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간질에서 뇌전증으로
[칼럼] 간질에서 뇌전증으로
  • 양현덕 발행인
  • 승인 2020.10.13 08: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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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치매와 마찬가지로 '뇌질환’이면서 병명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간질(癎疾)’이 ‘뇌전증(腦電症)’으로 명칭이 변경된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간질(癎疾)은 전간(癲癎) 또는 속어로 ‘지랄병’으로도 불렸다. 전간(癲癎)에서 전(癲)은 ‘미치다’라는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으며, 미쳐서 경련(痙攣)·발작(發作)하는 질환을 의미했다. 한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신성병(神聖病)’으로 속칭했다. 당시에는 ‘갑자기 쓰러져서 경련하는 발작’을 ‘신의 의사가 작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간질(癎疾)’이라는 병명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고 편견 등 사회적 낙인을 조장한다는 문제에서, 2009년도에 용어를 ‘뇌전증(腦電症)’으로 변경했다.

뇌전증(腦電症)은 영어로 ‘epilepsy’이며 그리스어인 ‘epilambanein (επιλαμβάνειν)’에서 유래했다. ‘Epilambanein’은 ‘위 또는 상방(上方)’을 뜻하는 접두사 ‘epi’와 ‘붙잡다 또는 장악하다’ 를 의미하는 동사 ‘lambanein’의 합성어로 ‘위(신성 또는 악령)로부터 사로잡히다’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14~20

‘뇌전증이 악령에 사로잡힌 질병’이라는 잘못된 인식은 당시에 지대한 영향력을 지녔던 한 신학자의 자의적 해석에서 비롯됐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 185~254)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경련을 하는 소년’에 대해 ‘악마가 보낸 고난’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록이 그의 명성과 함께 전해지면서 중세에는 죄의 표징으로 ‘마귀에 사로잡힌 질병’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간질(癎疾)에 대해 오랫동안 편견과 오해를 가져왔으며, ‘지랄병’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반인에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천벌로 여겨 환자를 감금하거나 몰래 유기하기도 했다.

간질(癎疾)은 약물로서 대부분 치료가 가능한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불치병 또는 정신병으로 오인돼 왔다. 환자도 간질에 따라붙은 ‘사회적 낙인’으로 인한 두려움에 진료를 꺼렸으며, 실제 환자 10명 중 7명은 본인이 ‘간질’환자라는 이유만으로 취업, 결혼, 운전면허취득, 보험가입 등에서 차별을 당한다고 느꼈다.

간질(癎疾)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사회적 낙인을 없애고자, 대한간질학회(현, 대한뇌전증학회)와 한국간질협회(현, 한국뇌전증협회)는 2008년 6월 ‘간질 이름 바꾸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간질(癎疾)’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병명으로, 환우회 명칭을 딴 ‘장미병’, 간질 환자였던 시저와 나폴레옹에서 착안한 ‘황제증(皇帝症)’, 간질의 발병 기전을 밝힌 영국 의사 잭슨(John Hughlings Jackson)의 이름을 딴 ‘잭슨병(Jackson’s disease)’, 뇌에 전기가 온다는 뜻에서 ‘뇌전증(腦電症)’, 뇌에 지진이 온다는 의미로 ‘뇌진증(腦震症)’, 뇌에 경련이 있다는 의미의 ‘뇌신경경련증(痙攣症)’ 등이 제안됐다.

이렇게 제안된 병명 중에서 논의한 결과, 2009년 6월 7일 대한간질학회에서 용어를 ‘뇌에 전기가 온다’는 의미를 지닌 ‘뇌전증(腦電症)’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뇌전증(腦電症)은 ‘전기 흐름으로 기능을 하는 뇌에 장애가 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한간질학회도 2011년도에 학회 명칭을 ‘대한뇌전증학회’로 개정했다. 하지만, 정부는 계속해서 ‘간질’로 표기해 오다가, 2014년도에 이르러서야 ‘간질’에서 ‘뇌전증’으로 정식 법령 용어로 정비했다.

하지만, 병명 개정 후의 기대와는 달리 ‘뇌전증(腦電症)’이라는 용어가 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 등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는데 아직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치매(癡呆)’와 마찬가지로, 질환에 대한 사회적 낙인 문제는 병명 자체보다는 그 병의 결과에서 비롯된 파생적 문제로, 병명 개정만으로 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명칭 개정과 더불어 질환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중요하기 때문에, 대국민 홍보의 방향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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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용태 2020-10-13 13:19:23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