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가난한 중에 다른 사람의 가난을 생각하다
[황교진 에세이] 가난한 중에 다른 사람의 가난을 생각하다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2.15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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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간호하며 배운 결핍의 행복
어머니 손이 환자 손 같지 않고 매끈매끈하도록 날마다 씻기고 보습제를 발라드리면 마음이 행복해졌다
어머니 손이 환자 손 같지 않고 매끈매끈하도록 날마다 씻기고 보습제를 발라드리면 마음이 행복해졌다

집에서 장기간 병간호하며 몇 가지 의료기구들을 다루다 보면 기구의 수명이 다할 때 불안해진다. 특히 어머니 호흡에 중요한 석션기가 갑자기 작동되지 않으면 끔찍한 공포감이 밀려온다. 바로 환자가 저산소증으로 위험해질 수 있다. 욕창을 방지해 주는 에어매트리스도 1년 정도 쓰면 구멍이 생겨 공기 순환이 되지 않는다. 여분을 준비해 둘 만한 재정이 없었다. 불안불안한 마음의 대책으로 석션기는 이전에 자주 고장 나 거의 수명이 다한 것을 일단 수리해서 비상시 임시방편 용으로 보관해 뒀고, 에어매트리스는 바람이 빠지면 일단 구멍을 찾아 때운 후 새것을 알아봤다.

의료기구 문제가 2007년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제정 후 장기노인요양서비스가 진행될 때라면 어머니는 1등급 환자여서 복지용구 대여가 가능했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해결해야 할 부담이었다. 장기노인요양보험에 대해 쓸 말이 많다. 어머니는 그 제도가 실시됐을 때 투병한 지 10년 차인 60세였다. 전신마비의 장애 1급이고 뇌출혈이 노인성 질병으로 인정돼 1등급을 받고도 혜택이 없었다. 보건복지부에서 선진국형 복지제도라고 홍보했지만, 의료 서비스와 함께해야 할 어머니께는 무용지물이었다.

고가의 새 석션기를 예비로 사둘 만큼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저 고장 안 나고 오래 작동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만약 고장 날 때쯤이면 부드럽게 교체할 수 있기를, 내가 곁에 있을 때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중환자인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부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수시로 찾아왔다. 하지만 가난한 중에 절실히 기도할 때 응답받은 고마운 기억이 많다. 고마운 기억은 내게 장기 케어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평일 낮에 어머니 간호를 맡아 주시는 아주머니와 잠깐 교대하고 잠시 집을 비울 때 의료기구가 고장 날 경우를 대비해 항상 휴대폰을 주시하며 외출했다. 장을 보거나 잠시 약속이 있어 외출할 때 내 활동 반경은 거의 집 주변이었다. 외출 시에 한 번은 꼭 집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야 안심이 됐다.

한 번은 석션기의 스위치와 작동 소음이 약간 이상했다. 흡입력도 떨어져서 걱정이 됐지만 담대하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집에 온 후 바로 석션기가 작동되지 않았다. 고장 난 사실 자체는 좋지 않지만, 내가 올 때까지 버텨 준 석션기가 고마웠다. 이전에 쓰다가 흡입력이 약해져서 교체된 구형 석션기를 꺼내 응급 처치했다. 그나마 월요일까지 버틸 만큼은 석션이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만일 교회에 있을 때 사고가 났다면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달려와야 했고, 내가 조처하기 전까지 어머니는 호흡이 몹시 불편한 사태에 직면했을 것이다. 심하면 119를 불러야 했다.

나는 당장 닥치지 않은 문제도 종종 비극의 시나리오를 쓰고 처참한 결론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다 보니 돌발 상황에 접하고 다시 이겨내다 보니, 도달하지도 않은 비극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습관이 바뀌었다. 언젠가부터 상황 자체만을 놓고 생각했고 오히려 그 안에서 다행이고 감사한 점을 발견했다.

가정용 병원침대와 에어매트리스는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최대한 수리 방법을 찾았다. 끊어진 침대 이음쇠를 끈으로 묶고 청테이프로 감아 각목을 대어 보강해서 썼다. 구멍 난 에어매트리스는 접착제로 때우며 사용하고 있지만 계속 바람이 새어 나오면 겨울엔 하루 이틀 견딜 수 있어도 땀이 차오르는 여름에는 바로 새것으로 교체해야 했다. 새것을 알아보러 의료기구점을 둘러보니 항균처리가 된 쓸 만한 것을 사려면 꽤 큰 비용이 들었다.

한여름 무더위로 체온조절이 힘든 어머니를 위해 방에 작은 벽걸이 에어컨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돈을 모았는데도 좋은 에어매트리스 사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청춘기에 나는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모든 초점은 엄마의 안전한 하루하루에 맞추어 있다.

마침 가정간호사님이 논현동의 어느 부잣집 할머님이 퇴원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셔서 거의 새것인 병원침대와 에어매트리스, 석션기, 휠체어 등 의료기구들을 한꺼번에 가져갈 사람을 찾는다고 알려 주셨다. 내겐 굿뉴스였다. 마침 그때 어머니처럼 호플리스(Hopeless)로 퇴원한 다른 가정으로부터 침대와 휠체어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엔 모든 게 척척 들어맞는다 싶었다. 우리 집의 의료기구들을 처리할 고민도 없어지는구나,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고민이 되었다. 내가 여기저기 수리한, 엄마가 지금 누워 계신 낡은 침대를 남에게 흘려보낼 수 있을까? 논현동에서 가져올 좋은 새 침대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먼저 찜했으니, 새것을 가져와 어머니 위해 먼저 교체해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 싶다가도 이렇게 낡은 헌 침대를 받을 환자 가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거저 받게 된 물건에 이렇게 내 편리만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게 욕심인가? 나도 아껴가며 돈 주고 다 사서 써왔는데?’

결국 어떤 생각에 이르러 두 가지 마음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 환자 가정이 크리스천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난 여러 중보기도자를 통해 하나님께 공급받을 수 있지만, 그 환자 가정이 공동체 없이 견디고 있다면 나보다 훨씬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침대는 아직 버릴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고 그동안의 수리 노하우로 내가 계속 고쳐 쓸 수 있다. 시원하게 양보하기로 결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병원 침대를 포기했기 때문에 용달차를 부르지 않고 교회 후배의 도움으로 손쉽게 어머니께 사용할 의료기구들을 실어왔다.

가져온 에어매트리스를 깨끗하게 세탁해서 어머님 침대 밑에 깔아드렸다. 거의 새것이라 공기 순환도 잘되고 어머니 표정도 내 마음도 개운해졌다. 거기다 석션기가 연달아 고장 났을 때 대체할 수 있는 튼튼한 비상용 기계까지 생기니 마음이 부자가 되었다. 다른 가정에 양보한 새 침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또 하나의 굿뉴스는 여름에 더위 때문에 고열을 견뎌야 하는 어머니 위해 사고 싶은 에어컨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미국 필라델피아 어느 한인 교회의 사모님이 내 홈페이지의 글을 보고 후원금을 보내 주셨다. 엄마 방에 설치할 6평형 벽걸이 에어컨값에 꼭 맞는 돈이었다. 돈이 많고 적음이 부자와 가난의 기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백(Back)이 있느냐의 기준이다. 내게 백은 하나님이고 신앙의 힘은 인내와 소망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그 힘으로 내가 얻은 기회를 기꺼이 양보할 수 있었다.

밀레니엄 2000년을 며칠 앞두고 나는 그다지 비싸지도 않은, Y2K 정전 대비 가정용 발전기도 살 수 없어 크게 낙심했다. 당시 2000년을 맞아 뉴스에서는 정전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을 크게 높여 놓았다. 우리 집은 정전이 나면 큰일이다. 석션기, 에어매트를 작동시킬 전력이 있어야 한다. 전자상가에서 30만 원이면 살 수 있는 가정용 발전기를 살 돈이 없어 포기했다. 정전이 일어나면 119를 불러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가기로 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행히 2000년으로 넘어가는 새해에 정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저 받았어도 더 좋은 것을 남에게 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중에 다른 사람의 가난을 생각하는 것은 축복이다. 많이 받아서 나누는 것보다 적은 것 중에 내게 온 기회를 온전히 나누는 것, 그리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자족하는 것이 진정한 부자다. 원하는 것이 많은 부자보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는 빈자가 더 행복한 법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청춘부터 중년 가장의 기간까지 20년을 어머니 간호하면서 배우게 된 '결핍의 행복'은 내 마음에 계속 뿌리내리고 있다. 그리고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나를 가르쳤다. 불안이 엄습해 와도 사시나무 떨듯 불안해하지 않는 법, 항상 내일을 계획할 수 없어도 빨리 자족하는 법, 어머니와 함께 살아 있고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남들이 얻지 못한 드라마를 경험한 복 있는 사람이란 것. 그렇게 어머니는 의식이 없으신 중에 아들이 벼랑 끝에서 사는 법을 알려주셨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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