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의식을 잃으신 어머니 곁에서 선명해지는 정(情)
[황교진 에세이] 의식을 잃으신 어머니 곁에서 선명해지는 정(情)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1.02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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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다짐이 교차한 20년 병간호의 시간

 

편한 운동화를 처음 신은 엄마

1994년 봄에 제대하고 여러 고민을 하며 복학을 준비하던 가을 무렵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갔다. 대화 나눌 시간도 없던 우리 모자가 같이 손잡고 국내 어딘가라도 여행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설악산 부근에 콘도를 잡은 1박 2일의 나들이와 다름없었다. 그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딱딱하고 저렴한 구두만 신고 일하러 다녀오시던 어머니는 처음으로 편안한 러닝화를 빌려 신으셨다. 설악산 입구의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어머니는 발이 가벼워 날아갈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여러 백화점을 방문해 발품을 팔며 다음 시즌 디자인을 파악하면서 숙녀복 도매 일을 하신 어머니 발은 불편한 구두에 많이 상해 있었다. 설악산에 높이 올라가지 않고 중간 지점에 널려 있던 음식점에서 파전을 사 먹을 때 나는 가만히 어머니 손을 잡았다.

운동화 하나에 그렇게 기분 좋아하신 어머니 표정에 울컥했다. 설악산 풍경을 감상하는 시간은 내게도 신선한 경험인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 손잡고 걸으면서 괜스레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감겨왔다.

운동화를 처음 신어 본 어머니, 딱딱한 신발에 상해 가는 발로 가족을 챙기며 살아온 어머니께 평생 편한 운동화만 신어드리게 할 순 없을까? 생각했다. 새어 나오는 눈물을 들킬까 봐 두 눈 질끈 감고 몰래 한숨을 지었다.

나는 제대하면 뭐든 잘 해낼 줄 알았다. 무슨 일이든 뚫어낼 송곳 같은 모습으로 사회의 어디라도 찔러대며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복학을 앞두고 몇 달을 지내오며 늘어난 건 두려움과 공허함이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전적으로 인내하며 사는데,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짐인 것만 같아 무언지 모를 통증이 가슴에 저며왔다.

강릉 바닷가의 방파제에 앉아 오징어회를 먹다가 몇 젓가락 집어 먹고, 혼자 파도가 쳐 올라오는 바다 가까이 다가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 별로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어찌나 초라해 보이는지, 군 복무 마치고 이제 세상에 나왔으면서 왜 이리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만 차오르는지 자문했다.

그러다 채울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리지 말고 편한 운동화 한번 신어 볼 여유조차 갖지 못한 엄마를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어머니의 모습에서 힘을 얻고 새로운 자신감을 채워서 달려갈 목표를 정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힘쓰는 새벽 배송 알바를 하며 복학을 준비했다.

그렇게 공허하고 인생의 좌표를 찾지 못하며 고민했던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내 소명은 분명해졌다. 중환자인 어머니를 재가 케어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상한 발을 따뜻한 물로 씻고 마사지하며 시장에서 일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살결로 유지시켰다.

가끔 엄마 발바닥의 비누 향을 맡으며 내 볼에 비벼 보고 뽀뽀도 했다. 발병 후 병상에서 돌아가시기까지 20년이나 걷지 못하여 근육이 줄어 종아리가 야위어지시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 발에 편한 운동화는 내가 되었다. 내 삶 자체가 나이키보다 좋은 엄마의 신발이 되는 기쁨이 있었다.

“엄마! 나를 신고 늘 편안하게 쉬세요. 다리 아픈 거 참으며 피곤하셨던 발품도 필요 없고, 딱딱한 구두도 신을 일 없습니다. 내가 계속 엄마의 가장 편한 운동화가 될게요.”

엄마와 고기 밥상

아주 가끔 엄마의 밥상을 받았다. 대학생 시절, 주말 저녁에 내가 집에 있을 때다. 건축공학 전공 특성상 학교 부근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며 설계 과제를 했고, 전공 공부보다 열정을 더 쏟은 기독 동아리 활동에다 주말에는 교회 대학부 모임에 참석하느라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 가끔 집에 머무르던 주말 저녁에 엄마의 사랑이 담긴 밥상을 받으면 그 평안한 기쁨이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고기를 구워주셨다.

일요일에 함께 교회에 갔다가 집에 오면 LA갈비로 점심을 해주신 날이 많았다. 엄마는 곁에서 내 식사를 챙겨주지 못한 오랜 시간에 늘 미안해하셨다. 그래서 난 병상의 엄마에게 제일 자주 하는 말이 “나 밥 잘 챙겨 먹고 있어요!”다. 걱정하실 부분이 무엇인지 뻔히 보이니 인사말로 밥 잘 먹고 있단 얘기부터 한다.

집에서 내가 못 먹고 못 자고 간호할 때 어쩌다 외출하면 친구들이 삼겹살로 한 턱 쐈다. 예전에 어머니와 고기를 먹을 때와 친구들과 먹을 때 큰 차이점을 발견한다.

누군가 고기를 구우며 섬기는 사람이 없으면 고기는 먹기가 참 불편한 음식이다. 가끔 내가 친구들과 고기를 먹을 때 집게를 들고 굽는 역할로 자원하면 맛있게 익은 것보다 탔거나 찌꺼기를 먹게 된다. 엄마가 구워주는 고기를 먹을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내 친구들이 이상한 놈들은 아니고.

내가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 하신 어머니, 바깥일을 하느라 손수 챙겨 주지 못한 밥상 때문에 늘 미안해하신 어머니, 아들은 잘 익은 맛있는 부위를 먹는 동안 탄 거나 찌꺼기 드시면서 즐거워하신 어머니, 그 어머니를 위한 오랜 병간호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을 위해 애쓸 수 있는 시간을 듬뿍 누리고 있어 고맙기만 했다.

간호할 때 나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며 열심히 잘 챙겨 먹었다. 건강하게 간호할 수 있는 체력을 얻기 위해 풀만 먹고도 힘센 코끼리를 생각하며 그린 필드의 밥상이라도 만족하며 열심히 먹었다. 삼겹살 먹으러 나오라는 친구의 전화가 오면 절대 튕기지 않고 쏜살같이 나갔다. 그리고 고기는 내가 굽지 않았다!

베스트 인생이란

어머니는 내게 옷을 참 잘 사주셨다. 내가 원하기 전에 멋지고 좋은 옷을 골라서 근사한 코디의 아들로 만들어 주셨다. 내가 무슨 일인가에 시달리며 마음이 힘들던 날 집에 오면, 어떻게 아셨는지 옷 선물로 내 기분을 바꿔주신 날이 많았다.

난 어머니 덕분에 옷을 고르는 방법을 모르고 살 필요도 느끼지 않은 시절부터 베스트드레서 소리를 들었다. 엄마가 집에 계실 때 내가 외출할 때면 현관에 배웅하면서 옷차림에 대한 조언을 꼼꼼히 해주셨다.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주며 옷매무새와 단추를 만져주셨다.

대학 4학년 봄에 건축기사 시험에 떨어진 날, 축 처진 몸으로 집에 오니 내 책상에 화사하게 입을 청바지와 티셔츠 몇 벌이 쇼핑백에 담겨 있었다. 일하시느라 대화 나눌 시간이 별로 없는 생활에도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계신 듯 항상 필요를 먼저 채워 주셨다.

한밤중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무심코 냉동실을 열어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몬드봉봉이 가득 담긴 큰 아이스크림 통이 있었다. 우리 모자의 기막힌 텔레파시에 탄성을 지르며 달콤한 사랑의 맛을 즐겼다.

나는 주일 아침에 내가 선택한 옷차림을 칭찬해 주는 엄마의 눈빛을 느끼며 손잡고 교회 갈 때가 제일 행복했다. 예배당에 착석하자마자 엄마는 길게 기도하셨는데, 일찍 기도를 마친 나는 예배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성경책을 뒤적거리다가 기도하는 엄마 콧등을 검지로 슬쩍 건드리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엄마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기도를 그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그 긴 기도의 응답으로 내 삶은 절망과 얼룩으로 어두워지지 않고 작가 생활, 취직, 결혼의 일상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가치 있게 사는 삶을 고민하는 것 또한 어머니의 기도 힘이다.

내 일상의 필요를 기막히게 채워주신 어머니를 위해 내가 어머니의 생명을 지키며 필요를 채워 드린 세월이 20년에 달했다. 중년이 된 요즘, 외출할 때마다 코디에 신경을 쓴다. 누가 봐도 힘든 고난을 견딘 사람인 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유쾌 발랄한 모습으로 코디하는 것을 즐긴다.

어머니가 좋아하신 스타일이 밝고 경쾌하면서 진중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난 운동을 열심히 하고 밝은 차림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유쾌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경제성, 디자인, 질감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유행을 타지 않는 좋은 옷을 사주신 어머니께 영향을 받아, 절제력이 있고 은은한 매력을 풍기면서 신뢰하고 소통하는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인간의 행복은 평안한 가족에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싫증 나지 않고 편안하며 부드럽게 잘 맞는 옷과 같은 가장인지 돌아본다. 때에 맞춰 내 필요를 베스트로 채워주신 어머니는 지금 하늘에서 내가 꿈꾸며 기대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응원해 주실 것이다. 침상에서 내 간호를 받으실 때 내가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면 눈을 세 번씩이나 깜빡거리며 기쁨을 표현하시던 어머니가 그립다. 어머니처럼 나도 아이들을 베스트드레서로 코디해주고 싶다. 지금 내가 길게 기도할 때 몰래 다가와 내 콧잔등을 건드리며 장난치는 못된 아들이 자라고 있다.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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