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1
[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1
  • 최봉영 기자
  • 승인 2017.11.15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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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살아온 무게를 털어버린 그 가벼움 - 박완서의 <환각의 나비>
      

박완서의 <환각의 나비>는 치매를 주제로 한 작품들 중 매우 완성도 높은 작품 중 하나이다. 특히 이 작품은 치매 소설이 지니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어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치매 소설을 이해할 수도 있을 정도다. 

이 작품에는 가출, 거울, 자식들의 갈등, 자아 찾기 등 치매 작품의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앞서 보았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처럼 치매에 걸려 ‘가출’한 어머니 찾기 이야기이다. 또 김인숙의 <거울에 관한 이야기>처럼 어머니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를 두고 자식들 간에 갈등이 벌어진다.

이 작품에서 서술자인 장녀 영주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두 사람은 모녀 관계이면서도 서로의 지원자로서 동지 같은 관계이기도 하다. 영주는 어머니와 함께 유복자 동생 영탁을 길러냈고, “하숙집 딸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박사도 할 아이”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던 일상은 어머니의 치매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어머니의 치매는 정신없는 상태로 집을 나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 가출의 목적지가 번번이 아들네로 가는 통로인 ‘의왕터널’이라는 점 때문에 영주는 걱정보다는 섭섭함을 먼저 느끼게 된다. 당신의 마지막 생은 ‘아들네’에서 보내겠다는 뜻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어머니의 치매 증상에서 무언의 뜻을 읽고서 아들 영탁의 집에 어머니를 모신다. 그런데 이번에 어머니는 당신이 살던 영주네로 가겠다고 무작정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결국 자식들은 어머니의 치매를 ‘여기에 있으면 저기에 가고 싶고, 저기에 있으면 여기에 가고 싶은’ 증상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정신 상태의 어머니에게 영주는 낯섦과 함께 연민을 느낀다.

영주는 베란다로 나가서 어머니의 방을 엿보았다. 어머니는 벽에 걸린 거울 속의 늙은이를 노려보면서, “댁은 뉘시우? 응? 저리 비켜요. 썩 물러나지 못할까.”
연발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거울에 노파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것처럼 영주는 방안에 갇힌 늙은이가 어머니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영주는 어머니의 눈빛이 그렇게 방어적인 것 본 적이 없었다. 문 열어 놓고 사는 집처럼 편안한 어머니였는데... 눈빛뿐만 아니었다. 그 조그만 몸이 누가 특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 물어뜯으며 덤벼들 것처럼 긴장해서 털끝까지 곤두서 있다는 걸 자기 몸처럼 느낄 수가 있었다. 어머니 혼자서 대항하기에는 이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었을까.

 
무작정 밖으로 나가려는 어머니를 자물쇠 수를 추가해 가며 가두어 두었기 때문인지 아들 영탁이네에서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또 그렇게 어머니를 대하는 올케의 태도에 분노한 영주는 어머니를 다시 자신의 집으로 모셔오게 된다. 영주네 집에서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눈에 띄게 호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 좋은 건 빨래 개키는 솜씨가 돌아온 거였다. 어머니는 빨래가 약간 축축할 때 걷어다가 어찌나 정성을 들여 반듯하게 펴서 개키는지 내복도 꼭 다림질해 놓은 것 같았다. 그건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어머니만의 솜씨였다. 어머니의 손은 아직도 든든하고 예뻤다. 아, 아, 빨래를 꼭 다림질해 놓은 것처럼 개키는 우리 엄마 손, 이러면서 어머니 손을 어루만지고 있노라면 경배하며 입맞추고 싶은 따뜻한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가 싶은 순간, 어머니는 다시 가출한다. 영주는 전처럼 의왕터널 쪽으로 갔으려니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의왕터널에는 없는 어머니, 그렇게 잠깐 놓친 어머니의 행적은 이후 반년이 지나도록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어머니는 왜, 어디로 갔을까?
포스터를 몇 천 장씩 찍어 돌리고, 방송도 하고 정말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찾을 수 없는 시간들이 지속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덧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노인 수용 기관을 찾아다니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버린 딸 영주가 정말 우연히 서울 근교의 한 마을에서 어머니를 발견한다.

이 마을에도 포스터를 붙여볼까 하다가 문득 저만치 외딴집이 보였다. 문화재적인 옛날집이 아니라 그냥 나이만 많이 먹은 귀살스러운 옛날집인데도 영주는 이상한 힘에 끌려 차츰차츰 다가갔다. 다가가면서도 무엇에 이끌리고 있는지 이상해서 주춤거렸다. 느닷없이 하숙 치던 종암동 집 생각이 낫다. 그냥 생각이 난 것뿐 비슷한 것 같지는 않았다. (중략) 부처님 앞, 연등 아래 널찍한 마루에서 회색 승복을 입은 두 여자가 도란도란 도란거리면서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화해로운 분위기가 아지랑이처럼 두 여인 둘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에 그런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 헐렁한 승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여지껏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드린 적이 있었을까. 칠십을 훨씬 넘긴 노인이 저렇게 삶의 때가 안 낀 천진덩어리일 수가 있다니.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곳은 ‘마금이’라는 처녀 보살이 혼자 머무는 절이다. 성폭행의 상처와 오로지 돈벌이 목적으로 그녀를 이용하는 가족들 때문에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있는 마금이에게 할머니(어머니)는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구원의 존재이다. 마금이는 ‘자기가 옛날 옛적에 전생에 할머니의 손녀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할머니에게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행복해 한다.

어머니도 그러지 않았을까. 거울 속의 자기를 부정하는 어머니는 누군가를 지켜 주어야 하는 본연의 어머니로서 자기를 찾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딸네에서 아들네로, 아들네에서 딸네로 가는 어머니의 행동은 비어 있는 그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집’을 나간 어머니를 찾는 이야기 구성은 치매 소설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구성 중 하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들은 어머니를 찾지 못하는 것으로 끝맺는데 이 작품 <환각의 나비>는 어머니를 찾는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이때 찾은 어머니는 단지 집을 나갔다가 집을 못 찾아 떠돌아다니는 어머니가 아니라는 점도 특징적이다.

딸 영주가 다시 찾은 어머니는 우리가 ‘어머니’라는 말에서 느끼는 따뜻함과 포근함을 다 간직하고 있으며, 그런 어머니는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워내면서 당신이 겪었을 그 큰 인생의 무게를 다 벗고 어머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따뜻함을 나누고 있는 모습, ‘여기 있으면 저기 가고 싶고, 저기 있으면 여기 가고 싶은’ 어머니가 마침내 당신의 ‘집’을 찾은 것이다. 어머니가 정말로 돌아가고 싶었던 집은 어쩌면 딸 ‘영주’의 집도 아들 ‘영탁’의 집도 아닌, 자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집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곳이 바로 ‘어머니’로서 당신의 집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어머니가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한 모습인 것을 보면서 영주가 어머니 쪽으로 다가가기를 머뭇거리는 것으로 끝난다. 치매에 걸린 ‘우리 어머니’의 현실로 돌아오게 할 것인지, 단지 멀리서 지켜보면서 ‘환각’의 상태에서 행복한 ‘본연의 어머니’로 둘 것인지, 문득 딸 영주의 선택이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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