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멘시아문학상 수기부문 최우수상] 낫 가는 여인③
[디멘시아문학상 수기부문 최우수상] 낫 가는 여인③
  • 양승복 작가
  • 승인 2021.09.2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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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복 작가
양승복 작가

지금 창밖의 햇살이 찬란한 것은 낫 가는 것을 멈춘 마음일거야. 이곳에 온지도 근 5년이 되었으니 평생 낫을 가느라고 누구하고도 가까이 할 수가 없었어. 시간이 흐르며 날을 세우던 감정 선이 느슨해지고 이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 그러면서 정신이 좀 맑아지고 잘 웃는 사람이 되었어. 웃으면 합죽한 입과 반달눈이 귀엽다고 하여 어른보고 귀엽다고 하면 안 된다고 호통을 치지. 그러면 잘못했다며 빌고, 깔깔거리며 웃고 하는 분위기를 나는 좋아했어. 내가 웃으면 그들도 좋아 웃고, 그렇게 살다보니 5년이 되었네.
 
어제는 큰딸이 하루종이 옆에 앉았다 갔어. 고생하지 말라고 부잣집으로 시집보냈더니 일찍이 혼자되어 일을 소같이 하며 아이들을 키웠지. 딸이 밭고랑을 매면 갈퀴손으로 내 심장을 긁는 것 같았어. 그러더니 그 아들 또한 일찍이 가버리고 쌍둥이 손녀까지 거두게 되었지. 이번에 시집보낸다고 고손자 보고 가라 하네. 이렇게 햇살이 고울 때 가야 하는데 고생만 시킨 딸들이 놓아주지 않네. 

눈 감고 있으면 손을 저물락 거려가며 살아온 세월을 간호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듣지.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 하지만 딸도 알아보고, 좋아하는 노래도 흥얼거리고, 예뻐해 주는 간호사도 알아본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 
 
나를 놓아 주지 않는 것인가. 아직 명을 다 하지 않았음인가. 뼈는 마삭하게 말라 구멍이 숭숭 뚫리고, 거죽만 남은 나를 봄바람은 그냥두지 않았어. 벚꽃이 피고 질 때까지 올해도 병원에서 딸들 애를 태웠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차를 세 번씩 갈아타고 큰딸이 매일 왔지. 오기만 하면 자고 있는 나를 주무르고. 혼자 넋두리하고. 훌쩍거리고 울다가, 내 말라빠진 손을 잡고 졸기도 했지. 주먹밥을 싸와서 먹고, 커피를 홀짝 거리고 마시고, 혼자 노래도 흥얼거리고 심심하지 않게 있다 가서 좋았지. 병실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신세가 된다고 간호사에게 극진하게 대했지. 이렇게 예쁜 딸이 70을 훌쩍 넘긴 할머니라네. 요즈음 들어 큰 딸은 말끝마다 어릴 때 찡찡이 동생만 예뻐했다고 서운하다고 어리광을 부리네, 어릴 적에 나도 사랑받고 싶었는데 왜 엄마는 동생만 바라보았느냐고 칭얼거리네.   나도 그 때는 애기였는데, 맨날 큰 애기 취급을 해서 어리광도 한번 부려 보지 못했다는 거야. 

그저 든든하기만 했던 큰 딸 마음을 살피지 못한 것은, 가슴에 낫을 품고 살면서 마음을 단단히 동여 맺기 때문이야. 사랑의 온기를 쥐고 있어야 하는 손에 낫을 들고 살면서, 배 불리 밥을 먹이지 못할까 허둥대며 살았지. 사느라고 응석어린 말을 받아주지 못하고, 따뜻한 눈길로 보듬고 손을 잡아주지 못했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딸의 외로움을 몰랐지. 

생각하면 큰딸이 없었으면 유복자인 작은딸을 데리고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았을까. 유난히 철이 일찍 든 딸을 남편같이 동무같이 의지하고 살았지. 큰딸은 아이가 아닌 듯이 의젓하게 내 외로운 손을 잡았기에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어미는 홀로 철이 들어가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큰 딸은 혼자 허덕거리는 어미의 아린마음속에 들어와 있었어. 이렇게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큰 딸은 어릴 적부터 무거운 짐을 지고 살게 되었던 거지. 착한 성품에 자기도 모르게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세월이 벗겨 주었네, 다 늙어서 이제는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힘겹게 살아 온 세월이 서럽다고 하소연을 하네.
 
내 팔자까지 닮아 젊은 나이에 홀로 살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내 복을 나무라며, 큰 딸이 혼자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팔자를 왜 내가 물려받았느냐고 귀여워한 동생을 물려줘야지 하며 투덜거린다네. 

작은 딸은 명이 긴 신랑을 만나 지금까지 어릴 때 응석을 부리고 살고 있어. 하나라도 내 팔자와 달라 다행이라고만 생각한 내가 참으로 어리 섞은 게야. 큰 딸 앞에서 착한 둘째 사위를 늘 추켜세우고 자랑하고 살았으니 말이야. 

둘이 함께 오더니 언제부터인가 각각 찾아오네. 차가 있는 작은 사위가 오는 길에 태우고 왔었는데 말이야. 작은 딸은 사사건건이 투정이야. 선생님들에게도 흠을 잡아 타박이고, 나를 위한다는 표현이 너그럽지 못하고 여전히 찡찡거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큰 딸은 나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말하지. 어련하랴. 허나 그 성품이 내 딸을 평생 외롭게 했다는 생각이 왜 지금에야 드는 건지. 편하게 마음 한번 풀어놓지 못한 저 성격이, 내 딸 가슴을 옭아매고 살지 않았겠는가.

만나서 이야기 하지 못하고 각자가 간호사에게 소곤거리며 하소연 하니, 벌떡 일어나 한마디 하고 싶지만 그렇지가 못하는 신세 아닌가. 무디고 착하기만 했던 과묵한 큰 딸이 서럽다고 울어대니, 이 늙은 어미는 뼈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네.
 
작은 딸은 언니가 치매가 온 것 같다고 하소연 하며. 마음먹고 전화 하면 어깃장소리만 한다는 거야. 큰딸은 동생은 신랑이 오냐오냐 하니 호강에 겨워. 나닐 곳 다 다니면서 전화만 하면 아프다고 하소연 한다고 하네. 언니가 치매가 왔다면 하나 뿐인 동생이 끌어안고 울어도 시원찮을 판이요. 몸이 약한 동생이 골골하면 잃을까 전전 긍긍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그것이 흉이 되어 남에게 하소연해야 될 일인가. 

침상머리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는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아닌가. 사람들은 내가 눈을 감고 있으면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아직도 품안에 있는 귀여운 자식들인데. 홀로 키운 금쪽같은 딸들인데, 아버지 없이 외롭게 자란 내 딸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준 나의 또 다른 생명들이여. 나는 눈을 뜨고 내 딸들을 올려다본다. 지금도 작은사위가 오면 간호사들에게 자랑하지. 버릴 곳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살아 있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없거든. 

작은 딸도 징징거려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 올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닭죽을 갈아 와서 호호 불어 입에 넣어주니 말이야. 웃어주면 볼에 뽀뽀를 해 주는 딸들을 두고 사위는 차에서 한숨자고 들어오지. 그 딸들이 지금은 따로 오니 참으로 서글프네.

나는 하루 종일 자는 듯이 누워 있다네. 그렇지만 다 자는 것은 아닐세. 눈을 뜨고 창문을 보고 있으면 간호사가 와서 가만히 들여다보지. 깨어 있으면 일어나시라고 침대를 올려주지. 내가 웃거나 반응을 보이면 휠체어를 태워 한바탕 돌아 주기도 하지.   노래도 부르고, 꽃을 보여주고, 밭에 심은 상치도 보여주고, 논에 모를 심었다는 등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 주면서 나를 데리고 다니지.  나는 허리가 아파 길게 앉아 있지 못하거든. 허리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 웃으며 데리고 들어오지. 

그런데 어느 날. 햇볕이 너무 따갑게 든다고 나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병실을 옮긴 거야. 그것도 햇볕이 들지 않는 안쪽으로 말이야. 화가 나고 기분이 상했지. 아무것도 모르는 할망구라고 생각하는 꼴들이 미워 어떻게 하면 골탕을 먹일까 하다 밥을 먹지 앉았어. 입을 다물고 벌리지 않았어. 너무 괘씸했어.

그랬더니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다며 옮긴 사람을 탓하고 다시 제자리로 옮겨 놓았지. 나를 위한다고 한 일이지만, 내가 싫고 좋은 것도 모를 거라고 행동하는 것이 싫었지. 슬픈 것도 알고 좋은 것도 느낄 수 있고, 잘 해주는 사람도 못되게 하는 사람도 다 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 

나도 생각이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먹고 싶은 것도 맛있는 것도 안다는 것을 왜들 모를까. 죄송하다며 몇 번이고 간호사가 얼굴을 맞대고 말했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어. 심술이 가라앉지 않아서 웃어주지 않았어. 아직도 낫을 품고 사는 것인가.

이렇게 누워 구루마 신세를 지고 다니면서도 창가에 앉아 밖을 보는 것이 아주 좋다네.
 
― 조마님은 봄맞이를 병원에서 하셨다. 봄이면 햇살에 온 몸이 달구어 지는 듯이 고열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딸들은 극진했다. 특히 큰딸은 많이 울었다. 

조마님은 간간히 맑은 정신으로 이야기도 하시고, 노래를 좋아해서 침상에서 흥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며 고집은 많이 줄어들고 조용하게 앉아 계시는 시간이 많았다. 점점 순한 양이 되어 가는 듯이, 아니 세상을 해탈하는 듯 사랑스러운 조마님으로 변해갔다. 

작은 딸이 올 때마다 신체검사 하 듯이 조마님을 보고 한마디씩 건넸다. 눈이 짓물렀다. 아니면 발뒤꿈치 상처가 왜 나아지지 않느냐 등등. 여러 가지 문제를 삼아서 불편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서 가실 때는 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갔다.

땀을 많이 흘리셔서 음달로 침상을 옮겼다가 며칠을 고생했다. 식사도 하지 않고 토라지셔서 반성하는 기회를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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