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왜(why)에서 어떻게(how to)로
[황교진 에세이] 왜(why)에서 어떻게(how to)로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09.26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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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터닝포인트가 된 일화들

가정재난과 같은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힘은 공동체의 지지다. 내게 공동체는 가족과 친척이 아니라 교회였다. 점심시간이면 부목사님 세 분이 교대로 중환자실 대기 복도에 오셔서 면회 시간에 함께 들어가 어머니 손을 잡고 기도해 주셨다. 면회 후 같이 점심을 먹으며 내 괴로운 심정을 경청해 주셨다. 

어머니의 발병 당시는 겨울수련회 기간이라 기존의 친한 친구들을 곁에서 볼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연락할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그저 곁에서 손잡아 주고 아픔의 시기를 견디는 마음속 몇 마디를 들어주면 충분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무거운 마음에 거리를 두는 것은 친구들의 잘못이 아니다. 

의사도 예후를 진단할 수 없는, 뇌출혈로 의식이 없는 어머니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아픔을 위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평소처럼 다가와 차 한 잔 같이 마셔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내 친구 관계는 대학 시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학교 친구들에서 이번 일을 통해 새로 만나는 교회 친구로 바뀌었다. 자주 찾아와 주었고, 기도해 주었고,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인터넷에 기도 부탁 글을 올리면 뜨겁게 호응해 주었다.

1997년 11월 27일, 갑자기 의식을 잃으신 어머님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적같이 깨어나시리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무너진 폐허의 연속이었다. 내 생애 가장 가슴 아픈 성탄절을 보냈다. 새해가 되어도 어머니는 천천히 한쪽 눈을 조금씩 뜨는 것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는 하루 세 번 면회하면서 대학원 입학 전 세미나에 참석했다. 어딘가 몰두할 대상이 필요했다. 공부라도 해야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공부하는 건축구조학 대학원 연구실에서는 실험하고 남은 고철들을 처분한 대금으로 어머니 병원비에 보태라고 건네주었다. 그런 감사한 마음들을 확인하면서도 내 마음은 절망과 탄식이 가득했다. 

한 번은 대학원 선후배 단합회로 북한산 등반 일정을 참가했다. 당시 모 대학 산악부의 겨울철 지리산 등반에서 조난 사고가 일어나 많은 청춘이 사망한 뉴스가 있었다. 나는 차라리 이 땅을 떠난 그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삶에 의욕도 희망도 없었다. 면회 시간마다 마주하는 어머니는 예전의 단아한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점점 노숙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아침 면회를 동생 혼자 들어가게 하고 난 대학원 동기와 선배들과 북한산에 오르면서 몰래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행을 이탈해 앞서 올라갔다. 북한산 상층부의 미끄러운 바위에서 그만 미끄러졌다. 다행히 등산로 줄을 잡고 엉덩방아를 찧는 정도로 그쳤다. 그런데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온 소리가 “죽을 뻔했네”였다. 쓴웃음이 나왔다. 정상에서 찬 바람을 쐬며 기다리니 잠시 후 아래에서 올라오는 선배들이 보였다. 중간에 내가 보이지 않아 걱정했다며 야단을 맞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 질문을 하면 할수록 우울했고 답도 없었다. 답이 있었다면 마음이 시원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 불기둥이란 답을 눈앞에서 보면서 계속 죄를 짓는다. 답이 있어도 마음의 변화는 없다. 내 고통은 답의 유무에 있지 않았다. 

혜민병원에서 해를 넘기고 설 명절을 맞으면서 뉴스에서는 IMF로 인한 고통이 날마다 도배되어 흘러나왔다. 중환자실 철문 앞에서 뇌 기능이 정지된 어머니를 그저 바라보며 극심한 고통 중에 기다리던 나는 그 국가적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모두가 아픈 시기인 것이 차라리 위로될 정도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1월 말에 차도가 없는 어머니를 경희의료원으로 옮겼다. 구급차 안에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병원을 옮기는 건 현실에 대한 절망, 미래에 대한 고통을 가중시킨다. 흔들리는 구급차에서 내 온몸도 죽어가는 듯했다. 경희의료원에서 양한방 치료를 병행했지만, 치료 효과는 없었다. 

5개월을 비싼 양한방 병원비를 지불하며 병원에 사정해 붙어 있다시피 하다가 6월에 퇴원 명령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2주간 비싼 비용이 드는 여러 정밀 검사를 해보았지만, 의료진에게 가망이 없는 상태라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다. 

집으로 모시고 가야만 하는 결론 앞에서 나는 집과 가까운 아산병원 신경외과를 예약해 보았다. 당시에는 장기 입원할 수 있는 중환자의 재활병원이 없었다. 종합병원에서 퇴원하면 가정간호사 제도를 이용해 집에서 투병해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산병원에 어머니가 입원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선생님은 차가운 얼굴로 내 질문에 간단하게 답하며 입원이 안 된다고 했다. 사정해도 소용이 없는 매몰찬 공기에 나는 인사하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대기업의 자녀였다면, 엄마가 이 병원의 모체인 대기업의 사모님이었다면 이 병원의 특실로 어머니를 VIP로 모실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아산병원에서의 그 짧은 시간은 내 고통의 터닝포인트였다.

그 숨 막히는 고통 중에 내가 깨달은 것이 ‘앞으로 더는 왜 라는 질문을 하지 말자!’였다.

‘왜’ 내 어머니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우리 집은 돈이 없을까?

‘왜’ 나는 의대생이 아닐까?

‘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절망의 연속일까?

이런 ‘왜’는 내 마음을 중병에 들게 했고,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로서 이 문제를 짊어지고 나갈 힘을 소멸시켰다. 나는 정신 차리고 앞으로 나아갈 일들을 찾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은 ‘왜’의 질문들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지 솔루션만 찾기로 했다.

나는 안방을 병실로 꾸미고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내가 의사와 간호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하면 대기업 사모님보다 평생 광장시장에서 일한 어머니를 VIP로 모실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내가 의대 출신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모든 생각을 어머니 간호에만 집중하는 것이 돌아보면 내 인생에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 마치 엄마가 갓 태어난 아픈 딸을 돌보는 심정으로 나는 이 아픔과 싸워갔다. 

아니 싸우기보다 내 일상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이 적절하다. 나는 식물상태의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정확하게 간호하는 아들로 성장했다. ‘왜’라는 질문을 버리고 ‘어떻게’를 선택한 뒤 이런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신비한 형통을 경험했다.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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