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용태 칼럼] 에버그린의 욕망과 경쟁
[곽용태 칼럼] 에버그린의 욕망과 경쟁
  • 곽용태 신경과 전문의
  • 승인 2024.04.0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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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약물을 새로운 약물로 재탄생시키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
괴물인가 혁신인가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습니다. 넓은 커피 매장에는 반팔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절반 이상의 손님이 따뜻한 음료 대신 아이스 음료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질 체력인 저는 아직도 내복을 입고 따뜻한 커피를 주문해 구석에서 노트북을 열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때 팝 음악의 가사가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Sometimes love would bloom in the springtime. Then my flowers in summer it will grow. 
(봄이면 때때로 사랑이 움트고, 여름이면 내 사랑의 꽃이 피어납니다.)
And then fade away in the winter when the cold winds begins to blow.
(추운 겨울이 다가와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 꽃은 시들어 버립니다.)
But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하지만 사랑이 언제나 푸르고 푸르다면, 여름이 지나 겨울이 와도 싱그럽게 피어 있겠죠.)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오던 수전 잭스(Susan Jacks)의 감미로운 노래 ‘에버그린’이 어렴풋하게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당시에는 단순히 음악이 좋았지만, 지금은 가사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자라나고 겨울이 되면 시들어 버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지만, 만약 꽃이 상록수(에버그린)와 같다면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인간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고 꽃을 피우지만 결국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신체적, 심리적 과정을 직선적이 아닌 계단적, 단계적으로 나누어 해석하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에릭 홈부르거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과 장 피아제(Jean Piaget)의 발달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인지 발달을 인간의 심리, 인지, 사회적 특징에 두고 여러 심리적 요인의 질적이고 급격한 변화로 이루어진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봅니다. 즉, 인간 발달의 본질을 불연속적인 변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체 발달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존재하는데, 일반인이나 의사에게 특별히 인상적인 이론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쉽게 분석하자면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신체 발달 과정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학에서는 소아과가 특수한 과로 존재하는데, 이는 소아가 성인과 다르다는 전제에 기반합니다. 즉, 소아 환자의 모든 증상이나 병은 성인의 그것과 같더라도 소아가 가진 특수성, 즉 그 연령의 발달 단계를 고려해야만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소아과를 전문으로 하는 하나의 의학 분야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의학은 인간의 신체 발달 과정을 두 가지로 단순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 신체적 단계를 여러 단계로 나눈 이전 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저는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 상태를 두 단계로 해석합니다. 유식하게 말하면, 발달 단계(Developmental Stage)냐 퇴행 단계(Degeneration Stage)냐입니다.

신체적으로는 아주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소아과병원에 가는 연령, 즉 18세 이하는 모든 신체가 성장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발달 단계라고 할 수 있고, 그 이후는 퇴행 단계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18세 이하까지는 성장해 가는 것이고, 18세가 지나면서 죽음을 향한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시기부터 아주 오랜 기간은 기능이 체감하지 못할 만큼 서서히 떨어지기 때문에, 보통 특정 연령까지는 노화(퇴행)를 인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 일찍부터 죽어간다고 생각하면 좀 오싹해지기는 하지만, 생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렇게 생리적 죽어 감을 느끼면, 이전의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가을에 봄이나 여름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아니, 사계절 내내 에버그린하고 싶은 게 자연스러우면서 강렬한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면 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피부 리프팅, 성형과 같은 다양한 의료 시술이 있고, 이것이 신체적 봄날을 더 길게 연장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림 곽용태 제공

에버그린을 추구하는 강렬한 욕망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의약품 시장에서도 에버그린을 향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968년 다국적제약사인 릴리는 경구용 당뇨약 ‘메만틴’을 개발해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이 약은 원래 개발 목적과는 달리 당뇨에는 효과가 없고 파킨슨병과 같은 신경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우연히 밝혀졌습니다. 이에 특허를 공유하던 제약사 메르츠는 이 방면의 연구에 집중해 뇌졸중 후 뇌세포 퇴행을 방지하는 약, 즉 뇌졸중 치료제로 약의 효능을 변경해 1972년 새로운 용도 특허 신청을 했고 1975년 특허 인정을 받았습니다. 같은 약이지만 새로운 질병 치료제로 용도가 바뀌면서 이 약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고, 이 생명력은 높은 약값으로 환자에게 전달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약이 처음 개발되고 시장에 출시될 당시에는 뇌 질환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정확한 기전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연한 임상 결과가 기전을 추적하게 했고, 점차 이 약이 글루타메이트 수용체인 NMDA(N-Methyl-D-Aspartate)에 작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이 약은 이미 시장에서 상당량이 판매됐기 때문에 임상적으로 안정적인 것도 입증됐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눈치챈 네덜란드 다국적제약사인 룬드벡은 1984년 이 약물에 대한 권리를 매수했습니다. 이후 많은 임상실험을 거쳐 1989년에는 뇌졸중과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로 독일에서 판매가 시작됐습니다. 세 번째 에버그린이 실행된 것이지요.

그리고 많은 연구 끝에 2002년 미국에서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로 정식 등록되면서 이 특허를 다시 인정받음으로써 새로운 독점권을 확보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약물로 판매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똑같은 물질이고 오래전에 개발된 약임에도 새로운 특허 이후 약값은 하루 4달러 이하에서 20달러 이상으로 치솟아 최고의 에버그린을 달성했습니다. 오랜 에버그린을 누린 이 약물은 2015년 이후부터 모든 특허가 만료됐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어디선가 이 약의 또 다른 에버그린을 위해, 즉 다른 질병 치료 가능성에 대해 지금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20대와 30대의 미용 성형은 대부분 아름다워 보이기 위함이지만, 40대 이후는 늙어 보이지 않기 위해 시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 연령대에서는 안면 윤곽이나 리프팅 시술이 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20~30대의 프리미엄까지는 아니어도 좀 더 젊어 보이는 것은 개인적 사회적 이득이 많기에 높은 비용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체적인 에버그린은 이렇게 이루어지지만, 정신적인 에버그린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흔히 ‘뇌섹남’, ‘뇌섹녀’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브레인 리프팅과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뚜렷한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사람을 '뇌섹남' 또는 '뇌섹녀'라고 부릅니다.

1) 주관이 뚜렷하고 주저 없이 할 말을 하는 사람
2) 유머 감각을 지닌 유쾌한 사람
​3) 책을 많이 읽어, 탄탄한 논리를 펼치는 사람
4) 의견대립 시 설득력이 높은 사람

그런데 과연 이런 조건이 뇌를 젊어 보이게 할까요? 저로서는 좀 갸우뚱합니다. 신체는 18세 이후 죽어간다고 주장하는 제게 누군가가 “그러면 인간의 정신은 언제부터 발달이 멈추고 퇴행해 가느냐(죽어 가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농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정의하는 정신이 죽어가는 때는 남자에 한해(여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색잡기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안 될 때”라고요. 위 네 가지가 모두 가능하면 아직 정신이 성장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말의 중요한 포인트는 유연성과 호기심입니다. 특히 어떤 종류이든 호기심이 사라지면 신체와 더불어 정신이 노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순전히 저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약 회사는 돈을 벌고 살아남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합니다. 새로운 신약을 개발하는 데 일반 약물의 경우 약 3조 5천억 원, 알츠하이머병의 경우 4조 원 이상 든다고 합니다. 즉, 맨땅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약 회사는 기존 약물을 에버그린하는 다양한 전략을 사용합니다. 메만틴의 경우는 이 다양한 전략 중 용도 변경에 해당됩니다. 기존 약물을 새로운 약물로 재탄생시키는 이러한 전략에 성공하기 위한 요소로 많은 기본 연구도 필요하지만, 대대적인 마케팅, 이름 변경과 이후 반드시 따라오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비싼 비용도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괴물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혁신이라고 해야 할까요?

 

용어 정리
에버그리닝(Evergreening): 기존 약물의 특허 만료가 임박했을 때 새로운 특허를 취득하여 시장 독점 기간을 연장하는 전략. 이는 약물의 새로운 용도, 새로운 제형, 새로운 조합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Evergreening은 제약 회사가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사용하는 전략이지만, 동시에 신약 개발을 저해하고 환자의 접근성을 제한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곽용태
신경과 전문의, 현 용인효자병원 진료부장, 연세대학교 신경과 외래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동대학 석·박사 취득
2000년 세계적인 인명사전인 Marquis Who's Who 등재
2006년 대통령직속 산업의학 발달위원회 전문위원
저서 《치매 부모님이 드시는 약 이야기》, 《담장 너머 치매》, 《우리 부모님의 이상한 행동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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