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치매 마을
국제알츠하이머협회(Alzheimer's Disease International)에 따르면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이 처음 문을 연 2008년에 전 세계적으로 약 3,500만 명의 치매 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세계 치매 인구는 5,500만 명을 넘어섰으며 2030년에 7,800만 명, 2050년에는 1억 3,9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치매 환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많은 치매 마을과 치매 친화 시설이 문을 열었다. 전문가들은 노인 요양 커뮤니티가 치매 증상과 보조를 맞추려면 패러다임 전환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호그벡과 같은 치매 마을이 실제 도시를 닮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하나의 도시로 자리 잡는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매 마을의 효시인 호그벡 마을의 공동 설립자 자넷 스피어링(Jannette Spiering)은 “누구나 갇혀서 살고 싶지 않고 조직의 규율에 맞춰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원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호그벡에서 영감을 받은 전 세계 여러 시설은 주변 지역과 통합한 모델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입문이 굳게 닫힌 기존 요양 시설의 통제된 병원 환경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가, 라는 질문에서 치매 마을이 시작됐다. 그 누구도 시설에 갇힌 삶을 원하지 않는다.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중증 치매를 앓고 있어도 마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동료 환자들과 교류하는 마을이 하나둘 탄생했다. 치매를 앓는 마을 주민은 간호사, 의사, 심리학자, 물리치료사, 상담 코치 등 숙련된 직원과 가까이서 교류한다. 이들은 주민 수보다 훨씬 많고 지역사회와 조화를 이루어 산다. 밤낮으로 전문적인 지원이 제공된다.
한국에 없는 치매 마을 5편의 국가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노르웨이다. 노르웨이는 원유 수출량 세계 10위의 산유국이며 EFTA(유럽자유무역연합) 회원국이다. 2022년 기준 12년 연속으로 민주주의 지수 1위를 차지했다. 인구는 우리나라의 10분의 1 정도로 충청도 인구와 비슷하다. 북유럽국가답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7위에 올라 있다.
이 노르웨이에 조성한 치매 마을 이름이 카르페디엠이다. 다른 국가의 치매 마을과 마찬가지로 카르페디엠도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에서 영감을 얻은 치매 친화 마을이다. 카르페디엠(Carpe Diem)은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존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이 말을 외치면서 유명해졌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전통과 규율에 도전하는 청소년들의 ‘자유 정신’을 상징한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로 치매 마을 이름을 정한 것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이 노년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카르페디엠은 2020년 베룸에 터를 잡아 오픈했다. 베룸은 수도인 오슬로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교외에 있으며, 작은 도시지만 노르웨이에서 1인당 주민 소득이 가장 높고 대학 졸업자 수가 가장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카르페디엠은 이 베룸에 공용 구역과 함께 136개의 공동 주택과 22개의 고급 치매 보호 시설을 자랑하는 단지로 세워졌다.
카르페디엠은 사람들이 나이 들수록 집에 머물기를 원하고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데 착안해 계획됐다. 따라서 마을을 조성할 때 입주민들이 지역사회와 얼마나 가까운가가 중요했다. 치매 환자들은 공동체 외부가 아니라 공동체 일부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카르페디엠에 거주하는 치매 입주민은 마을 이름대로 현재를 즐기고 있을까? 마을 부지만 해도 1만 8,000제곱미터(약 5,445평)나 된다. 건물과 건물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중앙 동선을 두었고, 건물 사이로 정원, 텃밭 등을 조성했다. 치매 환자들이 답답함을 느끼지 않도록 설계했으며, 베룸시가 건축회사 HENT와 함께 조성했다. HENT는 노르웨이 최대의 종합 건설업체이자 도시 계획 개발사다.
카르페디엠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여러 채의 건물이 성벽처럼 두른 모습이다. 마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먼저 상업지구는 각종 편의 시설이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광장이 조성돼 있다. 병원, 슈퍼마켓, 헬스장, 미용실, 식당, 카페, 술집, 미용실, 피부관리실, 스파 등이 배치돼 있다.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등을 위한 취미실, 각종 공구를 사용할 수 있는 작업실도 포함돼 있다. 상업지구에는 널찍한 야외 광장이 펼쳐져 있다. 음악 소리가 잔잔하게 흐르는 광장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점심 메뉴로 나온 바비큐 등을 즐긴다. 입주민들은 상업지구와 광장을 ‘시내’라고 부른다.
상업지구와 광장을 지나면 주거지구가 나타난다. 호그벡 마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색조의 벽돌과 목재로 된 2층 및 3층의 주거 건물이 있고,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 회사 HENT는 주거지구를 주거 공간이면서 시민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이 마을의 거주자는 158명으로 한 건물에 8~11명씩 모여 산다. 침실과 화장실 모두 1인용으로 배정된다. 주거지구 주변엔 공원과 작은 연못 등 자연미 있는 조경이 만들어져 있다.
정상적인 삶의 영위와 지역사회 연결
카르페디엠의 건축 콘셉트는 치매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필요한 치료를 받으면서 계속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지역사회와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민과 주변 지역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비스트로(bistro 규모가 작은 프랑스식 식당), 도심 광장, 산책로 등의 시설을 가족, 보육원, 지역 주민 등 방문을 원하는 누구에게나 개방한다.
친숙한 가정집 분위기
작은 마을의 친숙한 가정적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설계된 주택과 치료 센터, 커뮤니티 센터는 정원과 광장으로 구분된 공간에 따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건물 높이와 지붕 유형이 친근한 동네 분위기를 더해준다. 입주민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노쇠해지면서 치매 증상이 악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체를 활발하게 움직이며 일상 기능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건물들은 조금도 의료시설처럼 보이지 않게 했고, 모든 주거 공간에 정원을 조성해 손을 움직여 식물을 키울 수 있도록 했다. 음식은 치매 진단받기 전과 동일한 가정식이다.
주민 스스로 일상을 계획
입주민에게 규칙을 정해 따르게 하지 않는다. 치매 환자여도 자신의 일상을 설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치매 환자의 신체적·정신적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식사와 간식이 충분히 제공되지만 슈퍼마켓을 운영한다. 의사가 개별 방문해 진료를 볼 수 있음에도 입주민이 직접 병원에 들러 접수한 뒤 진료를 받게 한다.
카르페디엠 총괄 책임자인 앤 그레테 노르만(Anne Grete Normann)은 직원 교육을 할 때, 치매 환자는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는 인식을 바꿔 치매 환자의 관점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교육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고 한다.
치매는 증상이 심해지면 가족의 부담이 심해진다. 민주주의 지수가 세계 최고인 노르웨이는 환자를 가두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죄악시한다. 카르페디엠은 환자들이 집에서처럼 생활하는 동시에 안전도 보장해 보호자인 가족들의 선호도가 아주 높다. 대기 입소자가 70~80명에 달한다. 카르페디엠은 오랫동안 소외되어 온 치매 환자의 요구를 공감의 방식으로 충족해, 의료 시설에 대한 기대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인식 가능한 주변 환경
치매를 앓는 사람들은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으므로 모든 영역이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길 찾기가 쉽고 주민들이 집처럼 느낄 수 있도록 마을 곳곳에 다양한 표지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요소를 설치했다. 카르페디엠의 조경은 포용적 아키텍처로 조경 부문 우수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실내와 실외 모두 거주자가 식별하기 쉬운 디자인으로 조성했다.
입주민에게 최상의 삶의 질을 제공하는 포괄적인 건축으로 구성했다. 건물과 야외 공간은 거주자들이 활동량을 늘리고 일상생활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입주민을 위해 모든 건물의 문이 개방돼 있고 시설 전체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크게 136개의 공동 주거 유닛과 22개의 치매 전문 케어 유닛의 두 가지 케어 레벨로 구성돼 있다. 입주민은 친숙한 가정집의 안락함과 함께 카페, 커뮤니티 센터, 피트니스 시설 및 기타 편의 시설의 공용 공간을 즐길 수 있다. 22개의 치매 전문 케어 유닛은 공동 주거 생활을 할 수 없는 중증 치매 주민을 위해 제공된다.
카르페디엠은 기관이 아닌 친숙한 집처럼 느껴지도록 설계했다. 하나의 마을로 설계된 거주지, 치료 센터, 커뮤니티 센터는 자연스러운 경계를 이루며 주변 지역과 열린 대화를 나눈다. 공동 주택과 관리 구역은 정문과 함께 도시적인 느낌의 광장을 형성한다. 주택단지 정원과 광장으로 구획했고, 전형적인 소형 주택 환경에서 가정적인 분위기를 얻도록 설계했다. 2~3층 건물을 작은 단위로 나눠 쾌적한 마을 느낌을 살렸다. 다양한 건물 높이와 지붕 형태가 친근한 동네 느낌을 더해준다.
치매 환자는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으므로 실외 공간을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마을 곳곳에 다양한 마커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요소를 넣었다. 인위적인 가이드라인을 사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가장자리, 파사드, 재료 구분선 등의 형태로 자연스러운 가이드라인을 우선시했다. 실외 및 실내 공간은 물론 모든 통로와 출입구도 포용적 디자인 원칙에 따라 구성했다.
전체적인 디자인 콘셉트는 도시와 시골의 구분이다. 광장은 도시적인 성격의 건물과 녹색 환경의 주택으로 둘러싸여 있다. 재료 선택부터 외부적인 재료를 구분했다. 모든 정면의 주요 재료는 벽돌이며 밝고 일관된 인상을 주는 두 가지 색상 음영으로 다양화했다. 보조 재료로는 목재를 사용해 다양성을 창출하고 가정적인 특성을 부여했다. 마을 시설 전체에 북유럽 친환경 건축 요건을 충족해 오래 지속되고 유지 보수가 필요 없는 견고한 소재를 외관과 영구 고정 장치에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지역사회와 공존하는 열린 마을
총괄 책임자인 앤 그레테 노르만은 “카르페디엠과 다른 요양 시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역사회를 우리 마을로 끌어들이고 초대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카르페디엠 주변 지역 주민들은 마을 활동에 참여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머리를 깎거나, 잘 관리된 부지에서 산책할 수 있다.
그는 “마을이 개방된다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방문하러 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친척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커뮤니티에 들어온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치매와 치매 환자의 삶에 친숙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르페디엠은 노르웨이 사회 전반에 치매 환자에 대한 낙인을 줄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카르페디엠 내 모든 시설을 마을 밖 일반 주민이 이용할 수 있고, 카르페디엠 바로 옆에 있는 유치원의 원생 100여 명은 마을 광장을 자주 찾는다. 지역 주민들이 직접 치매 마을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봉사활동을 하면 마을의 대형 집회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봉사활동은 입주민과 함께 춤추고 운동하는 형태의 통합 활동이다.
현재 베룸시는 인근 리킨 마을의 일상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요양 시설을 계획하고 있으며, 같은 부지에 어린이 탁아소를 포함할 예정이다.
베룸시의 카르페디엠 프로젝트 담당자인 트루드 셰이(Trude Schei)는 "치매 환자의 집이 요양 시설 안에 있더라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집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카르페디엠 주거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지역 환경에서 얻도록 훌륭하고 매력적인 지역 커뮤니티 센터를 만드는 것이 베룸시의 도시 계획에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선진국의 치매 마을 핵심은 치매 환자를 지역사회 밖으로 격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보다 치매 정책에 앞선 유럽도 치매에 붙어 있는 ‘엄청난 양의 낙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들은 치매를 앓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와 경험에 관해 알고 있는 커뮤니티에 있으면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치매 마을을 조성했다.
호그벡의 공동 설립자 자넷 스피어링은 "진정한 도전은 문화적 변화"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사실 이런 마을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은 치명적인 진단을 받는 사람을 진정으로 포용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치매 마을 설립이 어려운 것은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미숙한 단계이기 때문이 아닐까. 치매 환자를 인적이 드문 곳에 보호 시설을 만들어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을 안으로 포용하고 함께하는 이웃으로 삼는 문화적 변화에 우리는 얼마나 지지를 보내고 있는가? 치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얼마나 가까이 두고 있는지 점검하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마을을 더 늦기 전에 디자인하고 첫 삽을 떠야 한다.
늘 양질의 기사를 써주심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이런 좋은 기사 많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