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3
[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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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0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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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라는 선물 - 박범신의 「당신 -꽃잎보다 붉던」 

김은정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박범신의 장편소설 「당신 -꽃잎보다 붉던」에는 치매에 걸린 노부부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그들의 한평생 삶과 사랑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사랑 끝엔 무엇이 있느냐”는 작가 박범신의 질문에 “그야, 당연히 사랑이 있지”라는 아내의 대답이 모티프가 되어 탄생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모티브로 실제와는 반대로  작품 속의 아내 ‘윤희옥’은 실제 작가 박범신을, 그리고 작품 속에서 오로지 아내 윤희옥에 대한 사랑으로 일생을 살아간 남편 ‘주호백’은 작가의 아내를 모델로 하였다. 이 소설은 그래서 작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흔여덟 살의 주인공 윤희옥이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 주호백을 집 마당에 묻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남편을 마당에 묻고서, 윤희옥은 경찰에 남편의 실종 신고를 한다. 이후 작품의 내용은 소식을 듣고 귀국한 딸 인혜와 함께 그녀가 주호백의 행방을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남편의 죽음을 숨긴 채 딸과 함께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 가는 여정은 바로 남편 주호백의 과거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편 주호백이 앓았던 치매의 증상을 낱낱이 보여 준다. 이 작품은 다른 의미로 주인공 윤희옥의 치매 간병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주호백의 치매 증상과 그에 따른 윤희옥의 간병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병세가 깊어지면서 그는 기억의 회로를 따라 편의대로 시간을 들락거렸다. 이를테면 어제를 십 년 전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었고 오십 년 전의 일을 오늘 일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현상은 가속적으로 깊어졌다. 수직이나 수평으로 놓여 있던 시간의 눈금이 점차 구부러져 크고 작은 원형으로 뒤바뀌는 현상이었다. 처음엔 가까운 기억들이 급격히 소설되었고 다음엔 가깝고 먼 기억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였으며 나중엔 오히려 현재로부터 먼 기억들이 현재의 꽁무니에 늘어 붙어 지금의 시간이 됐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무엇이 됐든, 그 무엇인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그의 머릿속 해마를 조금씩 쪼그라뜨려온 결과였다.

이렇게 다양하게 제시되는 치매 증상 중 주호백이 보이는 가장 극단적인 치매 증상은 완전히 낯선 인격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낯설게 변한 남편의 말과 행동의 원인이 모두 자신이 평생 동안 남편 주호백에게 주었던 상처였다는 것을 윤희옥은 깨닫게 된다. 첫사랑 김가인의 아이를 배고 주호백에게 찾아와서 주호백에게 평생 그 아이(인혜)의 아버지 역할만을 충실하게 하게 한 일, 평생 몸종처럼 충성하는 주호백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던 일, 앓고 있는 아이를 내팽개치고 자신이 사랑하던 김가인에게 가 버린 일, 가정을 돌보지 않고 무용가로서 자신의 일만 위해서 살아 왔던 일 등 말이다.


치매로 인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돌아간 주호백은, 아내 윤희옥이 자신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오직 그녀에 대한 사랑만으로 ‘괜찮다’고 말하던 그 과거의 시간에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욕설과 분노를 그대로 표출한다. 이러한 표출이 실제 치매 가족의 입장에서나 다른 소설 작품에서는 인격의 변화로 느껴지며 치매는 가정 내에서 돌볼 수 없는 질병이라는 인식까지로 연결된다. 하지만 윤희옥은 남편의 숨겨진 분노의 표출을 ‘덕분에’라고 생각한다. 즉 치매를 통해 드러난 주호백의 이러한 분노들 ‘덕분에’ 자신이 평생 외면하고 밀쳐내기만 하여 주호백에게 주었던 상처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기 생의 그늘들까지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고 느낀다.

이런 의미에서 윤희옥에게 남편 주호백의 치매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작품 「당신」은 이러한 삶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고 있다. 죽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안락사’시킨 윤희옥이 딸 인혜와 함께 주호백의 삶의 궤적을 뒤쫓으면서 자신이 묻은 주호백이 실제로 실종되었다고 믿게 된다거나, 마지막에 그녀 역시 치매에 걸려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아이러닉한 부분은 우리의 삶, 그리고 치매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어쩌면 치매는 고통이 아니라 그 속에 반짝이는 보석을 숨기고 있는 축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치매의 간병 방법까지 다루고 있다. 그리고 ‘사랑의 끝에는 사랑이 있다’는 대답처럼, 이러한 간병법의 가장 중심에는 윤희옥이 남편 주호백에게 느낀 절실한 사랑의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절실한 사랑은 남편이 치매에 걸리고 난 후에 비로소 찾아 온 것이며, 윤희옥의 말대로 뒤늦게 알게 된 사랑이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그녀의 간병은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모든 병이 다 그렇지만, 초기에 발견하면 치료하거나 최소한 병이 깊어지는 건 막을 수 있는데, 이렇게 병이 깊어져서 오면 속수무책이예요. 함께 사는 사람들, 왜 이처럼 병이 깊어지게 놔두는지 모르겠어요. 사랑으로, 사람들은 무엇을 보는지, 옆 사람을 보기는 보는지 원.”

남편을 데리고 간 날 의사에게 들었던 이 말은 윤희옥에게 치매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치매’에 대한 생각은 어차피 치료가 안 되는 병이다, 나이 들어서 생기는 병이기 때문에 특별한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희옥은 치매의 진행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병의 진행이 더뎌질 수 있도록, 그리고 환자가 행복한 기억 속에 머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처음에 그의 기억들은 치매와 관련된 일반적인 속설에 따라 소실됐다. 제일 먼저 최근의 기억들이 소실되고, 그다음으로 그보다 오래된 기억들이 몬닥몬닥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엔 청년, 어린 시절의 기억들만 뜸직하게 남은 식이었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일률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순차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던 기억의 소실은 치매가 아주 깊어졌을 때 그 흐름이 아주 완만해졌다.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다음엔 또 다른 룰에 따라 남은 기억들이 재편되기 시작했다. 제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 그것을 고착화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치매의 진행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기억의 고착화’ 단계에서 행복한 기억으로 고착되는가 아닌가는 바로 치매를 받아들이며 간병하는 가족의 역할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사랑으로 간병하면 대개의 치매 환자가 양순해져요. 스킨십이 최고의 치료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행복하다 느끼면 과거에서도 주로 행복한 기억들만을 찾아 데려오는가 봐요. 완치시키긴 어렵지만, 덜 고통스럽게 하는 건 사랑으로 가능하다고 믿어요.”

주호백을 치료하던 요양소 의사의 견해대로 윤희옥은 주호백이 고통스러운 모든 기억들을 다 쏟아내고 행복한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똥과 오줌이 범벅이 된 기저귀로 윤희옥의 얼굴을 문대는 일, 죽 그릇을 내던지는 일, 입에 담지 못할 욕설 등을 윤희옥은 다 받아낸다. 그리고 고통의 기억을 다 쏟아내고 난 후 행복한 기억 속에 주호백이 가 닿을 수 있도록 한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주호백이 머문 기억의 마지막엔 자신을 향해 웃어 주던 젊은 날의 윤희옥이 있고, ‘낙일암의 배롱나무 우물가’ 풍경이 있다. 해서 주호백은 그때 윤희옥을 부르던대로 ‘누나’라고 부르며 자신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맡긴다.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바로 ‘당신’일 것이다.


치매를 인지하면서부터 주호백이 윤희옥을 자주 부르던 호칭은 ‘당신’이다. 이 호칭을 통해 윤희옥은 두 사람의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로 완성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당신’이란 호칭이 윤희옥에게 ‘눈물겹고 따뜻하고 공평한 낱말’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두 사람이 같이 한 인생의 모진 바람들이 모두 지나고 난 이후의 호칭이기 때문이다.


비단 이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노부부들 사이에 서로를 부르는 ‘당신’이라는 말 속에는 삶의 물집과 굳은살, 음지와 양지, 미움과 사랑이 다 쌓여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 ‘당신’은 그 삶을 함께 한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는 호칭어이다. “어머니 당신께서…”처럼 3인칭에 대한 극존칭으로도 쓰이듯이, ‘당신’으로 불리는 사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다.

박범신이 「당신 -꽃잎보다 붉던」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치매가 마지막 선물일 수도 있는 생의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의 제목으로 삼았던 ‘당신’은 오랜 삶의 물집과 굳은살이 박인 노부부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으로서의 ‘당신’이다. 단순히 부부간의 호칭을 넘어서, 치매로 모든 것이 망가지는 순간에도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가치관이 이 말에 담겨 있다. 이러한 ‘당신’의 의미를 느끼게 되는 순간 치매라는 질병은 우리에게 선물로도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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