘진행성 인지장애, 국소 신경학적 증상, 환각, 망상, 그리고 심리적 사회적 무능력 상태’라고 기술했다.

급기야 아우구스테는 인지기능이 모두 소멸된 채 패혈증과 폐렴으로 1906년 4월 8일 숨을 거두었다. 그 때 나이 55세였다.

환자의 뇌는 진료기록과 함께 뮌헨으로 보내졌다. 알츠하이머는 곧바로 뇌 조직검사에 착수했다.

[ 알로이스 알츠하이머 Alois Alzheimer, 1864~1915 ]

 

알로이스 알츠하이머는 1864년 6월 14일 남부 독일 바이에른 Bavarian 의 소도시 마르크트브라이트Marktbreight 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증인 사무실에서 일했는데, 알츠하이머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첫 부인이 아들 하나만 남긴 채산욕열로 사망했다.

얼마 뒤 아들의 이모와 재혼해서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알츠하이머는 그 중 첫째였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알츠하이머가 어렸을 때 교육여건이 더 나은 곳으로 이사했다. 특히 알츠하이머는 과학에 재능이 돋보였으며, 베를린 Berlin , 튀빙겐 Tübingen , 뷔르츠부르크 Würzburg 대학 등에서 의학을 수련했다. 그는 현미경을 통한미세조직 관찰과 해부학에 열의가 있었으며, 1887년 뷔르츠부르크 의과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흥미롭게도 알츠하이머는 의과대학 재학시절 정신과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1888년 다소 우연한 기회에 어느 부유한집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여성환자를 돌보며 5개월 동안 독일 각지를 다녀온 후, 프랑크푸르트 정신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정신과와 신경병리학 연구를 병행했다.

한 해 뒤인 1889년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병리학자였던 프란츠 니슬Franz Nissl, 1860~1919 이 알츠하이머의 연구팀에 합류했다.

그는 신경세포 염색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의 염색법은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둘은 수년 동안 친구처럼 지내면서 함께 연구했으며, 니슬의 염색법은 알츠하이머의 뇌세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끼쳤다. 훗날 알츠하이머는 니슬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의 연구가 불가능했으리라고 인정했다.

1895년 니슬은 스승인 에밀 크레펠린과 함께 일하기 위해 하이델베르크로 자리를 옮겼다. 1904년 스승이 뮌헨으로 떠나 니슬은 자리를 넘겨받았다. 그 사이에 알츠하이머는 더 이상 친구와 더불어 연구할 수 없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친구 니슬 역시 그랬다.

알츠하이머는 1894년 부유한 은행가의 미망인 세실리아 Ceacilia Geisenheimer 와 결혼해서 세 자녀를 두었다. 풍족한 아내 덕분에 그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7년 후 세실리아는 막내를 분만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사망했다. 알츠하이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조카들을 키워주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왔다. 알츠하이머는 사별의 슬픔을 잊기 위해 진료와 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새로 입원하는 모든 환자들을 자진해서 담당하면서도 전보다 더 상세하고 방대하게 임상소견 기록을 남겼다.

그러던 중 1901년 11월 25일 프랑크푸르트 정신병원에서 아우구스테 데테르라는 51세의 여성환자를 만나게 된다. 그 환자는 알츠하이머의 조부 요한 알츠하이머 Johann Alzheimer 가 카셀에서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그녀는 단기 기억장애, 지남력 장애, 언어장애 외에도 여러 가지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알츠하이머는 이후 수년 간 그녀의 증상을 면밀히 연구했다.

1902년 여름, 하이델베르크로 옮겨간 친구 니슬의 스승인 크레펠린이 알츠하이머에게 공동연구를 제안했고, 알츠하이머는 곧 하이델베르크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에서 니슬을 다시 만났지만, 일년 뒤 크레펠린을 따라 뮌헨 의과대학부속 정신병원으로 근무지를 다시 옮겼다.

그가 하이델베르크를 떠난 지 4년 만에 환자는 사망했고, 서약한대로 아우구스테의 진료기록과 뇌는 뮌헨으로 보내졌다. 첫 번째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탄생한 것이다.

우선, 진료기록과 증상 간의 연관성을 찾고자 뇌 조직검사를 시행했다. 환자의 뇌는 대뇌피질이 전반적으로 얇아져 있었고 기억, 언어,판단,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신경원에 노인반이 형성되고, 신경섬유에서는 농축체가 발견되었다. 노인반은 대개 70대 환자들에서 볼 수 있었던 증상이었고, 신경섬유 농축체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면 두 가지 모두 매우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요즘이라면 조기발병 알츠하이머 치매로 진단될 환자였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65세 전에는 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조기발병 알츠하이머 치매는 전체 알츠하이머병의 10%를 넘기 어렵다.

1906년 11월 3일 크레펠린의 제안에 따라 알츠하이머는 의학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발표를 한다. 대뇌피질에서 발생한 낯선 이상증세를보고한 것이다. 그는 튀빙겐Tübingen 에서 개최된 제37차 남서독일 정신과 학술대회에서 아우구스테 D Auguste D 라는 51세 여성환자의 증상과뇌 조직검사 결과에 대하여 발표했다. 환자의 증상은 진행성 인지장애, 국소 신경학적 증상, 환각, 망상, 그리고 심리사회적 무능력 상태를포괄하는 것이었다. 뇌 조직검사에서는 노인반, 신경섬유농축체, 그리고 동맥경화성 변화가 한꺼번에 관찰되었다. 하지만 그 발표가 처음부터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발표내용을 더욱 보강하여 일년 후 학술지에 연구논문을 게재했다. 1910년 발간된 크레펠린의 책에서 그 증상은 알츠하이머병Alzheimer disease 으로 명명되기에 이른다.

알츠하이머가 뮌헨대학교Ludwig Maximilian University in Munich 에서 정신과와 신경해부학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2세가그를 브레슬라우 대학교Friedrich-Wilhelm University in Breslau, 현재의 폴란드 정교수로 초빙했다. 알츠하이머는 새 임지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병을 얻었는데, 그곳에 부임하여 3년간 더 연구하다 결국 심내막염에 의한 심부전과 신부전으로 인해 1915년 12월 19일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아내 곁에 묻혔다.

알츠하이머는 당시 그저 해부학자일 뿐이라고 홀대 받았지만, 현재는 근대 신경병리학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해부학적 병변을 임상증상과 연계해서 탐구했다는 점이다. 당시는 그런 안목과 관점으로 뇌 현상을 바라보고 접근하기란 상상조차 힘든 시절이다.

그가 수기로 작성한 아우구스테의 진료기록과 면담내용은 1909년이후에 사라졌다가 87년이 지나서야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 프란츠 니슬 Franz Nissl, 1860~1919 ]

 

프란츠 니슬은 독일 프랑켄탈Frankenthal 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니슬은 뮌헨 의과대학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었고 후에 정신과를 전공했다. 니슬은 신경병리에 관심이 많아 대뇌피질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신경세포 염색법을 개발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니슬 염색 Nissl stain 기법이다.

니슬은 뮌헨에서 스승인 베른하르트 폰 구덴 Bernhard von Gudden 과함께 연구를 했다. 그 동안 구덴의 요청에 의해 정신질환자인 오토 왕자 Prince Otto 를 돌봐야 했다. 그러던 중 구덴이 자신의 환자였던 바이에른 황제 루드비히 2세 Ludwig II, King of the Bavarian 와 1886년 동반 익사체로 발견되면서, 니슬은 새로운 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오토 왕자는 황제 루드비히 2세의 동생이었다. 1889년 니슬은 프랑크푸르트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알로이스 알츠하이머를 만나 7년 동안 연구를 같이 했다. 니슬은 알츠하이머 보다 4살이 많았지만 알츠하이머가 임상진료와 기초연구를 병행할 수 있도록 친구처럼 도우며 격려해줬다. 니슬은 알츠하이머의 결혼식 증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알츠하이머는 니슬의 조언을 잘 받아들였으며, 둘은 뇌동맥경화, 간질, 치매 등에 관한 연구를 함께 진행했다.

1895년에 니슬은 크레펠린의 초청으로 하이델베르크에 가서 정교수가 되었다. 후에 크레펠린이 뮌헨으로 떠나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니슬과 알츠하이머 모두 더 이상 같은 병원에서 일할 수 없게 된 데 대해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지만 우정과 학문적 교류를 평생 이어갔다.

알츠하이머의 아내가 사망하고 일년 정도 지났을 무렵인 1902년 여름, 크레펠린은 알츠하이머에게 하이델베르크의 연구소로 합류할것을 제안했다. 알츠하이머로선 크나큰 영광이었다. 크레펠린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명망 높고 영향력 있는 정신과 의사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친구 니슬이 거기서 7년 동안이나 연구를 하고 있던 차였다.

알츠하이머는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제안을 수용하는 대신 다른 병원의 원장직에지원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니슬은 크레펠린을 설득하여 알츠하이머에게 다시한 번 제안해줄 것을 부탁했다. 알츠하이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1902년 하이델베르크로 직장을 옮겼다.  1918년 니슬은 크레펠린의 초청으로 뮌헨으로 가 연구에 합류했다. 알츠하이머가 1912년 브레슬라우 대학으로 옮긴 뒤였다. 니슬은그곳에서 1년 정도 더 일하다가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에밀 크레펠린 Emil Kraepellin, 1856~1926 ]

에밀 크레펠린은 과학적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크레펠린은 정신질환을 증상에 따라 계통적으로 구분하려고 했으며, 종래 정신병으로 통칭되던 것을 조울증과 조현증당시에는 조발성 치매 dementia praecox 으로 분류했다.

1902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프란츠 니슬과 함께 연구를 하고 있던 크레펠린은 알츠하이머를 자신의 연구팀에 영입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알츠하이머는 친구 니슬과 다시 상봉한다.

1903년 4월 정신병원 신축 작업을 이끌던 뮌헨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가 갑자기 사망하자 대학당국은 그 자리를 크레펠린에게 맡겼다. 크레펠린은 하이델베르크 연구팀을 동반해서 뮌헨으로 옮겼다. 알츠하이머는 수석연구원 직책을 맡았다.

1906년 4월 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망한 아우구스테의 뇌 조직이 뮌헨으로 이송되었다. 알츠하이머는 노인반과 신경섬유농축체를발견하고 크레펠린과 동료들에게 임상증상과 연결시켜 보고를 했다.

임상증상과 조직학적 소견을 연결시켜 분석하는 작업은 새로운 연구방식이었다. 크레펠린은 적극 격려하며 튀빙겐에서 열릴 제37차 남서독일 정신과학술대회에서 그 내용을 발표해보라고 권유했다.

1906년 11월 4일 알츠하이머는 튀빙겐에서 아우구스테 데테르의임상증상과 신경조직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학회의 좌장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University of Freiburg 알프레트 호헤Alfred Erich Hoche, 1865~1943 교수였다. 호헤는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크레펠린의 정신질환 분류개념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알츠하이머가 발표를 하는 동안 크레펠린은 그 자리에 없었고, 발표를 마치자 호헤교수는 질의 응답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고 즉각 차후 발표자로 순서를 넘겼다. 다음 주제는 정신분석에 관한것이었으며 호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아주 길고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알츠하이머는 주목을 받지 못해 무척 낙담했다.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이름은 알츠하이머 본인이 붙인 것이 아니었다. 명명자는 바로 그의 스승 크레펠린이었다. 크레펠린은 알츠하이머가 발견한 내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학회에서 보고한 아우구스테 데테르 증례를 1910년 발간된 정신의학 교과서 개정판에 반영하며 ‘알츠하이머병 Alzheimer’s disease ’이란 명칭을 부여했다. 그 병명은 당시에는 초로기 치매 presenile dementia를 지칭했으나, 후대에 의미가 확장되어 보다 흔한 형태의 치매인 노인성 치매제senile dementia 까지 통칭하는 이름으로 쓰인다.

알츠하이머를 포함하여 학자들은 이런 뜻밖의 일에 적잖이 당황했다. 크레펠린이 아우구스테 증례를 이토록 신속하게 명백한 질환으로정의하고 이름까지 붙인 것에 놀랐던 것이다.

사실, 알츠하이머가 발표하기 전에도 이 질환을 기술한 연구자들은 있었다. 크레펠린이 아우구스테 증례를 알츠하이머병이라고 명명한 데는 여러 가지 배경이 거론된다.

그 중에는 새로운 발견을 확대 과장함으로써 연구소의 명망을 높여 연구기금을 더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즉, 젊은나이에 발병한 치매환자에서 조직검사를 통해 신경섬유농축체를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크레펠린 연구소는 큰 명성을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연구기금을 한층 더 많이 유치할 수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알츠하이머는 1894년 부유한 은행가의 미망인과 결혼하면서 아무런 부담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당시 크레펠린은 알츠하이머에게 정식 자리를 제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알츠하이머는 부득이 무급으로 일했던 것이다. 크레펠린은 그런 희생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려면 기금이 안정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알츠하이머의 경제적 여유가 긴요한 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외에 당시 신경병리를 연구하는 두 학파간 힘겨루기식 정치 논리가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다.

크레펠린이 이끄는 뮌헨 학파와 아놀드 픽Arnold Pick, 1851~1924 이 주도하는 프라하Prague 학파간 경쟁 때문에 크레펠린이 빠른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알츠하이머가 보고한 병리소견은 노인반과 신경섬유농축체 등 두 가지였다. 그 중 하나인 노인반은 프라하 학파 소속 오스카피셔Oskar Fischer, 1876~1942 가 노인성 치매환자에 관한 예증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테 진료기록의 재발견

1909년 이후로 볼 수 없었던 알츠하이머의 아우구스테 관련 진료기록이 87년 만인 1996년에 발견되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일부 소개한다.
“이름이 무엇인가요?” “아우구스테입니다.”
“성은 무엇인가요?” “아우구스테입니다.”
“배우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주저하다가) “아우구스테입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51세입니다.”
“어디에 사세요?” “우리 집에 오셨었군요.”
“결혼은 하셨는지요?” “헷갈리네요.”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요?” “여기 저기요,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요?”
“지금 당신이 있는 장소는요?” “거기에서 살 거에요.”
“당신 침대는요?” “그게 어디에 있어야 하지요?”
아우구스테는 점심으로 돼지고기와 양배추를 먹고 있었다.
“지금 뭘 드시고 계신가요?” “시금치요.” (그녀는 고기를 씹고 있었다)
“지금 드시는 게 뭐죠?” “조금 전에는 감자를 먹었고, 지금은 고추냉이를
먹고 있어요.”
“숫자 5를 써보시겠어요?” (‘여자’라고 적는다)
“숫자 8을 써보시겠어요?” 자기 이름을 적는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저는 제 자신을 잃어버렸답니다.”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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