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어머니 결핵 세 번째 재발한 날
[황교진 에세이] 어머니 결핵 세 번째 재발한 날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1.05 0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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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건 끝까지 버텨내는 것

2012년 10월 6일, 어머니 결핵이 재발됐다는 통보 전화를 받았다

이전의 요양병원에서 처음 결핵에 감염된 어머니는 장기 약물요법으로 완치되지 않고, 다섯 번째 옮긴 요양병원에서 세 번째 결핵 진단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달려가 서둘러 퇴원해 대학병원 격리실로 가야 한다. 정신이 멍해졌다. 주말에 집 청소를 하던 중에 병원으로부터 받은 긴급 통보에 탄식만 나왔다. 그리고 또 이 싸움을 어찌 치를 건가에 대한 긴장감으로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앞이 캄캄하다.

 

낙심, 또 처절한 바닥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결핵 치료를 받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옮기기 전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결핵 치료를 받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옮기기 전

낙심 중에 김태형 순천향병원 감염내과 교수님께 전화드려 급히 병원을 옮길 수 있었다. 요양병원에서 앰뷸런스를 불렀고, 나는 동행할 가족이 없어 앰뷸런스 구급요원께 어머니 석션과 호흡의 안정을 맡기고 내 차로 드레프트하듯 쫓아갔다.

주말 오전의 막힌 도로를 뚫고 한남동의 병원에 도착 후 바로 비어 있는 격리실로 입원할 수 있었다. 어머니도 나도 계속 이런 고생의 연속이지만, 월요일까지 무방비로 기다리지 않고 주말에 대학병원으로 이원해 대처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집중 치료 기간 2주가 걸린다는 소견을 받았다.

내가 계속 병실에 붙어 있을 수 없어서, 병원 내 간병센터에 전화를 걸어 2주 동안 돌봐주실 간병인을 요청했다.

‘부디 좋은 분이 오시기를…’

고단한 세상살이에 지친다. 집에서 8년간 간호하던 시절에는 접해본 적 없는 결핵이 요양병원에서 세 번이나 재발되다니.

두 아이 기르며 계속되는 이런 일상에 지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닐 것이다. 기도도 안 나온다. 내가 너무 약자란 정체성 앞에 엎드리고만 있다.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한남동 격리병동(1)

천둥소리가 들린다. 오늘 너무 지친 내 마음을 하늘이 위로해 주시려고 비가 나리나?

아니다.

여의도 한강 변에서 매년 열린다는 세계불꽃축제란다. 격리실까지 들리는 쿵쿵 소리에 마음이 어지럽다. 갑자기 어머니를 앰뷸런스에 태워 순천향병원 격리병동에 달려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병원 밖은 불꽃축제라구?!

석션, 체위 변경, 투약 이것저것 해야 하는 내게 반복되는 고통과는 다른, 세상의 야속한 풍경이 쿵쿵 소리로 들려온다.

이봐! 당장 그만둬! 뭐라? 불꽃쇼? 나 괴로운 거 안 보여?

소리 지르고 싶다. 갑자기 밤새워 간호하게 될 줄 예상 못했다. 예전에 많이 해오던 일인데도.

앰뷸런스 수송비, 기저귀, 칫솔 세트, 핸드폰 충전기 등을 사느라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하는데, 앞으로 나올 대학병원 의료비와 잘 구해지지 않는 결핵 환자 간병인의 비용을 감당해야 하니, 이것저것 가슴이 쓰리다.

무엇보다도 가족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고독감이 나를 더 고립시켜 외롭게 만든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나 때문에 고통받는 거라고 대놓고 막말을 쏟고 가실 것이다. 큰 병원에 옮겼다고 전화드리면 내가 상처받을 게 뻔하다. 여동생은 세 아이 키우며 사는 데 힘들어할까 봐 걱정을 얹어주고 싶지 않아서 연락하지 않았다.

불꽃쇼 소리가 그쳤다.

그래, 내게도 고통이 그칠 날이 오겠지.

문득 고통이 그치면 지금 나처럼 세상 한 곳에서 마스크 쓰고 멸균 장갑 끼고 견디는 누군가에게 달려가 꼭 안아 줘야지. 꼭 기억해야지.

갑자기 감염내과 주치의 김태형 선생님께서 불쑥 병실에 찾아오셔서 허깅해 주셨다. 이 뜻밖의 감동 때문에 모든 게 희망적으로 해석된다.

 

한남동 격리병동(2)

오전에 연락드렸을 때는 부산에 출장 중이던 김태형 선생님이 홍길동처럼 병실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바로 악수가 아닌 허깅으로 반가워해 주신 거다.

어머니 안 좋으셔서 입원해 만났는데 반갑단 인사가 미안하다고 하시며.

어머니 현재 상태가 2009년 6월에 지금처럼 순천향병원 격리병동에 입원해 결핵 치료받을 때보다 양호하다고 말씀하셨다. 이번에 꼭 완치시키겠다고 힘까지 주며 위로해 주신다.

그동안 잘 지냈냐며 엄마처럼 내 안위를 걱정해 주신다.

오늘 병원 옮기며 이일 저일에 시달리다가 선생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니 황량했던 마음에 꽃이 핀다. 선생님은 격리실을 나가시며 꼼꼼하게 마스크 쓰란 얘기로 우리 모자에 대한 애정을 흘려 놓으셨다.

 

한남동 격리병동(3)

목이 마르다. 누구처럼 성공과 우승을 향한 목마름이 아니라 갇힌 자, 가난한 자로서의 절박한 목마름이다. 아무 일이 없었다면 오늘 처가에 있는 아이들과 아내를 만나기로 했는데, 물거품이 됐다. 늘 그렇듯 숨 좀 돌리려면 바짝 긴장해야 하는 일이 덮쳐 왔다. 생경한 일이 아니어서 현실 파악이 빨리 돼 다행이기도 하고, 반복의 과정이 무엇인지 훤히 보이기에 더 고통스럽기도 하다.

요양병원 주치의께서 결핵 환자는 병원에 있을 수 없다는 얘길 조심스럽게 건네주셨다. 난 이미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던 중이어서, 보호자 마음을 그렇게 신경 쓰시는 주치의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대책이 없단 걸 알고 월요일까지 병원을 찾아보겠단 말씀에 나는 별다른 질문 없이 어머니 계신 구석 병실로 걸어갔다. 터벅터벅 다리에 힘은 풀리고 어깨가 푹 처진 모습을 병동 수간호사님이 보시고는 왜 그리 낙심하냐고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바로 순천향병원 감염내과 김태형 선생님께 문자로 연락드리고 일사천리로 한남동에 왔다.

우리 모자는 간만에 격리실에서 고요한 공기를 맡고 있다. 앰뷸런스 뒤에서 액셀을 마구 밟으며 달려오던 때와 다르다. 아침에 잠깐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사 한 방은 없을까 하는 발칙한 생각이 들 만큼 영혼이 어두워지려 한 순간을 넘어온 뒤의 적막이다.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핸드폰으로 글을 쓰는 중에 석션을 했다.

순천향병원 입원 후 당직의와 간호사께 그간의 병력을 설명하는데 구구단 외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랜 시간 엄마의 병 간호를 하며 견뎌온 히스토리에 억양을 세우지 않았고, 환자 간호 아주 잘하는 아들이라는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 질문에만 간단명료하게 대답해 드렸다.

지금 난 낮아질 대로 낮아져 톤도 없고 색깔도 없다. 신의 긍휼과 살아계심을 느끼고 싶다.

 

한남동 격리병동(4)

새벽 내내 석션을 하고 기저귀를 갈며 잠 한숨 못잤다. 체력이 바닥나고 있다. 주말과 주일은 밤샘, 회사 출근은 새벽. 갑자기 생의 모든 것이 극기훈련장으로 보인다.

간만에 어머니 곁에 24시간 붙어 간호해드리는 동안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오늘 간병인을 구하지 못하면 체력이 바닥날 것 같다. 다행히 오후 1시에 오시겠다는 분과 연락이 닿았는데... 좋은 분이 오셔야 할 텐데...

간병비를 드리고 병실을 나갈 때 내 마음은 복잡해진다. 월급이 모두 소진돼 버리는 지출도 그렇지만, 여러모로 우울감이 압박해 온다. 현재로서는 출근도 힘들 만큼 소진된 상태다.

주일에 교회도 못 갔다. 어머니 살아계신 동안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고 견뎌왔건만, 지금은 우리 모자, 서로의 고통 앞에 침묵만 흐른다.

엄밀히 말하면 완치도 호전도 없다. 그저 고통의 연장이며 조금씩 악화되는 상황이다. 그 연장의 길목에서 내 역할이 무슨 의미인지 그 어느 때보다 의아스럽다.

어머니 배에 가스가 많이 차서 아침 이후 금식 오더를 받았다. 최근에 계속 어머니 배가 불룩해 보여서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내가 신경을 써도 모르는 부분이 참 많다. 다 안다고 해도 해결책을 다 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 묘한 지대에서는 적절한 조절이 최선이고, 올인이 최악일 수 있다.

에어매트 공기 순환 소리, 어머니 거친 숨소리만 흐른다.

합정동 직장에서 퇴근 후 바로 한남동 병원으로 달려왔다. 김태형 선생님은 병원에 오면 진료실에 따로 불러주신다. 친형님처럼 편안하게 위로해 주며 인생 조언도 들려주셨다. 어느 보호자가 이렇게 주치의 선생님과 다정하게 지낼 수 있을까. 자신의 능력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은 참 멋지다. 


어머니는 격리실 집중 치료를 받은 지 한 주가 지나자 결핵이 감염성 없는 상태로 호전돼 일반 병실로 옮겼다. 그리고 곧 몇 가지 약처방을 받고 퇴원했다. 다행히 김태형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요양병원에 입원이 허락돼 다시 이전 수준의 투병 환경으로 돌아갔다. 극심한 고통은 그렇게 일주일여 만에 종료됐다. 고통의 완전한 종료는 없어도, 세 번째 재발한 결핵에서 자유케 된 기쁨, 다시 한고비 넘긴 기쁨, 그 하나하나에 의미를 발견하고 견딜 힘을 얻는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본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
치매와 뇌질환 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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