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17어머니저도 데려가 주세요 손홍규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저녁 동네 불한당들이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던 한 술집. 한 젊은이가 들어오는 순간 조용해졌다. 모친상을 당해 상복을 입은 그 젊은이에게 모두 위로의 마음을 느낀다. 술잔을 가볍게 들어 올리거나 하는 불한당들의 위로를 받던 젊은이는 어느 순간 홀연히 자리를 뜬다.

그 젊은이는 누구인가.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 절망해버렸던’ 그 청년은 과거 그들 자신의 모습이었으며 그들 내부에서 함께 늙어 왔던 존재이다. 그 청년의 모습을 흐릿한 기억 속에만 남겨 놓은 채 몸에 새긴 용 문신의 흔적처럼 그들은 거친 현실을 살아왔다. 그것은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2018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손홍규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작품의 시작 무대인 술집에서의 장면을 목격하는 ‘그’는 감정 표현이 서툰 가부장이자 실패한 사업가이다. 여동생을 가깝게 여기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여동생 몫의 재산도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고는 모르는 척하는 속물적 속성도 지니고 있다.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어’라고 할 만한 진짜 사건 하나 없어, 한 번도 ‘정직하고 단순하게 세상과 부딪혀보지’ 못하고 소심하게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온 존재이다.

또 다른 ‘그’인 그의 아내는 그와의 소통 부재에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그 역시 고통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가출한 딸아이는 자신을 찾아온 엄마에게 어린 시절의 작은 사건을 말한다.

 

엄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 내가 아홉 살 때였어. 우리는 집 앞 횡단보도에 서 있었지. 아마 내가 인도에서 한 발 내려가 차도에 섰던 모양이야. 엄마가 내 팔을 붙잡았는데 너무 아파서 아야 하고 소리를 질렀지. 그때 엄마는 별로 화난 표정도 아니었는데 말투는 무서웠어. 주희야, 한 발 더 나가렴. 한 발 더 나가서 달려오는 차에 쾅 부딪치렴. (여기는 차도야. 왜 여기 나와 있어. 인도에 서 있어야지.) 엄마, 그날 이후로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설 때마다 그때가 떠올라. 엄마, 왜 그랬어. 왜 다정하게 말해주지 않았어. 왜 그렇게 무섭게 말했어.

 

이렇게 사소한 일을 통해 작품의 두 화자인 남편과 아내는 보편적인 우리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불안하고 폭력적이며 모순된 우리 현실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가족의 붕괴와 사회의 모순을 만난다. 남편은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고 아내는 감정을 참고 견디며 분노를 쌓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남편은 아들을 폭행하고 딸은 가출을 한다. 특히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집에서 남편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다는 생각만 해도 쓰러질 듯한 구토 증상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이를 잉태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무얼 잉태해버린 걸까. 내가 이 나이에 잉태할 수 있는 건 분노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중략) 그런데 대체 무얼 향한 분노지.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수 있겠어? 결국 그건 나일 수밖에. (중략) 혐오하면서도 아닌 척했던 위선을 벗어아니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고 오십 후반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여인네를 보았다. 무엇보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 스스로를 보았다. 이게 바로 나였어.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행복하지 않다.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다. 이 시대 우리 모습은 폭력과 갈등과 소통 부재의 모습이며, 이것은 모두 인간성이라고 할 우리 본연의 모습이 상실하였음을 보여 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문득 술집에 들어와 눈물을 흘리는 그 젊은이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본연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치매에 걸린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치매를 직접적인 소재로 다룬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의 관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 작품에서 ‘치매’는 매우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남편(아들)의 시각에서 먼저 제시된다.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매우 독특하게 나타나는데, 요약하자면 ‘보고 싶은 분들’을 보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집에 오셨다고 이야기하고,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대접한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현실을 보는 것이다.

 

아범아, 너도 알지? 모촌 아짐 말이다. 어릴 때 아짐이 널 얼마나 귀여워해 줬는지. 그렇죠? 아짐? 그는 어머니 옆 빈자리를 향해 인사를 해야 했고 진짜 거기에 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빙 둘러갔고 차를 대접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거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었으며 손을 내밀면 그 역시 허공에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했다.

 

이 작품에서 치매에 걸려 일상적인 대화와 소통이 되지 않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아내)에게 자기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감정의 해방구 역할을 한다. 시어머니는 허상을 보며 말하기 때문에 어떤 말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앞에서는 마음이 여유로웠다.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무슨 말이든 해도 상관없으니까.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사실 그는 시어머니에게 모진 말도 몇 번 했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는 방긋 웃곤 했다.

 

며느리(아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시어머니에게 넋두리를 하며 마음이 편해지는 심리에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가족 그 누구와도 소통이 되지 못하는 외로움 말이다.

 

치매가 심해진 시어머니 앞에 앉아 넋두리를 풀어낸 적이 있어도 소소한 일상을 살아온 이력에 버무려 간식을 먹듯 나누어 먹을 사람이 그의 곁에는 없었다. 그는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외롭다는 걸 잊어버렸고 그걸 잊어버렸기에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절망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밤마다 감옥을 나서는 꿈을 꾸었다가 아침에 깨어나 감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쓸쓸해하는 종신형 죄수처럼.

 

작품 속의 말처럼 ‘삶이란 본질적으로 비극’이다. 현실은 고단하고 모순투성이다. 선을 보고 세 번째 만남에서 남편은 여자가 차려 준 밥을 먹고 갔다. 그가 남기고 간 그릇과 수저를 닦으며 내쉬던 한숨이 예견하듯 현실은 들어설수록 고통스럽기도 하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했지만 현실 속에서 그 최선이 결국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행복하지 않았던 삶’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불안하고 모순된 현실을 위로해 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치매 환자이다. 삶의 고단함을 늘어놓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는 말한다.

 

그는 조금 울었다. 말 대신 눈물을 흘렸다. 눈물 한 방울은 천 마디의 말에 버금갔다. 시어머니가 엉덩이를 끌며 그에게 다가왔다. 악아. 왜 우니? 울지 마라 악아. 돈이 없니? …이거, 우리 며느리가 준 돈이야. 우리 며느리가 나 맛난 거 사먹으라고 준 돈이야. 우리 며느리 피 같은 돈이다. 너 써라. 울지 마라.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중략) 그는 두려운 눈길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제가 누군지 아시는 거죠? 정신도 멀쩡하신 거죠?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는 거죠?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시는 거죠? 알기 때문에 결국 거기로 가신 거죠? 어머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여기서 얼마나 더 늙어야 해요?

 

우리는 치매를 건강한 사람과 달리 병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현실 속의 우리가 불안한 존재라면, 우리의 현실이 병든 것이라면, 그 현실을 떠나 있는 사람이 오히려 건강한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치매를 통해서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에서 시어머니의 치매는 며느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토닥토닥 달래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위안’의 의미를 지닌다.

 

모든 걸 잊어버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처럼 굴잖아. 언제쯤이 되어야 나도 저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언제쯤 나도 현실을 꿈인 듯 꿈을 현실인 듯 알고 살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보고 싶은 이들 기억에서 불러내어 옆에 앉혀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거야.

 

며느리가 보는 시어머니의 치매 속의 세계는 ‘자유로움’이다. 소통하지 못해서 느끼는 외로움이 없는 세계. 더 이상 행복에 집착하지 않는 세계. 현실을 꿈인 듯 꿈을 현실인 듯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세계.

노자의 ‘나비의 꿈’처럼 ‘꿈이 현실인 듯 현실이 꿈인 듯’한 단계가 우리 생의 어느 시기에 있다면 그것은 불행하고 외로웠던 인생에 ‘자유로움’을 주는 조물주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문득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나의 참모습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