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걸리신 부모님들이 먹는 약 이야기[2]
치매 걸리신 부모님들이 먹는 약 이야기[2]
  • 곽용태 효자병원 신경과장
  • 승인 2018.04.1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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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용태 효자병원 신경과장/연세대 외래교수

일리아드, 신과 영웅 그리고 운명


어렵게 레너드(로버트드니로분) 어머니로부터 신약 치료에 대해 허가를 받은 세이어 박사(로빈윌리엄스분)는 약국에서 L-dopa 를 받아 환자 병실로 옵니다. 세이어는 L-dopa의 용량을 늘리면서 순간적으로 망설입니다. 레너드가 앓고 있는 기면병의 병태생리를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이 약을, 그리고 이 용량을 투약하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한 확신이 아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령 같은 레너드를 앉혀서 약을 먹입니다. 그리고 너무 피곤하였던 세이어 박사도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를 잤는지 잘 모릅니다. 한밤중에 깨어나서 침대를 보니 침대에 유령처럼 누워 있어야 할 레너드가 없어졌습니다. 순간 당황한 세이어 박사는 병실 바깥으로 나가니 세이어가 홀에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놀라움 속에 옆에 다가간 세이어 박사에게 레너드가 돌아보면서 말합니다.

"조용해요"(레너드)
"예, 모든 사람이 자고 있는 중이지요"(세이어)
"나는 자고 있지 않아요"(레너드)
웃으면서 "예, 당신은 깨었습니다" (세이어)

1990년 로버트드니로와 로빈윌리엄스가 열연한 "사랑의 기적: 원제, awakening" 에는 많은 명장면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레너드가 다시 원래 상태로 깨어나 춤추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꼽지만 저는 세이어와 레너드가 기적적으로 조우하는 이 장면이 가슴을 울립니다. 사람의 의식을 의학적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지만 상당수의 뇌질환은 의식장애를 가져 옵니다. 한 의사가 전혀 의식이 없는 환자를 약을 통하여 깨워 내고 조우하는 장면은 영화 ET에서 외계인을 만나는 모습보다 더 감동적일 수 밖에 없지요.

의사들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요. 특히 내과 의사의 경우에는 약을 이용해서 환자를 치료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치료 라는 것은 무었일가요? 우리가 치료라는 이야기를 하기 앞서 병의 자연 경과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병의 자연 경과라는 것은 어떤 병이 생겨 처음 증상이 나타난 후 인위적인 치료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을 때 병의 진행이 병의 자연경과 입니다. 그 결과는 발병 이전 상태로의 회복, 후유증을 남긴 상태로 회복, 마지막으로 사망 이 세가지가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병에 특정한 약을 투약하면 이 병의 자연경과가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가수 신해철이 걸린 병은 세균이 혈액내로 들어가는 패혈증이라는 것이지요. 일단 패혈증에 걸리고 치료 안 하면 사망할 확률이 50% 가 넘게 됩니다. 이것이 패혈증의 자연 경과 입니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1929년 세균을 억제하는 신물질인 페니실린을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플레밍은 훌륭한 학자이기는 하지만 지극히 사교성이 떨어지고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이 중요한 약을 홍보하고 임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지극히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이것을 환자 치료에 이용하지 않았지요. 10년도 훌쩍 넘어서 1940년 12월 영국에서 알렉산더라는 경찰이 장미 가시에 얼굴이 긁힌 후 패혈증에 걸리게 됩니다. 여러 치료에도 병이 진행되자 우여곡절 끝에 1941년 2월 12일 페니실린을 처음으로 정맥 주사하게 됩니다. 24시간  후 환자는 놀랍게도 열이 없어지면서 극적으로 증상이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진행 중인 당시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였으며 페니실린 역시 더 이상 공급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부족한 페니실린을 환자의 소변에서 분리하여 다시 사용하는 등 필사적으로 치료하였으나 결국 공급부족으로 페니실린 투약 5일 후 환자는 사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페니실린의 놀라운 효과를 경험한 이후 대량 생산되어 전쟁에서 죽어가는 수 많은 감염 환자를 살리게 됩니다. 즉 페니실린은 세균성 감염병의 자연 경과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은 약이 된 것 입니다.

현대 의학이 보여주는 많은 극적인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이 우리의 병을 치료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치료는 일반적으로 완치라고 생각합니다. 즉 치료라고 하는 것은 병의 자연경과 중 발병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오게 하는 첫번째 자연경과 만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병의 자연경과를 완치로 바꾸는 치료는  한정되어 있지요. 자연경과를 변화시키기는 하지만 완치 상태로 못갈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증상은 좋아지지만 약을 끊거나 병이 더 진행되면 결국 원래 자연 경과로 가는 약도 많습니다.

1999년 어느 날  80세 된 할아버지가 기억력장애, 언어장애를 주 증상으로 외래로 오셨습니다. 환자는 입원 당시부터 거의 말수가 없고, 심한 기억력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오신 아들과 부인의 얼굴이 밣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가족이 아파서 그러려니 하였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기억력과 계산력이 비상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사채 사업을 하여 대한민국에 내노라 하는 사채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돈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 심지어 가족 조차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돈을 빌려 주더라도 절대로 장부에 적지 않고 자신만의 머릿속에 기억하며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할아버지가 갑자기 치매가 생겨 기억력이 없어 졌으니 가족들은 기가 막힌 것이지요. "선생님 제발 30분만 기억을 찾고 말을 하실수는 없을 가요? " 당시에는 치매의 개념도 없었고 레지던트때부터 치매에는 치료약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코그넥스(tacrine)라는 약이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로 개발되었으며 국내에 시판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코그넥스를 처방하였습니다. 이 약은 부작용으로 간 독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씩 혈액 검사 후 용량 조절을 해야 합니다. 때문에 일주일 후  외래 재진을 예약 하였습니다. 일주일 후 어느 날 노신사가 걸어 들어왔습니다. "의사 선생님 반갑습니다, 일주일전에 뵌적이 있지요?" 누군가 하고 얼굴을 본 순간 놀랐지요. 전혀 말도 안하고 기억력도 떨어진 분이 악수를 청하니. 아들도 얼굴이 밝았습니다.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것이지요. 환자는 기억력 집중력 언어기능 까지 좋아졌지만 아직 자세한 기억은 못 하는 상태였지요. 약을 증량했습니다. 그리고 잔뜩 다음 주를 기대하였습니다. 결과는...   환자는 약의 용량을 증가 시키면서 말도 많아지고 기억력이 좀더 좋아졌으나 가족들이 원하는 정확한 기억(채권 회수?)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약이 증량 되면서 아들이 돈을 훔쳐갔다, 부인이 바람 피웠다는 등의 망상과 공격성이 늘어갔습니다. 또한 약을 올리던 중 간수치도 올라가 결국 약을 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환자는 한동안 불안정한 증세를 보였지만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이 약들은 마치 레너드가 좋은 시간을 보내듯, 그리고 이 치매 환자가 가족을 기억하고 대화할 수 있듯, 어느 정도까지는 효과가 있었으나 병의 자연경과를 완치로 바꾸지는 못 하였던 것 이지요. 많은 제약 회사들이 개발된 약들이 비록 완치는 못 시켜도 병의 자연경과를 바꿀 수가 있다고 선전 합니다. 하지만, 진짜 그런지, 아니면 약을 복용하는 동안만 증상을 보이는 증상 효과 개선제 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에서 약을 끊으면 증세가 나빠지기 시작하여 약을 안 먹는 사람들과 비슷한 경과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자연경과 보다는 증상의 개선이 주 약리 작용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꼭 필요한 약들이기는 하지만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일리아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만든 고대 그리스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입니다. 일리아스 이름은 트로이인들의 왕성인 ‘일리온’에서 유래하였고 '일리온의 노래' 란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전설적인 전쟁인 51일 간의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그리스의 장군인 아킬레우스가 중심이 된 원한과 복수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비극을 다뤘습니다. 이 고전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많은 영웅과 신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이들은 모두 각자 신탁에 의한 운명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트로이 장군 헥토르도, 아킬레우스도 심지어는 신들도 그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요.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에 따라서 좀더 명예롭게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지요.  현재 의학의 수준에서는 일단 퇴행성 치매가 생기면 완치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절하게 약을 사용하면 병의 자연경과 안에서 좀더 의미 있는 삶을 유지하거나 연장 할 수가 있지요. 이것은 일리아드의 수 많은 영웅이나 신들이 신탁 안에서 명예롭게 사느냐 아니면 비겁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느냐 와 비슷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도스토에프스키가 쓴 “죄와 벌”에서는 라즈민이라는 청년이 소냐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그 삶에서 구원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차가운 시베리아 수용서에 일어나는 작은 구원, 그러나 퇴행성 치매에 관해서는 그 구원이 아직 다가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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