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최악의 시간에 최선의 희망을 얻기도 한 20년
[황교진 에세이] 최악의 시간에 최선의 희망을 얻기도 한 20년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2.01 22: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풍 중인 어머니의 병간호를 도운, 진짜 낭만 닥터 김사부들
장기 환자는 손톱이 점점 두꺼워지면서 세균에 쉽게 감염된다. 손톱까지 영양 상태를 살피며 세심히 케어해야 한다.

어머니는 1997년 11월 27일부터 2017년 10월 14일까지 만 20년 가까이 식물상태로 사셨다. 1997년 그날은 IMF가 터진 지 일주일 뒤였다. 일터인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평소처럼 가게 문을 열고 일을 시작하시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당시 두 곳의 대형 병원에서 수술할 수 없다며 앰뷸런스로 새벽 도로를 헤매다 급하게 작은 병원에서 뇌수술을 했지만, 수술을 마친 신경외과 선생님의 “기다려 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20년을 투병하다 하늘로 보내드려야 하는 미래가 올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생소한 어머니 가게 일을 했다. 나는 대학교 졸업식도 참석하지 않고 대학원 학업을 이어가며 병원에 달려가 간병인과 교대해 어머니 간호를 했다. 대학원 수업이 몰린 주말에 병원에서 간병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결국 휴학했고 복학하지 못했다.

구의동 혜민병원에서 경희의료원으로 마지막 상급병원인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기며 간절히 회복을 소원했지만 결국 1998년 6월, 가망 없는 퇴원을 통보받고 집으로 모시고 와야 했다.

그로부터 8년 동안 나는 재가케어하며 갓 태어난 아픈 딸을 조심스럽게 돌보는 엄마처럼, 식물상태의 어머니에게 모든 정신력과 체력을 쏟아부었다.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고 매일 똑같은 일정으로 살았다.

안방을 1인실로 꾸몄다. 병원 침대를 들여놓고 어머니를 돌보면서 곁에서 잠을 자지도 쉬지도 않고 간호했다. 호흡이 불편하지 않도록 수시로 기도 삽관한 곳에 석션하는 것과, 치료, 영양 관리, 위생 관리, 물리치료 등에 몸이 몇 개라도 모자라는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한숨도 편하게 자 본 적 없는 그 시간, 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특별한 인생으로 누군가 이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 지독한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것만큼 고귀하고 값진 것은 없다는 믿음으로 좌절과 불안을 이겨냈다.

교회의 의사 부부인 이병선, 윤선정 집사님은 매월 구매해야 할 약의 처방전을 도와주었고, 어머님이 심각한 감기로 고생할 때 병원 퇴근 후 우리 집에 와서 수액을 놓아주었다. 또 약사 친구 김대현은 수시로 어머니께 필요한 약을 공급했고 내 마음을 지지해 주었다.

8년이 지난 2004년에 들어서자 지속해서 위협받던 경제적 곤란을 더는 지고 갈 수 없게 되었다. 집을 내놓게 되면서 어머니를 집에서 간호할 수 없는 시점에 당도했다. 당시 장기 투병 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이 하나둘 생기던 때여서 적절한 곳을 찾아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어쩔 수 없는 그 선택에 내 마음은 새로운 삶의 틈을 얻는 여유와 편리보다는 불행감이 더해졌다. 나는 어머니께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가장 잘 알고 있는 문제 해결자로서 계속 내 경험을 적용할 수 없다는 고통과 죄송함이 컸다. 우리 집이 좀 넉넉했으면 재가케어를 이어갔을 것이다. 집에서 8년 동안 어머니는 작은 욕창도 생기지 않았고 늘 깨끗하고 건강한 피부의 영양 상태로 지내셨다. 서울대학병원 파견 가정간호사 팀이 가정에서 가장 관리가 잘 되는 환자 사례로 취재해 가기도 했다.

그해 한 대형 출판사에서 우리 모자의 이야기를 담은 내 홈페이지의 글을 주목하며 책 출간을 제안해 왔다. 2004년 초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하며 애타는 마음은 여름에 《어머니는 소풍 중》이라는 에세이 출간으로 반전을 얻었다. 출판사에서 사회 공익적 차원의 컨셉으로 출간한 내 책은 대중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우리 모자의 사랑 이야기가 여러 방송을 탔고, 나는 한 기업체 오너에게 눈에 띄어 홍보팀 작가로 취직이 되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기에 요양병원을 매년 옮겨야 하는 일이 벌어졌고, 어머니의 두 번째 요양병원에서 결핵 판정을 받았다. 아마도 오랜 투병 생활에 집보다는 불편한 요양병원 6인실의 공동 간병에서 발병했다고 추측한다. 당시 나를 귀하게 여겨 주신 삼성서울병원 재활의학과 김현숙 교수님은 아끼는 후배가 순천향병원 감염내과에 근무하는데 결핵과 같은 감염 분야의 권위자라며 소개해 주셨다. 어머니를 순천향병원으로 옮겨 치료해 보라고 권해 주셨는데 나는 경기도 이천의 요양병원에서 한남동 병원으로 앰뷸런스 타고 옮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김현숙 선생님은 내 홈페이지에서 만나 친해진 의사 선생님이었는데 후에 암이 재발해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오랜 투병의 어머니를 루틴하게 돌보다 보니 병원을 옮기는 변화에 직면하는 일은 가장 두렵고 힘들었다. 돌아보면 그때 순천향병원에 가서 김태형 교수님 진료를 받았어야 했다. 나는 당시 입원해 있던 요양병원의 내과 선생님에게 맡겼고 전염성은 덜어냈지만, 어머니는 오랜 기간 설사와 고열 등 지속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4년 뒤 2009년 6월 어머니 결핵은 더 강한 내성으로 재발됐다. 당시는 부천에 있는 한 기독교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입원시켜드린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원장 선생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결핵 치료가 가능한 병원에 연락해 보셨는데 멀리 마산까지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주셨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시 집으로 모시고 가야 하는 것과 빨리 대학병원을 알아보고 입원시켜야 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당시 신종인플루엔자가 유행하고 있어서 결핵균이 검출된 어머니는 병실 구석에 작은 스크린으로 가려두었고 간병인도 가까이하지 않을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에겐 소중한 어머니인데 요양병원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옮겨야 할 분이니 마음이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마산의 결핵 치료 요양병원까지 모시고 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의식이 없는 중환자를 석션과 산소 공급을 해가며 마산까지 모시고 간단 말인가!

그때 교회의 동갑내기 의사이자 한국누가회 임원인 김경철 집사님이 순천향병원의 김태형 교수님에게 연락해 어머니 입원이 가능한지 알아봐 주셨다. 가만 생각하니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아! 4년 전에 처음 결핵이 발병했을 때 소개받은 그 교수님 아닌가. 전화로 통화를 나눈 김태형 교수님은 급히 어머니가 입원할 격리병동을 잡아 주었고, 나는 마산에 내려갈 뻔한 어머니를 바로 한남동 순천향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간호의 여정에 이런 만남과 문제 해결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병이 고쳐지는 기적만 기적이 아니다. 투병 중에 길이 열리고 좋은 의사 선생님, 환자와 보호자를 배려하는 병원을 만나는 것만큼 감사한 기적은 없다.

입원 전에 김태형 교수님의 진료실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김 교수님은 내 오랜 고통을 이해하며 말이 아닌 마음으로 내 속의 억눌림과 답답함을 위로해 주셨다. 쉽게 치료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병원에 맡기고 당분간 몸도 마음도 좀 쉬라며 격려해 주셨다. 나는 4년 전에 소개받은 의사 선생님과 같은 분을 마주하며 소중한 희망이 생겼다.

당시 5년간 일한 직장에서 나와 강의와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던 중이었는데 잠시 임시직으로 일한 곳이 한남동 부근의 출판사였다. 순천향병원에 내원하기가 쉬웠고 김 교수님과 매일 대화를 나누며 어머니 상태뿐만 아니라 인생에 관한 조언도 많이 받았다.

어머니 결핵 재발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지만, 김 교수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는 귀한 선물이 되었다. 정말 한 달이 안 되어 어머니 결핵은 치료되었다. 결핵 병동이 있던 층의 간호사님도 매우 친절하셨고, 1층에서 상담해 주신 직원도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고마운 기억이 남는다.

일반 병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분들과 헤어지는 게 섭섭할 정도였다. 잠시였지만 치료 기간에 안심한 그 시간은 오래간만에 맛보는 내 인생의 휴식이기도 했다. 보호자인 내가 어머니 결핵 치료 기간에 휴식할 수 있다는 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가도 안심할 만큼 호전되셨다. 기쁜 소식이긴 하나 나는 또 어떤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 할지 막막했다. 우후죽순 생긴 많은 요양병원은 시설이 좋아 보여도 치료와 간호 등 본질인 의료 서비스가 미달인 곳이 수두룩했다. 극소수의 의료 서비스가 좋은 곳은 높은 비용 문제를 감당해야 했다. 결혼 후 아기를 키우던 내게 계속되는 삶의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내 고민을 미리 아셨는지 김태형 교수님이 자신의 선배가 근무하는 부천의 한 병원을 소개해 주셨다. 미리 어머니 문제를 선배에게 전해놓으신 터라 그 병원에 어머니 입원시켜 드리기가 매우 편해 안심이 되었다. 아, 그때의 그 감동이란…. 나는 어머니 결핵 치료의 모든 과정에서 감동을 경험했다.

요양병원은 1년이 지나면 옮길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김 교수님이 소개해 주신 병원에서 돌아가신 해까지 8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했다. 병원비도 많이 감면해 주셨고, 여러모로 우리 모자에게 감사한 병원이다. 어머니 소천 후에 찾아가 간병인, 간호사님들께 감사 인사드리고, 병원장 부부에게 기부금을 드렸다. 어머니 이름으로 어려운 환자 가족에게 쓰겠다고 하셨다.

앞의 글에 썼지만, 2012년 가을에 어머니께 결핵으로 의심되는 증상이 또 나타났다. 내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김태형 교수님이다. 감사하게도 김 교수님은 캐나다에서의 연구년을 마치고 순천향병원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부산에서 학술대회 참가 중이었는데 스마트폰으로 어머니 현재 상태를 확인하고 격리병동 입원을 도와주셨다. 마음이 다시 착잡하던 그때 3년 전에 겪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나는 순천향병원 격리실에서 마스크를 쓰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진 심정이었다.

그런데 부산에서 바로 병실로 달려오셔서 허깅해 준 김 교수님 덕분에 마음이 환해졌다. 이런 일로 다시 만난 건 좋지 않지만, 다시 만나 기쁘다는 김 교수님 얼굴의 웃음에 내 마음이 한순간에 환해졌다. 다행히 결핵이 아닌, 의심성 균으로 진단됐고, 김 교수님의 정확한 소견서로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가 편안히 투병할 수 있었다.

그때 김 교수님과 형 아우 사이가 됐다. 퇴근 후 매일 어머니 병동에 면회하며 교수님 방에 들러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 시간, 나는 새로운 소망을 얻었다. 우리 모자가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일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지금 어머니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등.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나누기 어려운 대화를 김 교수님과 가질 수 있었다. 김 교수님은 우리나라 메르스 사태와 코로나 팬데믹 때 뉴스에 종종 출연해 의학 자문을 해주셨다.

나는 효자 소리 듣는 걸 원치 않는다. 그저 서로 사랑이 깊은 모자, 이웃에게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 공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랑, 가족에게 하듯 내 자신에게 하듯 아픈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 그러한 하트가 있으면 가장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병실에서도 새 소망이 발아하여 세상을 따듯하게 보듬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소풍 중이신 어머니와 많은 일을 겪었다. 가장 어려운 최악의 절망 중에 최선의 희망이 다가옴을 경험했다. 지금은 힘든 기억 위에 추억으로 자리한 시간을 어떻게 이어갈까 고심한다. 강렬했던 20년의 병간호 때문에 나는 이 땅의 아픈 사람들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본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
치매와 뇌질환 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