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9
[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9
  • DementiaNews
  • 승인 2017.09.2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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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첫사랑이었다 –박민규의 <낮잠>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이 시는 얼마 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드라마 ‘도깨비’에서 인용되었던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첫사랑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 이 시로 인해 드라마 ‘도깨비’는 더욱 빛이 났다.

일생을 통해 가장 가슴 두근거리는 말 중 하나는 아마 ‘첫사랑’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가장 가슴 설레는 단어이듯이,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대상 역시 첫사랑의 그일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 「낮잠」은 고향 근처의 요양병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예순여섯 살 노인인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요실금으로 지저귀를 차고 있고 심장이 좀 안 좋은 정도의 병세만 있을 뿐, 거동에는 큰 무리가 없는 상태이다. 고향 근처에 있는 요양병원이라 그곳에는 고향 친구들이 꽤 있다. 뜀박질을 잘해 별명이 ‘노루’였던 노성진, 키가 작고 촐싹대는 ‘똥피리’라는 별명을 가진 정동필, 그리고 나의 그녀 김이선.

동갑이며 인근의 여고를 다녔는데 현재는 치매를 앓고 있다. 기억이 자주 왔다 갔다 한다. 게다가 선셋증후군이 있어 해질녘 이후엔 배회가 심한 편이다. 수줍음이 많고 공부를 곧잘 하던 모범생이었다. 지난 봄 이곳에 들어왔는데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김이선. 내가 알고 있던. 그 김이선이 확실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낮잠」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 ‘첫사랑’과 ‘치매’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흥미롭게 제시되는 작품이다. 고교 시절 김이선은 나의 첫사랑이었지만, 실제로는 나와 감정 교류조차 없었던 사이이다. 그녀는 인근 여고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고, 나는 그녀를 추앙하는 수많은 남학생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김이선이 나를 알아볼 리가 없다. 김이선과 연결된 나의 추억 한 조각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 우산이 없는 그녀에게 내 우산을 양보하고 혼자서 꼬박 오십 분을 비를 맞으며 걸었던 일 정도이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지만 차마 그녀와 우산을 같이 쓰고 갈 수 용기가 없어, 가는 길이 반대 방향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던 순진했던 그 시절의 나 ― 그런 나의 우상 김이선을 요양병원에서 만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치매에 걸려 자기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녀와의 만남에 대하여 나는 “인생의 같은 방향에서, 같은 집에서... 우리는 조우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참 신기하고,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았다고도 여긴다.

대화를 나눈다고는 하지만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그녀에게 나는 추억을, 때로는 지나온 세월에 대한 넋두리를, 또는 누구에게도 건네지 못한 가슴 속 멍울들을 털어놓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요양병원에서 만난 첫사랑 이선을 친구이자 연인이며 누이이자 동반자의 관계로 생각한다.

이런 나와 이선이 실질적으로 동반자 관계가 되는 일이 발생한다. 둘이 법적 부부가 된 것이다. 불가피했다고 할 이 사건은 노름빚으로 가계를 탕진한 이선의 아들이 요양병원 보증금을 돌려받고 이선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가겠다고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된다. 형편이 어려운 이선의 아들이 어머니를 거의 짐짝처럼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이선의 법적 대리인이 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요양병원에 오기 전 재산을 정리해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약간의 현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일부를 이선의 아들에게 요양병원 보증금 명목으로 돌려주며, 아들의 동의를 얻어 이선의 법적 대리인이 된다.

이상하리만치 잔잔한 마음이었다. 십 분 만에 혼인신고는 끝이 났고, 김, 이, 선. 그 이름을 내 손으로 또박또박 서류에 기입했다. 수십 통의 러브레터를 썼다 구기면서 단 한 번도 쓰지 못한 이름이었다. K에게... 오십 년 전의 러브레터는 늘 그렇게 이니셜로만 시작했었다. 그리고 오늘, 그 K와 내가 부부가 되었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는 아니지만, 돌아갈 집의 방향은 같은 부부다. 누구도 인생을 알 수 없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야 하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난 후 나는 ‘그래도 오늘이 신혼 첫날’이라는 들뜬 기분에 요릿집에도 가고, 나와 이선의 추억의 장소인 고등학교 교정으로, 그야말로 신혼여행을 간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인 은행나무 아래에서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리고 나는 일생 동안 하지 못했던 고백을 한다.

바로 이곳에서 당신을 만났었지요... 그리고 줄곧... 그랬습니다. 아세요? 당신은 저한테 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왔다. 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길고 긴 세월이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왔지만, 옛날은 이렇듯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우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거대하게 들려왔다. 떨어지고, 흙이 되고, 다시 나뭇잎에 덮이는 거대한 순환과 흐름 속에 나는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어지러웠다. 내 가슴에 있던, 그 눈동자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그만 소변을 지리고 만다. 눈물보다 뜨거운 그 무엇이 바지를 적시고, 양말을, 구두를, 이 대지를 적시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보다 나는 곁에서 풍기는 대변 냄새를 맡고 이선의 등 뒤로 가 그 냄새의 정체가 그녀에게서 나는 것임을 확인한다. 대변을 지린 그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노래를 흥얼거린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이것이 나와 이선의 신혼여행이며, 아직도 남아 있는 ‘청춘’의 마음 한 조각과 어쩔 수 없이 쇠락한 육체의 아이러니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후 나와 이선은 살을 맞대고 살지는 않지만, 같은 공간에서 밥 먹고 잠자고 산책하고 같이 늙어가는 법적 부부로 살아간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겨울을 보내면서 나도 조금은 기억이 희미해졌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살짝 이선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잡으려 했으나, 웬일로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좋은.... 봄볕이다. 나른하고,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요새는 자꾸 낮잠이 온다.이선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나는 실없이 미소를 흘린다. 이선은 더욱 천진해졌고, 나도 조금은... 천진해졌다. 안 그런가 소년? 그런 목소리로 온몸을 쓰다듬는 듯한 봄볕이다. 나는 결국 눈을 감는다.

이 작품 「낮잠」의 결말 부분이다. 따뜻한 봄볕 속에서 첫사랑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마지막 잠을 잘 수 있는 ‘나’는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평화로운 ‘낮잠’이었다.

박민규의 「낮잠」은 참 아름다운 작품이다. ‘치매’가 심해졌다는 것을 ‘더욱 천진해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아름다움이 이 작품의 힘이다. 그리고 이것은 첫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치매는 천진하고, 소년이자 소녀이며, 그래서 순수한 첫사랑에 가 닿는 존재이다.

우리는 종종 첫사랑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첫사랑의 그 사람을 보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첫사랑과 함께했던 청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이기도 하다. 첫사랑에 가슴 아파하던 그 시절의 순수했던 내 자신을 마주하고 싶다는 소망은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어쩌면 치매는 이 불가능한 소망을 거짓말처럼 실현시켜 주는 아름다운 기적인지도 모른다. 이 가을, 문득 17살 우리들 첫사랑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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