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용태 칼럼] 탈리도마이드 역설(Thalidomide Paradox)
[곽용태 칼럼] 탈리도마이드 역설(Thalidomide Paradox)
  • 곽용태 신경과 전문의
  • 승인 2024.05.0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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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킬 박사는 하이드에서 돌아오지 못했을까

“All human beings are commingled out of good and evil. Even the most virtuous have some tincture of evil, and the most wicked some mixture of virtue.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 가장 고결한 사람도 어느 정도 악이 섞여 있고, 가장 사악한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미덕이 섞여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10장, 지킬 박사 일기장에서

6개월 전에 딸이 저에게 물어봅니다. “아빠 《레 미제라블》 읽어봤어?”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당연하지. 학창 시절에 읽었지.” 그러던 제가 최근에 레미제라블 완역본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어렸을 때 읽은 책은 《레 미제라블》이 아니고 책 전체에서 주인공에 중심을 둔 단축 본인 《장 발장》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실제로 《레 미제라블》의 완역본을 읽으면 이 책이 상상외로 두껍다는 것과 장 발장의 이야기가 전체 내용의 반도 안 되는 것에 놀랍니다.

저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저자인 빅토르 위고의 철학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고 왜 그가 프랑스의 정신인지 알게 됐습니다. 며칠 전 1886년에 출간된 로버트 루이스 밸푸어 스티븐슨(Robert Louis Balfour Stevenson)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읽고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책은 학식이 높고 자비심이 많은 지킬 박사가 ‘인’과 ‘에테르’를 섞은 화합물을 복용해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선과 악의 두 얼굴을 분리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화합물은 지킬 박사를 악마 하이드로 변신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이 두 선악 사이를 오가며 통제할 수 있었는데, 점차 악이 선을 이깁니다. 지킬 박사는 이를 막기 위해 약의 용량을 올려야만 했는데 나중에는 약이 다 떨어지고 급하게 이를 다시 제조하려 했지만 더는 같은 약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 하이드로만 살아야 하는 지킬 박사는 모든 것을 유서로 고백하고 자살하면서 이야기가 막을 내립니다.

제가 이 책을 보면서 놀란 첫 번째는 형식적인 면입니다. 어렸을 때 이 책의 이야기를 많은 경로로 접하면서 단순한 괴기 소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완역본을 읽으니, 제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소설이었습니다. 추리소설과 공상과학물(SF)이 결합한 형식으로,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는 저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은 긴장감을 느끼기 어렵지만, 아무 사전 지식 없는 출간 당시 독자들은 소설의 결말을 접하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동일인인 것이 반전이었으니까요.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인간 내부에 선과 악이 있으며 이를 약물과 같은 과학의 힘으로 분리할 수 있다는 상상입니다. 본질은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 칼럼의 서두에 쓴 지킬 박사의 일기장 문장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책임을 수반합니다. 지킬 박사는 악을 선택함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지만, 그의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합니다.

1957년 서독의 제약사 그뤼넨탈은 진정제, 수면제 치료제로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성분의 신약을 발매합니다. 이 약은 의사 처방전 없이도 복용할 수 있는 안전 등급을 받았으며, 회사는 이를 집중적으로 홍보했습니다. 특히 임산부의 입덧 증상을 완화하는 데 효과가 좋아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임산부가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했습니다. 하지만 곧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산모들에게서 사지가 없는 또는 팔다리가 짧은 신생아들이 태어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생한 것입니다.

1961년 11월 독일에서, 1962년 5월 일본에서 판매가 금지될 때까지 약 5년 동안 이 약은 계속 사용됐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만 약 8천 명, 전 세계 48개국에서 1만 2천 명 이상의 기형아가 태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탈리도마이드의 제품명인 콘테르간의 이름을 따서 ‘콘테르간 스캔들’이라고 부르며, 최악의 약물 사고로 현대 의학사에 기록됐습니다. 흥미롭게도 미국에서는 단 17건의 영아 부작용만 보고됐는데, 이는 미국 FDA가 콘테르간의 판매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심사관이던 프랜시스 올덤 켈시(Frances Oldham Kelsey, 1914~2015)는 ‘서류 미비’, ‘자체 임상 시험 자료 미비’, ‘태아에 미치는 영향 검토 불충분’ 등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제약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테스트를 요구하며 6번에 걸친 승인 요청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덕분에 미국에서 탈리도마이드 부작용 사건은 극히 적었습니다.

이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의학사에 너무나 심한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의사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탈리도마이드는 인간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일급 발암 물질, 즉 괴물 약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없앨 수가 없다면 엄격한 울타리 안에 두고 감시해야만 하는 물질이지요. 하지만 이런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탈리도마이드는 이전 용도와 다른 용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미국 FDA는 한센병 환자의 나성결절홍반의 피부 병변 치료제로 탈리도마이드를 엄격한 제한 조건하에 허가했습니다. 이는 탈리도마이드의 약물 재창출이었습니다. 2006년에는 스테로이드와 병용해 다발성 골수종 치료약제로도 허가됐습니다. 한때 ‘저주받은 약’으로 낙인이 찍혀 감옥에 감금된 탈리도마이드가 적응증을 바꿔 새로운 약으로 거듭나 시장에 나온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전에 설명한 다른 약제들의 에버그린 전략과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약이 단순히 적응증을 바꾸어 새로운 허가를 받은 다른 약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독성이 매우 높은 이 약을 임상실험하는 과정에서 탈리도마이드라는 약리작용이나 부작용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 안에서 새로운 물질을 분리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3차원 구조로 구성돼 있습니다. 인체와 약물 또한 3차원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질병 치료를 위해서는 이러한 3차원 구조의 이해가 필수입니다. 질병에 의해 발생하는 이상을 치료하기 위해 투여하는 약물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신체에 작용합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작용 방식은 ‘자물쇠와 열쇠’ 이론으로 설명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약물은 목표하는 조직이나 세균에 존재하는 수용체라는 ‘자물쇠’에 결합하는 ‘열쇠’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결합을 통해 약물은 특정한 생리적 반응을 일으켜 질병 치료 효과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수용체나 이에 작용하는 화합물은 종종 ‘거울상이성질체(Enantiomer)’라고 불리는 입체적인 구조로 돼 있습니다. 거울상이성질체는 동일한 분자식을 가지고 있지만 공간상의 원자 배치가 다른 이성질체를 의미합니다. 쉽게 예를 들면,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모양이 반전된 구조를 가진 화합물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 두 물질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분자 구조로 돼 있어서 동일한 물리화학적 성질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다른 이성질체인 경우, 수용체에 결합하지 않거나 다른 부위에 결합하는 등 생체 활성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탈리도마이드는 약물 상태에서는 안정적이지만, 인체 내에 들어가면 거울상 구조의 두 개의 이성질체로 전환됩니다. 이 중 하나인 R형은 진정 작용하는 약리 효과를 나타내지만, S형은 혈관 생성을 억제하는 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S형 탈리도마이드의 독성은 태아의 세포 성장과 분화에 필수적인 영양분 공급을 방해해 기형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탈리도마이드의 기형 유발 부작용은 실제로 S형 이성질체에 의해 발생하며, R형은 약리작용만을 나타냅니다.

거울상 이성질체 화합물은 약리학적 특성과 정량적 차이를 나타낼 수 있으며 심지어는 전혀 다른 효과와 독성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사전에 S형을 분리하고 R형만을 투약한다면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탈리도마이드는 실험실에서 S형을 분리하고 R형만을 투약해도 체내에 들어가면 이것이 다시 S형과 R형의 복합물인 라세미화(Racemization)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렵게 안전한 형태의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해도 뱃속으로 들어가면 꽝이 되는 것이지요. 최근에는 탈리도마이드에 수소 동위 원소를 추가하는 방법으로 체내에서 라세미화가 되지 않는 안전한 R형인 Revlimid라는 새로운 탈리도마이드를 개발했습니다. Revlimid는 탈리도마이드와 동일한 약리작용을 하면서 기형 유발 부작용이 거의 없어 다발성 골수종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탈리도마이드보다 강력한 진통 효과가 있어 난치병 진통제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즉, 탈리도마이드는 두 가지의 얼굴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중성을 ‘탈리도마이드 역설’이라고 합니다. 이 역설은 약물의 치료 효과와 유해한 영향 사이의 모순을 강조하며, 의약품 개발과 사용에 따른 복잡성과 위험을 상징합니다. 암이나 한센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으로서 지킬의 얼굴과 선천성기형을 일으키는 하이드의 얼굴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탈리도마이드의 하이드 얼굴만을 보고 이를 괴물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제약회사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성분에서 우리가 원하는 성분만을 끄집어내 다른 질병의 치료제로 새로운 약물 재창출을 했습니다.

기존 약물을 새로운 신약으로 전환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동일한 약물이지만 다른 질병에 대한 치료제로 적응증을 변경하는 방법, 기존 약물을 결합해 새로운 질병에 대한 신약을 개발하는 방법, 그리고 지킬과 하이드가 혼재해 있는 약물 성분 중에서 지킬만을 분리해 사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제약회사는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약물 재창출에 의한 신약을 개발하고 상당한 수익을 올립니다. 기존 약물을 조합하거나 분리하는 방법이 어떻게 보면 손쉽게 돈 버는 것 같아 속이 쓰리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과학적 통찰을 얻습니다. 이는 충분히 가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늘 아래 새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더라도 만들어 놓은 것을 잘 포장하고 바꾸어 새로운 용도로 삼는 것. 이것 역시 과학이 아닐까요?


지킬 박사가 내면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신 내부의 악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약은 ‘인’과 ‘에테르’의 혼합물입니다. 이 약 자체는 선이나 악을 지향하거나 그것을 구별할 능력이 없으며, 단지 영혼의 모습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나 약을 모두 소진한 시점에서, 지킬 박사는 하이드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약을 다시 만들려 하지만, 새롭게 제작된 약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실은 지킬 박사가 처음에 실험에 사용한 약에는 약간의 ‘불순물’이 섞여 있었으며, 그 정체불명의 불순물 때문에 약이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지킬 박사는 영원히 본래의 지킬 박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1846년부터 공식적으로 에테르를 수술 마취제로 사용해 왔다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약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테르 마취의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환각 증상입니다. 에테르 마취를 받은 환자들은 종종 현실과의 접촉을 잃고, 환상이나 악몽을 경험했습니다. 심각한 경우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자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지킬 박사가 사용한 에테르는 일반적으로 거울상이성질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과 결합하면 거울상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에테르에는 두 가지 이성질체가 존재하는데 S형은 마취 효과가 강한 데 반해 R형은 진통 효과가 강하며 환각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지킬 박사가 사용한 ‘어떤 불순물’은, 에테르에 넣으면 환각을 일으키는 R형 에테르로 변형되는 물질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후에는 이를 넣지 못했기 때문에 R형과 S형이 균형을 이루어 그런 부작용을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150년 전에 이러한 약물의 작용기전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곽용태
신경과 전문의, 현 용인효자병원 진료부장, 연세대학교 신경과 외래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동대학 석·박사 취득
2000년 세계적인 인명사전인 Marquis Who's Who 등재
2006년 대통령직속 산업의학 발달위원회 전문위원
저서 《치매 부모님이 드시는 약 이야기》, 《담장 너머 치매》, 《우리 부모님의 이상한 행동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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