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우리의 삶과 죽음은 이대로 괜찮은가” 의료인류학자 송병기의 묵직한 조언(下)
[인터뷰] “우리의 삶과 죽음은 이대로 괜찮은가” 의료인류학자 송병기의 묵직한 조언(下)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4.05 16: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죽음을 가로막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 성찰하기
인류학자의 눈으로 본 생애말기와 안락사 논쟁
노인종합복지관 강연 / 송병기

(상편에 이어)

Q13. 말기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관해 질문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집중치료실과 중환자실에서 연명 치료를 받는 비율이 매우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매달 수백만 원씩 나가는 산소호흡기 등의 치료로 연명하는 중환자가 많은데, 연명치료와 전통적 가족주의가 계속 충돌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개선될까요?

이 문제는 좀 섬세하게 들여봐야 합니다.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고 2018년부터 시행 중인데요.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중요한 것은 ‘말기’와 ‘임종기’ 두 가지 시기의 구분입니다. ‘연명의료계획서’는 말기환자나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로 진단 또는 판단을 받은 환자에 대해 담당의사가 작성하는 서식입니다. 반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8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연명의료계획서를 이행하는 시기가 임종기라는 점입니다. 의료 현장에서 임상적으로 말기와 임종기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의료진의 대답은 “없다”예요.

요양시설에 계신 어르신들을 보면 내일이라도 돌아가실 것 같지만 내일 다시 컨디션이 좋아지는 경우도 부지기수거든요. 특히 노인성 질환자들은 예후를 예측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예우를 예측할 수 있는 질병군이 암 환자죠. 암 치료제가 발전하면서 말기 암의 경계도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말기 암 환자가 임종까지 한 10주 정도 남았다면 호스피스병동이 있는 곳으로 전원해서 집중치료가 아닌 완화의료를 받으면서 임종을 준비하죠.

그렇지만 의학이 발달하면서 그 경계는 계속 모호해졌고, 말기임에도 생존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신약을 쓰면, 조금 더 살 수 있는 옵션이 계속 주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의료 현장의 처치는 훨씬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매 순간이 어떤 식으로 바뀔지 모르는 환자의 상태에서, 의료진의 결정도 달라져야 하기에 말기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요동을 칩니다.

현재 건강한 성인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깔끔하게 죽고 싶다고 합니다. 나답게 죽고 싶다, 내가 의존적 상태로 가는 연명치료는 안 받고 싶다고 합니다만,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의료적 견해에 따라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이전과 가능성이 달라졌거든요. 그래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분에게 이 가능성을 제시하면 의견을 바꾸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중요한 건 의료 결정을 표현하는 시기가 바로 임종기란 사실입니다. 임종기 환자는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컨디션이 나쁘고, 말 그대로 임종이 곧 예측될 정도로 건강 상태가 나쁘기에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보통 이제 하던 의료를 계속하거나 아니면 가족이 대리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이는 단순히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유교 문화라고 다그칠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이 연명의료결정법의 구조 안에서 지금 의료 현장에 굉장히 다각적으로 변하고 있고 옵션을 주목해 봐야 하는 것이죠. 끊임없이 옵션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의료진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현실 자체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유교 문화와 삶의 집착, 가족주의가 강해서 삶에 계속 집중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고요. 환자가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는 게 아닙니다. 환자도 그 안의 핵심 당사자로서 의견이 들어가고 그 상황에서 의료진도 보호자 눈치를 볼 수밖에 없거든요.

프랑스같이 주치의제도, 방문진료 체계가 정착돼 있고, 상급병원 의료진의 위치가 공무원급으로 안정돼 있으며, 국가가 의료진을 신뢰하고 권위를 부여하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의료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의사의 판단에 힘이 실립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도 중요하지만, 의사의 전문성도 매우 중요합니다. 복잡한 의료결정을 하는데 있어 의사가 환자와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필요에 따라 설득하는 역할이 크거든요. 예컨대  “이제 연명의료는 줄이고 완화의료로 넘어가시죠.” 이렇게 명료하게 설득할 수 있는 공간이 큽니다. 의료 결정 과정에 환자, 보호자, 의료진, 국가 간의 신뢰는 매우 중요합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실상 모든 판단을 개인에게 맡겨왔고요. 지금까지 개인이 알아서 돌보고 치료해 왔는데 갑자기 죽을 때가 돼서 의사가 이래라저래라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그 과정에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과 보라매병원 사건도 한몫했고요. 의사들도 겁나고 괜히 나중에 소송당하는 거 아닐까 하는 우려가 큽니다.
 

Q14. 한국의 사회복지제도는 선진국에 못 미치는데 안락사, 존엄사 논란은 선진국처럼 다루려 한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안락사에 대해서는 어떤 논의가 필요할까요? 나는 안락사법이 통과돼 죽고 싶을 때 깔끔하게 죽을 수 있는 거 찬성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안락사 논쟁은 단순하지 않잖아요?

그렇죠. 우선 현재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는 어떤 국가들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흥미롭게도 아시아에는 없습니다. 네덜란드를 비롯해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콜롬비아, 캐나다가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주마다 다른데 오리건과 워싱턴, 몬태나, 버몬트,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6개 주에서 합법화했습니다. 하와이도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허용했고요.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 허용이 안 됐습니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했고, 스위스는 의사 조력 자살이라고 하죠.

일단 안락사의 정의를 명료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락사(Euthanasia)의 어원은 좋은(Eu) 죽음(Thanatos)에 있습니다. 오늘날 의료현장에서 안락사는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안락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죽는 사람에게 이익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바로 ‘고통 덜기’입니다. 의료 처치를 동원했지만 고통이 경감되지 않는, 그래서 환자의 유익과 환자의 고통을 더는 것이 서로 연결된 것으로 봅니다. 예를 들면 해외에서는 루게릭병 환자의 경우 말기로 진단받지 않아도 앞으로의 삶의 고통이 극심해서 안락사를 요청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말기여서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삶의 고통 자체에 집중해서 해석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죠. 

그것이 안락사의 첫 번째 정의이고, 이어서 중요한 포인트는 안락사를 허용한 국가들 특징은 기본적으로 공공의료가 상당히 발달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복지 체계가 안정화돼 있고, 공공의료에서 주치의 제도가 잘 정비돼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직접 안락사를 하는 데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 관계를 요구합니다.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그냥 확 죽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주 오랫동안 나와 관계를 맺어 온 1차 의료의 주치의와 관계를 비롯해 나의 고통에 관한 많은 사람의 심층적 의견 기록이 따라야 합니다. 그동안의 경험이 어떻게 축적됐는지 검토 후 다시 다른 의사들이 감정하고 또 국가가 의사와 환자 보호자와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요구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안락사이기에 실은 많은 주변의 의존적 상황과 사회적 의존을 전제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안락사에서 돌봄이 필수적이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안락사는 사회가 개인을 저버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돌볼 수 있을까가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안락사와 연결된 고통은 현대의학으로는 돌볼 수가 없는 극심한 고통이면서 존재론적 고통이며 물리적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이 환자의 최선의 이익이라는 확정적 결론에 이르기까지 공공의료라는 사회적 지지 체계가 우선입니다.

이런 합의까지 간 사회는 사실 굉장히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그 논의를 프랑스와 영국도 계속하고 있고요. 공통으로 호스피스 완화의료제도가 안정적으로 정비돼 있습니다. 영국은 세계 죽음의 질 순위에서 오랫동안 세계 1위를 차지한 국가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굉장히 안정화되어 있기 때문이죠. 미국과 캐나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주에서는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세밀하게 정착돼 있습니다.

가정에서 호스피스를 원하면 의사와 간호사가 집에 방문해 원하는 치료를 해주고요. 그럼에도 더는 고통을 줄일 수 없다면 환자와 의료진과 국가가 끊임없이 대화하고 합당한 절차를 거쳐 종국에 내리는 결정이 안락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의존적 돌봄이 전제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Q15. 한국의 안락사 논의는 지금 어떤 수준인가요?

지금 우리의 안락사 논의는 제가 관찰하기로는 사실상 전혀 돌보지 못하는 사회에서 시민들의 ‘어떤 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요양시설과 중환자실이 드러내는 끔찍한 죽음에 대한 안티 체제로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안락사 제도를 합법화한 나라의 사회적 맥락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개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어떤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말기 환자의 그 말기 진단을 받은 개인을 돌보는 의료 주체가 과연 있는가, 요양시설과 요양병원의 의사들이 생의 끝자락에 있는 노인 환자를 돌보는 주체로서 그 말기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아니거든요. 사실상 우리는 말기의 고통에서 완화의료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치료 중심, 건강증진 중심의 의료 체계만 경험했거든요. 건강증진과 치료가 더 이상 안 될 때 돌봄과 생활이 훨씬 중요한 시기를 맞으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상상과 대안으로, 몇몇 외국에선 깔끔하게 죽을 수 있는 안락사가 있다더라고 말하는 이런 수준이거든요.

우리는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 남겨진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들 그 맥락들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해서 죽은 사람, 가족이 없어서 죽은 사람, 자살한 사람 등 제각각 심층적인 사연이 있는 죽음을 너무나 무례하고 간편하게 해석하고 표현합니다. 고독사한 방에도 달력이 있고 사진도 있고 약봉지도 있습니다. 달력에 동그라미 쳐놓고 누군가를 기다렸고, 누군가를 추억했고, 모두가 다양한 서사가 있습니다. 각자 개성이 있는 존재인데 우리 사회는 죽음과 의존에 대한 인간의 예의를 너무나 저버린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안락사 논의도 그런 식으로 다뤄지고 있으니까요.

 

Q16. 서점에 가보면 유품관리사의 이야기라든지 죽음에 관한 주제의 책이 많아졌더군요. 자살해서 부패한 시체를 만나면 집주인은 집값만 생각하지만, 특수청소를 하는 유품관리사는 유품을 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록해서 전해주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서사를 안겨준 그 책이 많이 읽힌 것을 보면 우리도 이제 죽음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시작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왜 한국 사회는 죽음을 멀리 둘까요?

그 질문도 인류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 사회가 언제나 죽음을 멀리 두지는 않았다고요. 역사성이 있는 담론이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제사가 굉장히 중요하고 친숙했어요. 저희 집안만 해도 1년에 몇 번씩 제사를 지내고 설날과 추석 명절에 성묘도 가고 반드시 차례를 지냈거든요.

90년대 초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이 집에서 임종을 맞이했기 때문에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제로 가까이서 볼 수 있었죠. 불과 30년 전입니다. 꼭 묘지가 마을 안에 있어야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프랑스처럼 파리 한가운데 있는 몽파르나스, 페르 라셰즈 묘지처럼 유명인들이 묻혀 있으면 관광지가 되기도 하겠죠. 한국은 저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죽음 이후에 대해 많은 상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조상이 제사 때 온다고 해서 12시까지 기다렸죠. 일종의 의례였습니다. 그걸 보면서 연극을 하는 것 같이 느끼기도 했는데 어른들은 굉장히 중시했습니다.

그런 의례를 보며 성묘도 갔고,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집에서 임종하신 분이 나오면 장지까지 따라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 가까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문화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합니다.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임종 장소가 병원으로 바뀌었고 의료보험제도 변화와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1인 가구로의 변화 등과 연결되고요. 이제 제사는 좋은 관습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성을 강화하는 악습처럼 여겨지는 시대로 왔습니다. 제사만 다가오면 우울해지면서 더는 즐겁지 않은 의례가 됐죠. 원래 제사의 취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불편한 의식으로 갱신돼 바뀔 필요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죽음을 우리가 항상 터부시했는가, 여기에 대해 저는 죽음을 터부시하기도 했고 터부시하지 않기도 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Q17. 돌봄과 죽음의 화두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은 무엇일까요?

죽음은 우리가 어떤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합니다. 죽음에 관한 상상과 함의는 현재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도구이자 매개죠. 우리는 모두 죽는데 그 죽음의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돌봄, 의존, 질병 등 관계성이 필수적으로 동반되고, 그 동반 과정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과 내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고, 어떤 삶을 더 고려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일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누구를 돌봐야 해?”라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질문이라면 이런 질문은 왜 안 됩니까? “내가 지금 누구를 돌보기도 바빠 죽겠는데 일을 해야 해?” 한 끗 차이인데 굉장히 다른 사회를 말하고 있죠.

 

세미나 강연 모습 / 송병기
세미나 강연 모습 / 송병기

Q18. 돌봄은 생산적이지 않아, 그건 시간 많은 사람이나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야, 라는 인식이 문제네요. 돌보는 사람은 자존감이 무너질 수밖에 없고요. 저도 한창 일할 때 가족을 돌봤는데, 앞으로 사회 부적격자가 될 거란 예측을 많이 들었습니다. 돌보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 인식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치매 가족에게 공감하는 언론인 디멘시아뉴스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우선 ‘치매’라는 용어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치매 이후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점을 살펴주셨으면 합니다. 그와 관련해 ‘디멘시아 문학상’ 공모전도 해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크게 지지하며 좋다고 생각하고요. 그다음 실제로 우리가 마주하는 의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건강증진 혹은 치료로 짜인 디자인만 마주하다 보니까 실제로 치료와 건강증진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돌봄이 무시당하는 현실입니다. 돌봄 제공자는 매우 중요한데 일상생활과 관계성이 깊은 노인성 질환들, 말기 환자들을 위한 삶에서 주변화되고 소수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완화의료의 중요성, 더 나아가 돌봄에 관한 사회적 논의, 가족이 오롯이 책임지는 영역이 아니라, 사회가 그 고통을 분담해 돌봄 제공 책임을 함께 지고, 권리도 보장받는 주제의 기사를 많이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제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그리고 일상에서 고통 중인 사람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가 하는 담론이 활발해지길 바랍니다.
 



한국 사회의 노화, 질병, 돌봄, 죽음의 현실에서 송병기 작가는 질문하고 상상하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존엄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회를 다지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총선 출마자들은 얼마나 이 주제를 양심에 새기고 있을까? 투표일 앞두고 쏟아지는 사회 서비스 정책들, 총선 마치면 공수표가 되는 공약들의 반복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일하다가 죽고, 가난해서 죽고, 학대로 죽고, 고립으로 죽고, 차별로 죽고, 노화와 치매처럼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려 돌봄을 받지 못하고 죽는다. 여러 사건 사고가 나의 노화, 질병, 돌봄, 죽음과 연결돼 있다고 잘 생각하지 못한다. 독거, 고독사, 빈곤, 질병 등 초고령사회에서의 공포는 각자도사하는 사회가 짙어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존중받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안에서 작용하는 선한 의료 체계와 돌봄 체계는 우리 사회에 언제 정착될까.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