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5
[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5
  • 최봉영 기자
  • 승인 2018.03.19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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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15나는 고마웠다는 말을 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조경란의 <달걀>

조경란의 <달걀>은 스물일곱 살부터 ‘나’를 돌봐온 이모의 치매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두 돌밖에 되지 않았을 때, 부모님이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국가대표 탁구 선수였던 이모는 조기 은퇴를 하고 나를 키우게 된다.

한순간에 세상에 남겨진 이모와 나 단 둘. 이모는 새벽에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떼다가 파는 일을 하며 나를 키웠다. 이모는 나를 위해 삼만 번도 넘게 밥을 지었고 기도를 했으며 밤에는 울었다. 이런 이모에게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새로 이사 간 집의 대문을 누가 뜯어가 버린 황당한 도난 사건 이후이다. 그때부터 대문이 아니라 이모 몸의 일부가 뜯겨 나간 것처럼 이모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 자꾸만 망각하려고 하는 건 이모 자신의 의지처럼 보였다. 나는 분노로 머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모의 의지는 물속에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서서히, 그러나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모. 우리 집 주소가 뭐지? 전화번호는? 이모 나이는? 내가 태어난 해가 언제지? (중략) 퍼붓듯 쏟아대는 내 질문에 간신히 꾸물꾸물 대꾸할 때마다 축축하고 비리고 역한 냄새가 폐로부터 깊숙이 이모의 입속에서 풍겨나고 있었다. 치매의 냄새였다. 손쓸 새도 없이 이모는 수정이 불가능한 삶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최근의 기억부터 잃어 가는 이모의 증세에 따라 나는 이모가 기억하는 유년의 기억 속으로 같이 들어가서 행동한다. 이모가 어린 나를 부르던 ‘이쁜 우리 장군이’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유년의 기억 속에서 이모에 대한 부채감으로 가슴이 짓눌리는 것이다. 긴 세월 이모는 나를 키우느라 청춘을 희생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인 ‘달걀’은 주인공 나에게 고질적인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음식이다. 나는 달걀을 먹지도 만지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알레르기 증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달걀 알레르기는 단순한 육체적 병리 현상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달걀. 그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이모가 나에게 준 최초의 음식이었다. 가장 강력하며 가장 침투력이 강한, 가장 근원적인 나의 두려움 말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어쩌면 나를 지켜나가기 위한 하나의 생존 방법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에 이모와 나, 단 둘이 남겨지면서 어린 나의 의식 속에도 이모까지 잃게 되면 어떻게 할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달걀’은 상실에 대한 나의 두려움의 상징인 셈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이모의 절대적인 희생을 아는 나이로 성장하면서 차츰 죄책감과 책무감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 점에서 이모의 ‘치매’는 나에게는 더 큰 두려움과 죄책감을 안겨 주는 질병이다. 치매에 걸린 이모의 기억 속에서 나의 유년 시절이 뚜렷해질수록 이모 자신의 지난 고통 역시 더 생생히 느껴질 것이고, 그래서 이모의 마지막은 고통과 회한의 그것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부채감에 짓눌리는 것이다. 나와 관련된 지난 모든 시간이 이모의 인생을 망쳐버렸다는 죄책감과 그로부터 비롯된 의무감과 두려움으로 나는 집을 자주 비운다. 밥 먹는 것도 대변을 가리는 것도 불가능한 이모를 두고 집을 비우면 나 대신 친구 B가 이모를 돌봐주고는 한다. 나는 이모가 자신의 한없는 희생에 대하여 변상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

의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제 이모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은 명확해 보였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던 건 정작 이모의 죽음이 아니라 죽기 전에 이모가 나에게 보여줄 태도, 혹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위협적인 비난의 말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죽어가는 이모에게 ‘내가 그동안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혹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이모가 죽기 전부터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이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이러한 나의 ‘예상’은 빗나간 것임을 알게 된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나는 이모의 잠자리를 봐주며 나오려는 순간 이모의 죽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모의 진정한 마음을 알게 된다.

난 아직도 잠잘 땐 탁구공이 훅, 튀어올랐다가 내려오는 꿈을 꾼단다. 또렷한 눈으로 이모는 방긋 한 번 웃었다. 나는 그것이 이모의 마지막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모, 미안했어요. 이모가 그 말을 듣지 못할까 봐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눈을 감은 채 이모는 또 한 번 살며시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날 나는 고마웠다는 말을 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 말을 이모가 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까.

이모의 삶은 회한과 원망으로 찬 것이 아니었다. 매일 탁구공이 튀어오르는 꿈을 꿀 만큼 소중한 미래를 포기한 삶이었지만 힘든 현실 속의 삶도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라는 원망의 말이 아니라 ‘방긋 한 번 웃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모에게 내가 전한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라는 말이었다. 이 ‘미안하다’는 나의 죄책감과 부채감이 다 표현된 말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모가 더 마음에 들어했을 것 같은 말은 ‘고마웠다’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사랑에 어울리는 짝은 책임감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성장시킨 조카가 자신을 대할 때의 감정이 ‘갚아야 할 빚’으로 느낀다고 생각했을 때 이모가 자신의 인생을 행복했다고 기억할 수 있을까? 주인공 나는 마지막 순간에 이모의 진실한 사랑을 깨달은 것이다.

이모가 죽은 지 한 달 후, 나는 혼란과 부재를 겪게 된다. 냉장고에 음식이 들어 있다는 사실, 내가 방금 밥을 먹었다는 사실, 이모가 죽었다는 뼈아픈 사실 같은 것도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 혼란 속에서 헤어졌던 독일의 연인 가비로부터 나를 그린 스케치 한 장이 팩스로 도착한다. 그리고 나는 가비에게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가비에게 이모에 대해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불 앞에서 머리를 말리던 이모, 언제나 자신을 맨 마지막에 놓았던 아름다운 이모에 대해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의 가장 두려움이었던 ‘달걀’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가비를 찾아가는 길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모가 가비에게로 이어 주는 길이다. 이모의 사랑을 이해한 나는 ‘달걀’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가비를 만나러 가기 전에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달걀을 선물로 준비해 가기까지 한다. 그것은 이모의 절대적 사랑의 힘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가 치매에 걸린 이모에게 마지막으로 한 ‘미안하다’는 말은 부채감과 의무감을 담은 말이다. 이모에게든 부모에게든 그 말을 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입장에서의 말이다. 나를 위해 절대적인 사랑으로 희생한 부모에게 바칠 말은 자식으로서의 책임감을 담은 말이 아니다. 치매를 앓고 계시지만, 한평생 자식에게 한없는 사랑을 쏟은 부모님이 더 듣고 싶은 말, 들어야 할 말은 아마 ‘고마웠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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