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8
[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8
  • DementiaNews
  • 승인 2018.06.2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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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18안녕히 가시오, ! 조경란 <달팽이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 위안을 얻는 새로운 여정일까, 더없이 무섭고 더러운 그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때로는 한없이 정의롭다가도 때로는 더없이 비겁한 일상의 우리처럼 내 안의 다양한 인격체 가운데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삶도 죽음도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조경란의 <달팽이에게>는 ‘치매’를 소재로 하여 이 문제에 답한다. 주인공인 ‘나’는 두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치매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언니인 하지 고모는 노년에 이르러 치매에 걸려 있고, 동생인 요지 고모는 어릴 때 한약을 잘못 먹어 정신이 박약해진 ‘일종의 치매’를 앓는 상태이다.

주변에서 ‘덜떨어졌다’고 하는 정신 상태의 이면에는 순수함이 있었을까, 요지 고모는 언니의 치매 간병에 지극한 정성을 기울인다. 언니가 밥 먹는 방법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자, 그 앞에서 쉬지 않고 먹는 시범을 보인다.

하지 고모가 잠이 든 때를 제외하고 요지 고모는 하지 고모 앞에서 지치지도 않고 물을 마시고 과일을 먹었다.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씹어 삼켰다.

그래서 요지 고모는 계속해서 체중이 불어났다. 이 눈물겨운 정성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요지 고모 안의 인격체는 명민하지는 못해도 사랑으로 가득 찬 존재였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그 병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가진 사랑이 그 병을 이기도고 남을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는 엄숙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한자리에서 같은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 말을 일찍 포기하라는 말로 들었고 요지고모는 그 병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사랑뿐이라는 말로 이해한 것 같았다.

하지 고모는 끝내 밥 먹는 방법을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치매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대하여 새로운 태도를 보여 준다. ‘나’는 하지 고모의 증세가 심해질수록 치매는 결국 죽음을 기다리는 병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요지 고모는 죽음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맞서야 할 존재로 여긴다. 요지 고모의 이런 신념은 하지 고모의 태도도 변화시킨다. 어느 날 하지 고모는 뜻밖의 선물을 한다.

하지 고모는 요지 고모 앞에서 둥글게 오므린 한 손을 수줍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줄곧 주먹으로 살짝 감싸 쥐고 있던, 아파트 화단의 옥잠화 이파리 위에서 찾아낸 달팽이 한 마리를 요지 고모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겁을 먹고 웅크린, 황색을 띤 달팽이가 요지 고모 손바닥 안에서 꿈틀, 하고 움직이는 것을 하지 고모와 요지 교모, 그리고 내가 고개를 쑥 내민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작품 내내 등장하는 ‘달팽이’는 생명이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듯이 비 오는 날이면 달팽이는 활기를 띤다. 서로에게 의탁하며 살아가는 두 고모는 자웅동체인 달팽이와 같고, 그 연대감의 한가운데에는 달팽이의 생명력이 있다.

하지 고모가 숨을 거두는 시간, ‘나’는 달팽이의 생식 장면을 바라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지고, 죽음이 생명으로 다시 이어지는 그 순간, 나는 어릴 적 아버지의 익사 이후 내내 공포의 대상이었던 죽음을 새롭게 받아들인다.

자극받은 암수한몸인 두 달팽이들의 음경이 밖으로 쑥 돌출되었다. (중략) 덜컥,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여기에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는 하지 고모 얼굴을 본다. 지금 방안에는 요지 고모와 하지 고모 사이의, 죽어가는 자와 남아 있는 자 사이의 긴밀한 신뢰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달팽이들이 큰더듬이 옆의 생식구멍으로 길고 빛나는 음경을 갖다 댔다. 아름다운 죽음, 올바른 죽음, 이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서로의 몸에 달팽이들이 화살을 쏜다. 안녕히 가시오, 성! 나는 먼데서 들려오는 요지 고모의 목소리를 들었다.

자매의 삶은 죽음으로 갈라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자체로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삶이었다. ‘같이’, ‘더불어’ 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삶이었고, ‘사랑’으로 맞이한 죽음이기에 위안의 여정이었다.

하지 고모가 죽은 지 얼마 후, 요지 고모는 어린 시절 자매가 함께 살던 옛집에 다녀온다. 사흘 만에 시골집에서 돌아온 요지 고모는 대대적인 청소를 한다. 도배를 새로 하고 장판도 깔고 싱크대도 새것으로 바꾼다. 그리고 평소의 소망대로 요지 고모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는다.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요지 고모의 젖은 손바닥은 따뜻했다. 그 손바닥 안에 나는 고모들이 내게 주고 가는 집과 과수원이 들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끝으로 요지 고모는 외치듯 내 이름을 크게 한 번 부르곤 눈을 감았다. 하지 고모가 세상을 떠난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입술을 요지 고모 귀에 가까이 대고 나는 작별 인사 대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타인의 죽음이었지만 거기서 나는 희망이 있는, 존엄성이 존재하는 죽음을 보았던 것이다.

요지 고모의 죽음에도 어김없이 달팽이는 등장한다. 요지 고모가 죽은 지 얼마 후 유리병 속의 달팽이들이 새하얀 알들을 낳는 것이다. 죽음이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듯이, 작품 속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고모들이 내 손바닥 안에 쥐여주고 간 것, 나는 기적적인 생을 받아 쥔 사람이다.”라고.

두 고모의 죽음이, 인간을 추하고 더럽게 만든다고 여겨지는 ‘치매’의 죽음이 어떻게 아름답고 존엄한 것이 될 수 있었을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껴안아야 했던 치매라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고통 없이 고흐의 그림이 진정 아름다울 수는 없었을 듯이, 달팽이가 칼날을 타고 넘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점액을 힘겹게 분비하듯이, 치매의 고통을 거쳐 감으로써 오히려 삶도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입을 빌리면, 어떤 달팽이들은 꼬물꼬물 기어 먼 바다를 건넌다. 삶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는 바다를 건너는 달팽이가 될 수 있다. 치매는 잠자듯 죽음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냥 질병이지만, 생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면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우리 자신의 몫이다. 두 고모의 행복한 선택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자매애’라고 하는 사랑이었다.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어느 늦은 밤에,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언제 밤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되는지 알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멀리 있는 동물이 개인지 양인지 구분할 수 있으면 밤이 끝난 것이라고 제자가 대답했다. 그러나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제자가 빛줄기가 나뭇잎을 비출 때 어느 것이 올리브 나뭇잎이고 어느 것이 무화과 나뭇잎인지 구분할 수 있으면 밤이 끝난 거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제자들의 얼굴을 잠시 응시한 뒤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때 형제나 자매가 보이지 않으면 언제나 밤인 것이다. 항상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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