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여도 존경합니다, 카페 '삼청동우피' 김영미 사장의 고백
치매여도 존경합니다, 카페 '삼청동우피' 김영미 사장의 고백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2.16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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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디자이너로 38년 근무 후 치매 아버지를 돌보며 사는 일상
갤러리카페 삼청동우피 내부 모습
갤러리카페 '삼청동우피' 내부 모습

삼청동에 특별한 갤러리 카페 ‘삼청동우피’가 있다. 스타벅스 바로 옆에서 10년이나 개성 있는 카페로 꿋꿋하게 운영되고 있다. 한겨울에도 팥빙수를 먹을 수 있는 데다 곱고 맛난 팥이 무한리필로 제공된다. 카페 내부는 작은 갤러리의 모습으로 미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예술적 공간이면서 식음료를 즐기며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있다. 반려동물을 동반할 수도 있고 머그에는 귀여운 반려동물이 그려져 있다. 한눈에 봐도 주인장이 동물을 사랑하는 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삼청동우피를 운영하는 김영미 사장은 KBS 디자이너로 입사해 무려 38년 4개월을 근무한 우리나라 방송 디자인의 산증인이다. 디멘시아뉴스가 디자이너 출신의 김영미 사장에게 주목한 것은 삼청동 맛집으로 유명한 카페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치매를 앓는 아버님을 살뜰히 돌보는 딸이기에 보호자로서의 사례를 청취하기 위해서다. 김 사장은 지난해 말 인터뷰한 신은경 전 KBS 앵커의 입사 동기이자 절친이기도 하다. 치매를 앓는 친정아버지를 돌보는 김영미 사장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아버지는 어떤 분일까?


1. 우선 김영미 사장님을 소개해 주세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 계열에 77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76학번까지는 ‘응용미술’이라고 했지만, 우리 학번부터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1~2학년에 디자인 전반을 경험했고요. 3학년에 전공을 택해야 하는데 저는 2학년 때 기독교 신앙인으로 삶의 터닝포인트를 만나 기도하면서 예술, 도예를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3학년이던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4학년이던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으며 긴 휴교령이 내려져 전공 수업 참석이 어려워졌습니다. 1980년 12월 1일에는 언론통폐합이 일어났고 컬러 방송이 시작되면서 제게 의미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도면 그리기, 아이디어 실행 등이 훈련된 터라 1981년 졸업 후 KBS에 무대디자이너로 입사했습니다. 이후 기술 진보에 따른 디자인 변혁은 하루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등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된 여러 행사가 있던 시절, 대형 국제 행사와 쇼 무대를 주로 디자인했어요. 그때 스케일에 관한 공부와 여러 스태프와 협업하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죠.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했고 3년간 미국 연수로 순수미술, 무대미술을 공부했어요. ‘방송 채널 아이덴티티’ 연구로 광고홍보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 홍익대 대학원에서 영상학 연구로 박사를 취득했어요. ‘채널 아이덴티티’라는 용어를 조어해 연구한 논문이 많은 연구자에게 인용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시절까지 15명의 사장을 겪으며 38년 4개월을 일했는데 사장보다 열심히 일한 순간이 제게 좋은 기회였고 인생에 값진 선물 같은 경험이었어요.

아버지와 김영미 사장 가족, 유기견과 함께
아버지와 김영미 사장 가족, 유기견들과 함께

 

2. 치매를 앓는 아버님을 재가케어로 돌보고 계신데요.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들려주세요.

저는 5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습니다. 치매가 깊어져 쉽지는 않지만, 그간 받은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힘을 얻고 형제끼리 협력해 돌봐드리고 있어요. 제 삶에 용기가 좀 있다면 엄마 쪽을 닮아서일 거예요.

엄마는 5남매 중 넷째로 14세에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을 맞아 부산의 전구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유리를 불며 필라멘트를 용접하는 일을 했어요. 1원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고스란히 집에 내놓는 소녀 가장이었죠. 어수선한 혼돈 속에서 엄마 가족은 각자 일을 찾아 입에 풀칠할 수 있었어요. 2년이 지나자 엄마는 학교에 가고픈 마음에 필라멘트 용접봉을 쥔 손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해요. 무작정 야간반이 있는 남성여고를 찾아갔어요. 선생님이 “너 똑똑해 보인다, 교복 입고 오너라” 하여 그 밤에 포목상에 찾아가 흰 광목에 검정 물을 들여 손수 교복을 지어 입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해요. 엄마는 3년을 주경야독하며 졸업했고 신동아화재보험에 입사했어요. 회사가 본사를 서울로 옮길 때 함께 올라간 직원 중 유일한 여직원이었을 만큼 성실하게 일했죠.

엄마는 차비는 아껴도 하이힐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멋쟁이로 사셨죠. 조금씩 돈이 모이자 자그마한 집을 사셨어요. 엄마표 기숙사 1호 학생이 외삼촌이었어요.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동생을 데리고 와 휘문고, 서울대를 졸업시켰죠. 엄마는 이후에도 어려운 친척들이 상경하면 우리 가족과 같이 살며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도운 후 독립시켰어요. 넉넉하지 않아도 말없이 친척들까지 돌보셨는데, 수십 년이 흘러 진해화학 사장이 된 외삼촌이 “너희 엄마는 정말 대단했어. 우리 집안을 살렸어”라며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별명이 작은 은행인 엄마 덕에 아버지는 엄마가 마련한 집에서 결혼생활을 했어요. 아버지는 평생 엄마의 경제력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죠.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인 아버지는 경제학자가 되어 국가의 경제정책 입안에는 밤을 새웠지만 집안 살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제 성격이 긍정적이고 인내심이 있다면 아버지가 보여준 대책 없는 부드러움 때문일 거예요.

부모님과 함께한 3남매 사진
부모님과 함께한 3남매 사진

평안남도 순천의 지주 집안 종손인 아버지는 해방 후 18세의 나이에 홀로 월남했어요. 아버지는 우리 자녀들에게 돈을 마음에 두지 말라고 가르쳤어요. 북에 남은 가족들을 다시 만날 것을 고대하며 오직 공부에만 열중했죠. 경성전기 검침원으로 일하며 적은 월급을 쪼개어 책을 사서 대입 공부를 해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셨어요. 그런데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결핵과 늑막염이 겹쳐 쓰러지셨죠.

장기 입원환자로 투병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어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도, 9·28 서울 수복을 한 남한군도 데려가지 못한 중환자였어요. 1·4후퇴 때 국군은 걷지 못하는 청년을 아예 부상병 기차에 실어 부산에 옮겨 주었어요. 공부가 절실했던 청년은 부산에서도 그 몸으로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셨어요.

아버지의 한국전쟁 경험은 같은 해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한 소설가 박완서 님의 이야기만큼 고단했어요. 전쟁과 가난과 병든 몸으로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근무한 첫 직장인 세관에서 일본 옷감 무역 일을 하던 엄마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고 해요. 그러나 말 한번 못 붙이는 소심한 성격의 아버지는 만남을 중재해 준 절친한 아저씨 덕분에 엄마와 결혼할 수 있었어요.

제가 KBS에서 은퇴하면 일본어를 잘하시는 부모님 모시고 일본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었는데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어요. 은퇴 6개월 전에 엄마가 심정지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제 생일에 온 가족이 모였는데 엄마를 보낸 아버지의 안타까움이 가슴에 박혀 왔어요.

아버지는 평생 경제정책을 연구하며 사셨어요. 국회에 소집될 때면 밤을 새워 자료를 준비해 발표하셨죠. 항상 책을 놓지 않는 학자의 손으로 우리 3남매의 운동화를 빨아 주셨고, 야단치지 않고 수학을 가르쳐 주셨고, 시험 때만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저를 응원해 주셨어요. 연필깎이가 있어도 제 시험 날에 쓸 연필을 깎아놓으셨고, 3남매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을 집어 알뜰하게 쓰셨어요.

인터뷰 날인 오늘 아침, 93세의 아버지 손을 보니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하네요. 독서 습관은 남으셔서 항상 책을 쥐고 계세요. 우리 집에 들고 오신 몇십 권의 책이 너덜너덜해졌어요. 연필을 유난히 꼭 쥐고 쓰신 꼼꼼한 글씨, 우리 가슴에 수놓아 주신 사랑의 수고가 가득한 손, 이제는 연약해진 그 손을 매일 붙잡아드립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노트
아버지의 노트

 

3. 건축가에게 의뢰해 설계한 집에 살며 두 아들과 유기견을 키우고 계신데요. 은퇴 후 자신이 원하는 집을 짓고 사는 것에 로망인 분이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한 소회를 말씀해 주신다면요.

디자이너인 만큼 건축도 매우 사랑합니다. 기회가 닿아 작은 필지를 구입해 두었고, 좋은 건축가를 만나 만족할 만한 작품 같은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편의성과 아름다움을 겸한 건축디자인에 만족하며 생활하게 돼 참 감사합니다. 도면을 읽을 줄 알아서 건축가와 대화 나누며 의견을 충분히 냈습니다. 주택의 장점은 싫증 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당 가꾸기에 흥미가 있다 보니, 크지 않은 마당이지만 식물을 키우며 얻는 배움도 삶에 활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유기견을 만나 가족이 된 건 큰 축복입니다. 네 마리 유기견을 키우다가 재작년 성탄 이브에 한 마리를 하늘로 보내어 세 마리와 삽니다만 더 입양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4. 갤러리카페는 어떻게 열게 되셨나요? 그리고 카페 운영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38년간 변화 발전의 현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감사한 마음을 적게나마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예술에 전념하는 전업작가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늘 있었죠. 특히 청년 작가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외롭게 예술 앞에 서 있느라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작은 전시 장소를 빌려 겨우 일주일 전시하는데도 적어도 수백만 원이 듭니다. 그래서 전업 작가들에게 무료 전시 기회를 제공하며 돕기 위해 갤러리 카페를 열었어요. 전문 갤러리는 일반인이 잘 안 오니까 카페를 갤러리로 꾸며서 일반 손님들이 쉽게 접근해서 감상하기 좋은 전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와 3남매, 아버지 김철호(95), 장남 영한, 차녀 영정, 장녀 영미
아버지와 3남매, 아버지 김철호(95), 장남 영한, 차녀 영정, 장녀 영미

 

5. 평생 학자로 사신 아버님이 치매 판정을 받았을 때 마음이 매우 어려웠겠어요. 아버지 치매는 어떤 경과를 보이셨고 현재는 어떤 상태인가요?

아버지는 1930년 음력 6월 15일생이에요. 고향 주소인 '평안남도 순천군 선소면 남포리 452번지 팔작댁'을 선명하게 기억하세요. 치매가 진행 중이지만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오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잊지 않고 계세요.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올 때 할머니, 어머니, 동생들과 해둔 약속을 소중히 여기셨어요. 서울에서 공부해서 식구들과 다 같이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겠다고요.

아버지는 공화당 경제정책 전문위원, 재무부(현, 재정경제부) 고문으로 국회의장실과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했어요. 국회가 열릴 때면 경제개발 정책 입안을 위해 밤을 새워 일하시던 모습을 기억해요. 국회의원들이 직접 해야 할 일들인데 의원들이 공부 안 하는 모습을 걱정하며 당신이 연구한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하셨습니다.

치매 판정을 받고 약을 드시기 시작한 때가 2016년입니다. 그보다 2년 전인 2014년에 어머니의 눈 수술이 실패하는 아픔이 있었어요. 왼쪽 눈을 실명했고 오른쪽 눈에 미세한 시력만 남았죠. 엄마도 실망했지만, 아버지가 받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과 떠들썩하게 모이진 않았지만, 책을 사랑한 몇몇 분들과 깊이 만나셨어요. 대부분 고위 공직에 계신 분들입니다만 소박하고 정갈한 분들이었죠. 을지면옥에서 만나 냉면 한 그릇 먹고, 커피 한 잔으로 책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시는 모임을 즐기셨어요. 운동은 조용히 혼자 운동장 스무 바퀴씩 뛰셨고, 70대 중반 이후 무리가 되니 동네 주변 산을 세 시간 정도 오르내렸습니다. 혼자 사색하며 걷기, 도서관과 집에서 책 읽기의 일상을 반복했어요. 몸과 두뇌활동, 소박한 사회생활이 84세까지 지속됐죠.

그러다 엄마의 실명으로 받은 충격을 겪었습니다. 오래 이어온 소박한 모임과 산책 등 운동과 사회생활을 딱 멈추고 엄마 곁에서 독서로만 소일하셨습니다. 엄마 혼자 지내다 혹시 낙상사고라도 생길까 염려가 크셨죠. 운동과 사회활동을 갑자기 멈춘 지 2년이 지나자 경도인지장애가 시작됐어요.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고 건강한 신체활동을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치매가 조금씩 더 진행돼 이전처럼 소리 내 읽는 독서는 어려워지셨고 밤낮의 구분도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치매임에도 아버지가 평생 살아온 흔적이 드러납니다. 깨끗한 생활 습관, 독서와 기도, 온화한 태도는 바뀌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치매는 쉽지 않습니다. 시간을 착각하고, 식사 드신 것도 잊으시고, 문 바깥에 누가 왔다고 섬망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웃음과 말씀이 거의 없어진 것도 슬픕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함께 성경을 낭독하며, “햐! 말씀대로 살면 법이 필요 없다.” 하셨는데 요즘은 이런 표현도 사라져서 아쉬워요.

또 아버지 치매에는 특징이 있는데 수학, 일어, 영어는 가능하십니다. 간단한 수학 문제를 내드리면 모두 풀고, 영어와 일어는 읽고 동시 번역할 정도로 언어 능력은 남아 계세요. 그러니까 치매는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 뇌 손상 모습도 다릅니다.

 

생후 18개월의 첫 딸(김영미)을 안고 있는 아버지

 

6. 자녀 중에 자신이 주 보호자로 돌보고 계신 배경도 궁금합니다. 비교적 조용한 치매에 속하는 아버지를 집에서 모시다가 주간보호센터를 결정하셨을 때의 상황과 그 이후 현재는 잘 적응하셨는지도요.

저는 3남매 중 맏딸입니다. 엄마는 죽음에 대한 준비와 계획이 있었어요. 엄마는 외아들인 제 동생과 의논해 엄마가 홀로 남으면 혼자 지내겠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으면 아들네가 모시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러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올케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망설임 없이 치료에 전념하도록 했고, 한동안 동생과 제가 아버지를 위해 본가에 가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과 동생네가 모두 사업과 일상이 쉽잖았습니다. 올케가 편찮으니, 혼자가 되신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셔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막내 부부는 치과의사와 간호사로 1995년부터 중앙아시아 K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었죠.

그렇게 올케가 항암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신 뒤 현재에 이르렀어요. 아버지를 위해 식사 준비에 마음 쓰며 저도 행복했습니다. 어느 때가 아버지의 마지막 식탁이 될지 모르나 하늘에 계신 엄마가 보셔도 칭찬하실 만큼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어요. 이젠 깊은 대화가 어려우니 한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일상을 실천했습니다.

 

제일 예쁜 그릇에 담아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한다. 아버지를 존중하는 마음은 식탁에 기울이는 정성부터.
제일 예쁜 그릇에 담아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한다. 아버지를 존중하는 마음은 식탁에 기울이는 정성에서부터.

 

아버지를 돌보는 일상은 평생 회사원으로 살아온 제게 새로운 배움이었고 지금도 노력이 요구됩니다. 아버지와 좋은 추억뿐 아니라 제 노년을 위해서도 중요한 훈련입니다. 차 한 잔, 밥 한 그릇도 정성껏 단정히 대접하려 하고, 설거지가 귀찮다고 대충 아무 데서나 먹지 않으려 합니다. 아버지와 긴 대화를 엮어가기 쉽지 않아서 집은 고요한 편입니다. 전업 작가들을 돕기 위해 시작한 갤러리카페도 우선순위에서 멀어진 듯했습니다. 그러다 책 한 권이 전환점이 됐죠.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표지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표지

다큐멘터리 영상 감독인 딸이 치매 엄마를 간병하는 실화를 담은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라는 책입니다. 20년 전부터 본가에 갈 때마다 카메라로 부모의 평범한 일상을 찍다가 2014년 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 앞에서 더는 카메라를 꺼내지 않자 “내가 이상해져서 안 찍니?”라는 질문에 다시 카메라로 담은 영상이 TV 방송을 탔고, 일본 사회에 큰 공감을 일으켰습니다. 이 책에 는 노노케어의 모습이 담겨 있고, 사회와 떨어져 ‘고립’되는 과정이 쓰여 있습니다.

고립! 그 단어가 제 가슴에 닿았어요. 엄마의 소천 당시인 2019년부터 주간보호센터를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시설이나 프로그램에 만족한 곳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총기가 맑으셔서 손뼉 치고 소란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실 것 같았어요. 그러다 고립 탈피를 목표로 2023년 3월에 좋은 시설과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현재 열 달째 다니고 있는데 만족도가 높습니다. 몇 년이 지나며 조금 더 치매가 진행되신 상태라 적응이 수월했다고 생각합니다. 치매 어른을 집에서 잘 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립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7. 다른 형제분은 아버지 치매 돌봄에 어떻게 분담하고 있는지요? 특별히 보호자로서 선생님 역할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주변에 형제자매들 간에 부모 돌봄으로 의견이 충돌해 관계가 나빠진 걸 종종 봤어요. 다행히 저희 3남매는 우애가 나뉘지 않았어요. 아버지를 직접 모시는 건 맏이인 제가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도 환영했습니다. 좋은 아버지일 뿐 아니라 좋은 장인이고 사랑 많은 외할아버지셨거든요.

동생은 아버지의 상비약(신경과, 비뇨기과 약 등)을 챙기고, 때마다 목욕시켜드리러 옵니다. 간식도 잘 챙기고요. 선교사인 막냇동생은 2014년 엄마의 눈 수술 실패 후 매년 여름 두 달 이상을 한국에 들어와 머뭅니다. 의료인이기에 부모님 건강에 전문지식을 동원해 좋은 돌봄이 되도록 앞장섭니다. 3남매가 함께 짐을 지고 무엇이든 서로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고 있어요. ‘세 겹 줄 돌봄’에 든든하고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8.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어릴 적 부잣집 장손으로 태어나 공산당에게 풍비박산 난 집안으로 나이 열여덟에 혼자 넘어와 밥 한 끼, 하룻밤 잠자리가 힘든 삶을 사셨죠. 그래도 나 힘들었어, 고생했어, 라는 말씀을 한번도 안 하셨어요. 다시 돌아갈 소망으로 약속을 지킨 삶을 사셨습니다. 내일이면 고향의 가족을 만나리란 희망을 품고 엄살과 불평 없이 사셨죠.

“새벽 미명에 늘 기도하시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그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라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깨끗한 삶을 사셨기에 날마다 행복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아버지를 존경하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아버지, 지금은 말씀도 조리 있게 하실 수 없고 많은 기억을 잊으셨지요. 그러나 우리 가족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신 덕분에 아버지 기도 응답으로 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기도하셨는지 압니다.”

 

아버지의 생신 축하 자리에서
아버지 생신 축하 자리에서

 

9.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제게 주신 조그만 분깃, 이웃과 함께 성장해 가길 기도합니다. 무명의 청년 작가, 어려운 전업 작가를 지원하고 자립준비청년들의 정착을 돕고, 유기견과 유기묘를 구조하는 일을 계속해 가고자 합니다. 2024년에 부모님의 삶을 기록한 작은 책을 냈으면 하는 소망도 있고요.

그리고 ‘수밤쿵작작’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수요일 오래전부터 가르친 청년과 그림을 그립니다. 이제 한 달에 한 장이라도 그림을 완성해 볼까 합니다.

 

10. 끝으로 디멘시아뉴스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미래를 내다보는 디멘시아뉴스의 사랑과 전문성에 존경을 드립니다. 인류가 가보지 않은 초고속 고령사회 진입이라니! 아무리 대비해도 허술한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늙고 약해지며 결국 서로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정부가 꼭 해야 할 일, 어르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 계속 앞장서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미술이 어르신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연구하며 미력하나마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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