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3
[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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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1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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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천국의 문은 누가 열 수 있을까 - 김경욱의 <천국의 문>

한국 문단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가 ‘이상문학상’이다.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이 문학상의 2016년도 수상작으로서 치매에 걸려 요양 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노처녀 딸의 이야기이다. 

작품은 주인공인 ‘여자’가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오늘밤을 넘기기 어렵다는 기별을 받고 요양원으로 갈 준비를 하는 데서 시작한다. 동생의 대학 졸업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와 이혼을 한 엄마는 새 남자와 결혼하여 떠나고 여동생 역시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핀란드에서 살고 있다. 단지 맡아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혼자 아버지를 떠맡아 힘겹게 살아가던 여자의 오랜 꿈은 북유럽의 오로라를 보러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 삶의 빛을 가로막는 어둠이며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될수록 그녀의 현실은 점점 고단해진다. 그런 그녀는 택시 안에서 행선지를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요양병원이 아닌 그 옆의 장례식장 이름을 댈 정도로 내심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고 있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는 기별을 받고 제일 먼저 곱게 화장을 하는 것처럼 사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보다 병원에서 만난 남자 간호사에 더 마음이 가 있다. 죽음이란 빛으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남자의 말에 그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닐 수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하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왜 기를 쓰고 먼지를 닦아낼까요? 먼지는 우리가 결국 먼지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환기하기 때문이죠. 먼지에서 먼지로, 빛에서 빛으로, 사실 별이란 우주먼지 덩어리죠. 별과 사람은 구성 성분이 같다는 거 알아요? 우리가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은 빛으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일깨우기 때문이에요. 어둠을 두려워할 때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빛인 셈이죠.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아름다운 이미지 때문일까. 확신에 찬 말투 때문일까. 사내의 말을 떠올리면 여자는 마음의 갈피마다 꾸깃꾸깃 접힌 자리가 말끔히 펴지는 듯했다. 고통과 억울함과 죄의식 속에서 아버지의 마지막을 남몰래 상상하던 순간 접혔던 자리까지도.

그녀가 병원에 도착하여 본 아버지의 모습은 전화 내용과 달리 평온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고단한 나머지 아버지 곁에서 까무룩 잠이 든 그녀가 섬뜩한 한기에 놀라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한 상태였다. 마치 천국의 문이라도 활짝 열어젖힌 사람처럼 행복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말이다. 그 웃는 표정에 당혹한 여자가 그 순간 떠올린 것은 언젠가 들려준 남자의 말이었다.

“용한 침쟁이들은 도살장에도 출장을 가요. 귀한 상에 올릴 돼지머리를 위해. 정수리 깊이 침을 찌르면 돼지가 보기 좋게 미소 짓죠. 실은 근육의 기계적인 반응일 뿐, 돼지들은 진짜 웃는 게 아니에요. 인간만이 웃을 수 있어요. 웃음이야말로 영혼이 있다는 증거죠. 인간에게는 그 영혼을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혈이 있어요.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 혈 깊숙이 침을 찔러 넣으면 단점에 빠져 미소를 지으며 저세상으로 가죠.”

결국 발신번호 표시 제한으로 왔던 전화는 남자가 한 것이었고,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당겨 준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여자는 고마움이나 안도감보다 메스꺼움을 느낀다. 그리고 여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실비아 플라스의 시처럼 자신의 인생이 끝장나 버린 기분을 느낀다. 이 소설은 이어서 여자가 경찰서에 전화를 거는 것으로 끝난다.

이 작품은 사건의 맥락이 때로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을 떠나 작품의 주요 소재인 ‘치매’를 중심으로 보면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이 소설에서 치매는 지금까지 보아 왔던 소설 속의 치매와 다소 다른 의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부분의 작품에서 치매는 개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딸이나 아들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의 진정한 삶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완서의 ‘환각의 나비’가 그랬고 이승우의 ‘검은 나무’가 그랬다.

 그런데 김경욱의 ‘천국의 문’에서 치매는 보다 사회적인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세대와 세대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죽어야’ 딸의 삶이 시작될 수 있다면 치매는 아버지 세대가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전 여자가 알던 아버지는 ‘퇴근하면 신발이 가지런히 놓였는지 확인하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숫자와 단어를 잊어버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울분과 폭력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치매 증상으로서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무시로 얼굴을 내미는 아버지의 폭력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망치나 식칼을 휘두를 때면 동료 교사들에게 ‘샌님’이라 불리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중략)
난데없이 울분을 터뜨리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낯선 영혼의 불꽃을, 생경한 삶의 알맹이를 발견했을 때 여자는 정말이지 궁금했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내가 알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이 작품이 아버지 세대의 소멸 과정을 담고 있다면 아버지의 치매 증상은 ‘기존 질서의 붕괴’를 상징한다. 가지런한 신발을 확인하곤 하던 아버지는 기존의 질서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러한 무너짐에 대한 울분이 폭력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망치로 거울을 깨거나 딸의 목에 과도를 들이대는 아버지의 폭력성은 죽음 곧 물러남에 대한 두려움의 표상일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아버지의 존재는 여자의 삶을 가로막는 것이며 여자가 꿈꾸는 빛나는 오로라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꿈꾼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아버지의 세대가 된다. 누구의 삶이든 어차피 죽음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처음 방문했을 때 여자의 주의를 끈 것은 익숙한 냄새였다. 젖내, 지린내,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야릇하게 비린 냄새, 놀랍게도 어린이집에서 날마다 맡던 냄새였다. 수액주머니나 오줌주머니를 옆구리에 낀 노인들의 거처에서 어린이집 냄새가 나다니. 여자는 의아했다. 둘 중 하나였다. 요양병원에서 생명의 냄새를 맡았거나, 어린이집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거나. 어쩌면 두 냄새가 본디 하나인지도 몰랐다.

이 작품에서 의미하는 죽음과 삶이 같은 것이듯 아버지와 딸은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작품 속의 치매가 구세대의 소멸을 상징하는 사회적인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구세대가 되고 그래서 누구나 치매에 걸릴 운명에 놓여 있다. 따라서 기존 세대가 나의 삶을 가로막는 존재라도 존중할 가치가 있으며 그와의 작별도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보내는 딸로서 여자가 지닌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소설은 여자가 남자를 만날 기대에 화장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남자를 고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작품에는 인간과 사회의 고민과 갈등이 담겨 있다. 그 한가운데에 ‘치매’가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치매는 죽음이요 물러남이다.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숙명이라면 증오할 대상이 아니라 화해할 대상일 것이다. 천국의 문을 누군가가 강제로 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고통스러운 치매 증상을 통해 가족의 진실을 이해하는 데 이르는 많은 작품들과 이 소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현실에 좌절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숙명을 고뇌하고 보듬어 안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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