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4
[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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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2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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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의 기억법-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김은정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작품이다. 일단 치매에 걸린 대상이 바로 주인공 자신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말로는, 그는 25년 전 은퇴한 연쇄 살인범이다.

그가 딸과 함께 조용히 살고 있는 마을에 어느 날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주인공 김병수는 우연히 연쇄 살인범 박주태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후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그로부터 딸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결국 그는 2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완벽한 살인을 위해 살인일지를 썼을 정도로 냉철하고 꼼꼼한 성격의 그는 자신의 기억을 지키고 딸을 지키기 위해 다시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마치 추리 소설처럼 긴장하며 읽게 된다. 과연 주인공 김병수가 치매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연쇄살인범 박주태와 대결하여 딸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 보자.

김병수는 결국 자신이 '박주태라고 생각한'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체포된다. 취조를 받으면서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이 박주태가 아니라 자신의 딸 김은희라는 것, 그리고 그 김은희조차 사실은 딸이 아니라 치매노인인 자신을 간병하기 위해 파견된 요양보호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박주태는 연쇄 살인범이 아니라 형사였고, 김병수가 그로부터 지켜 주고자 했던 김은희라는 딸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럼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한 딸 김은희는 누구였을까?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아버지와 같이 살해됐습니다. 둔기로"
형사는 서류를 뒤적이다 빙긋이 웃었다.
"재밌는 우연이네. 그때 죽은 아이 이름도 은희예요"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요양사 살해범으로 체포되어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연쇄 살인을 다 실토하는 김병수. 그런 그에게 형사가 전하는 이야기는 김은희는 25년 전에 살해된 한 아이라는 것이다. 바로 김병수가 죽인 것이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김병수는 25년 전 자신이 은희 엄마를 죽이면서 그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아이는 죽이지 않았고, 이후 그 아이를 딸로 입양하여 25년간 키웠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그의 환상이었을 뿐이다.

스토리의 전개를 좇아 아버지가 딸을 어떻게 지킬까 하는 데 온통 관심을 집중하였던 독자라면, 작품의 마지막 반전에 완전히 허탈해진다. 사실 이 작품은 소설의 기법 상으로 볼 때 독특한 데가 있다. 독자들은 보통 소설 작품을 읽으면서 서술자를 신뢰하게 된다. 특히 '나'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훨씬 강하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나'에게 자신의 기억이 없다면? 소설 속의 이야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자신이 '치매환자'이며 스스로 기억이 없다고 하는데도 김병수가 서술하는 이야기를 믿는다.

그러고는 결국에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허탈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치매는 복선의 구실을 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고 김병수의 이야기만 믿고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소설의 기법을 떠나 이 작품에서 치매는 어떤 모습일까. 작품에는 중간 중간에 치매에 대한 이야기가 제시된다.

메모지에 '미래 기억'이라는 말이 뜬금없이 적혀 있다. 뭘 보다가 적어놓은 걸까. 내 필체인 것은 분명한데 무슨 뜻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지나간 일을 기억하니까 그게 기억 아닌가. 그런데 '미래 기억'이라니.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식사하시고 30분 후에 약을 드세요" 같은 말을 기억하는 게 바로 미래 기억이란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 수밖에.

김병수가 치매 판정을 받던 날, 의사는 김병수에게 "기차 레일이 끊어지는데도 그걸 모르고 화물차가 계속 달려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일이 끊어진 지점에 기차와 화물이 계속 쌓이겠죠? 난장판이 되겠죠? 어르신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사의 말을 인용해서 김병수는 자신의 머릿속을 현재로만 살아가는 기차와 화물이 쌓인 것으로 표현한다.

이와 같이 이 작품에서 기억이 소멸되는 치매 증상을 다루는 방식은 다른 작품과는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흔히 현재 기억부터 잃어버리는 질병, 차츰 차츰 과거로 되돌아가는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치매를 이 소설에서는 과거가 현재화되는 질병으로 묘사하고 있다.

과거가 현재화되고 미래도 현재화되어, 너무 많은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질병이 바로 치매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치매는 늘 현재 속에 있는 질병인 셈이다.

그런데 왜 치매 환자 김병수의 현재 속에는 오래 전 자신이 죽였던 세 살짜리 여자 아이가 살아 있는 걸까? 왜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며, 왜 그 딸을 살해범으로부터 꼭 지켜야 한다는 환상을 지니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그의 과거 속에서 가장 죄책감을 느끼는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연쇄 살인에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던 김병수가 유독 어린 아이를 살해하던 그 순간에 자신에게는 낯선 감정인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 죄책감이 치매의 상태에서 발현된 것이 바로 이 현재의 환상인 것이다.

김병수는 알츠하이머가 연쇄 살인범인 자신에게 내린 천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의 악행이 고스란히 현재화되어 과거와의 구분이 없어지고, 그 현재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법으로는 공소시효가 지나 단죄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영원한 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살인자인 그의 이러한 기억을 통해 우리는 치매라는 질병이 삶의 도덕성에 대하여 던지는 경고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 <살인자의 기억법>을 우리는 곧 영화로도 만날 수 있다. 치매가 주는 이 섬찟하고도 강렬한 메시지를 영화는 어떻게 전달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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