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위대한 가설, 믿음으로 살면 살아진다
[황교진 에세이] 위대한 가설, 믿음으로 살면 살아진다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2.07 2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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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 견딤의 비결
침상 목욕 후 손톱까지 깨끗이 정리해 드린 날
침상 목욕 후 손톱까지 깨끗이 정리한 날

집에 중환자가 있으면 가장 힘든 사람은 그 환자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수영을 못해도 구하려고 뛰어드는 부모처럼 자신의 삶과 행복은 생각하지 않고 중환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자기 인생을 던진다. 돈과 시간이 끝없이 소모되는 가정 재난에서 사랑이 깊은 사람은 더 외롭고 고단하다. 고통을 분담해 주어야 할 다른 가족들로부터 상처받고 독박간호의 고독과 아픔을 견디면서 환자를 돌본다. 자기 아픔은 느낄 새도 돌볼 새도 없다.

치매와 뇌질환 같은 낫지 않는 병과 싸울 때 장기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경제력이다. 내 주변의 친척 중에 어머니의 치료비를 도울 만한 분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가정 재난을 겪는 우리 가정과 거리를 두는 일이 다반사다. 과거에 우리 집에서 대학을 다닌 사촌 형님만이 시시때때로 걱정해 주고 간혹 찾아와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청춘의 시간을 모조리 집에서 어머니 생명을 보존하는 케어로 보낸 내게 돈 문제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문제였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수입이 없는 청년 백수로 어머니 간호를 시작했을 때부터 현실은 막막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돕고 있었다. 어머니의 회복만을 기도하고 차도가 전혀 없는 절망의 감정에서 그 돌봄의 손을 체감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어머니 의식 회복의 응답은 없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견딜 힘을 공급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후원으로 어머니에게 필요한 기저귀, 레빈튜브, T케뉼라 등을 제때 살 수 있었고, 병간호로 땀에 절어 목마를 때마다 정서적으로 고독할 때마다 그 갈증은 해갈됐다. IMF가 터진 뒤 거의 동시에 어머니와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치료용품의 상당수를 보호자가 의료기구점에서 구입해 오게 했다. 병원 내 의료용품이 동이 났는데 IMF로 구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의료기구점에 갈 때마다 지갑이 비지 않는 경험을 하면서도 당시에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는지 알지 못했다. 수시로 공격해 오는 돌발적인 스트레스로 죽고 싶다는 유혹을 종종 겪었다. 어머니 간호한 지 1년이 지난 뒤 그 1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스킨십이 풍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이 낫지 않지만 병을 견디도록 도와주신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내 만족감과 상관없이 내게 필요한 것들은 차근차근 주어졌다.

서울대병원은 어머니의 세 번째 병원이었다. 집으로 모시고 오기 전 마지막 병원이기도 했다. 좀 더 환자를 잘 본다는 의료진의 치료로 조금은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가의 수많은 검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퇴원 명령을 받았다. 차라리 오랫동안 익숙했던 경희의료원의 3517호 병실 식구들과 매일 함께 기도 모임을 가지던 때가 그리웠다. 초겨울부터 초여름까지 견뎌온 병실에서의 기간을 그리워하며 쫓겨나다시피 집에 가야 하는 현실을 겨우 받아들이고 퇴원 준비를 했다.

공대생인 내가 집에서 어머니를 어떻게 간호할까?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정신은 복잡했고 손발은 계속 어머니 몸에 필요한 것을 하느라 분주했다. 그때 교회에서 부목사님이 병실에 심방 오셨다. 바로 전 주일에 열었던 교회 바자회의 수익금을 전해 주셨는데 70여만 원이나 되었다. 그 돈은 집에서 어머니 간호하는 데 필요한 병원 침대, 석션기, 치료 물품들 구입에 딱 맞게 쓰였다. 환자복과 약품들까지 사고 나니 꼭 70여만 원이 들었다.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병동에서 퇴원하던 날, 혜화동의 여름 빛깔은 참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슬펐다. 병원에서 집으로 중환자인 어머니를 옮겨야 하는 절박함에도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에 서러움이 북받쳤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현실, 내가 혼자 다 해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앰뷸런스로 집에 도착하자 낮에만 어머니를 간병해 주던 간병인과 결별하고 혼자 간호를 시작했다. 낯선 가정용 석션기로 수시로 석션하고 씻기고 죽과 약을 드리고 체위 변경과 기저귀를 교체하면서, 석션할 때마다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표정에 나는 숨 쉴 틈도 없이 힘겨웠다. 따뜻하게 데운 경관식 죽을 주사기에 넣어 드리다가 창밖의 햇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져 그칠 줄 몰랐다.

강변역 부근에 살던 우리 집 바로 앞에 올라가던 신축 빌딩 테크노마트가 내가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 액자 속 그림처럼 보였다. 밤을 새우고 등골이 쑤신 몸으로 어머니 침상 목욕을 시키고 내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견디기 힘든 24시간 간호에 점차 적응해 갔다. 점점 이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24시간 주목하고 돌볼 테니 아무 걱정 말아라.’

6월부터 가장 섭섭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것이 보험금 문제였다. 사실 어머니가 살뜰하게 보험을 들어놨더라면 사망에 해당하는 장애 1급은 억대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 그동안 병원비, 간병비로 지출한 것에 비하면 소액이나 다름없는 3천만 원의 보상금이 계속 지급 거절되었다. 보험사 측에서 책정한 보상금은 200만 원이었다. 한 달 병원비도 안 되는 금액을 받고 정리할 수는 없었다. 도리어 보험사는 소송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이 문제를 두고 기도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던 교회에 기도 부탁을 하고 여리고성이 허물어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밤에 가게에 나가 일하는 동생이 퇴근해서 잠시 어머니 간호를 교대해 주면 집에서 가까운 장신대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신학교 정문 옆 주기철목사순교기도탑에 올라가 기도실 바닥에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한 지 4개월이 지나 어머니 약을 타러 간 서울대병원에서 우연히 보험회사 직원을 만났다.

재 조사를 하러 온 보험사 직원은 보상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굳건히 전달했다. 내가 대학원을 휴학하고 집에서 간호하는 현실을 차분히 대화한 뒤 담당 의사 선생님 소견으로 결정하자고 했다. 보험사 직원은 의사 소견이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어야 한다고 했다. 방금 어머니 약 처방을 받은 신경외과 선생님의 진료실을 다시 찾아갔다. 선생님은 어머니 CT 사진을 들고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외상에 의한 뇌출혈이군요” 하시며 옆에 있던 인턴 선생님에게 진단서를 써주란 말을 남기고 다음 스케줄로 바삐 가셨다.

사실 어머니는 고단한 가게 일과 스트레스 누적으로 인한 뇌출혈에 가까웠고, 재해 보상금을 타기에 애매한 요소가 있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그런 갈등에 처한 환자를 자주 봐오셨는지 내 편을 들어주신 것 같다. 보험사 직원은 반론을 펼칠 시간도 없었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오히려 내게 악수를 청하며 이 보상금은 꼭 드려야 하는 거였는데 그동안 죄송했다는 인사도 전해 주었다.

어머니 간호하며 겪은 수많은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을 깊이 실감했다. 보험금 문제가 해결된 그날, 나는 어머니 입원 기간에 매일 들러 기도한 서울대병원 내 교회에서 한참을 울다 나왔다. 그렇게 받은 보험금으로 1년을 견뎠다. 내가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영양사 역할을 다하고 있었으니 의료용품값, 식재룟값만 있으면 견딜 수 있었다.

돈 문제는 부딪힐 때마다 두려우면서도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멋있게 서핑하듯 잘 타고 넘어간 일이 여럿 있다. 통장 잔고가 떨어지면 다시 채워지는 일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는지 모른다. 날씨도 선선해지고 통장도 홀쭉해진 어느 가을날, 교회 청년부의 두 간사님과 임원들이 우리 집에 방문했다. 꽤 많은 지목 헌금을 주고 가셨다. 내 통장은 바닥난 상태로 1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그 덕에 선교 후원금을 약속했지만, 몇 달을 후원하지 못한 후배이자 파키스탄 선교사에게 후원금을 이체할 수 있었다. 가난할 때 받는 보상은 또 다른 나눔을 가능케 한다. 돈은 통장이 부유한 사람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나눌 수 있다. 두세 달간 어머니께 필요한 용품들을 넉넉하게 장 보면서 그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새해가 되면서 대학원 휴학 기간 만료로 재적의 위기를 맞았다. 다시 복학할 수 없는 형편이라 재적은 별문제가 아니었지만, 입학하며 납부한 등록금이 증발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당시 나는 입학해 놓은 건축구조 대학원 공부보다 신학 공부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었다. 낮에 잠깐 쉴 때 잠을 보충해야 하는데 매일 낮잠을 자기엔 청춘의 시간이 아까워 자전거 타고 장로회신학대학에 자주 갔다. 채플실과 기도실에서 기도하면서 신학 공부에 대한 열망이 더해졌고 매일 밤샘 간호를 이어가면서 신비롭게도 몸이 지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몸까지 상하며 고생하신 수고의 대가로 지불한 공대대학원 입학금은 400만 원에 달했다. 입학만 해두고 수업을 거의 받지 않고 휴학해서 입학금을 지워내기가 힘들었다. 나는 학교에 지불한 입학금의 절반만이라도 돌려줄 수 있기를 기도하고,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다. 방학 중에 대학원 교학과는 오후 2시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오전에 늘 하던 어머니 목욕과 치료를 마치고 오후 늦게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어머니 간호하며 오전 시간을 집 밖에서 쓴 적이 8년 동안 하루도 없었다.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도 새벽에 일어나 치료와 목욕을 다 해놓고 다녀왔고, 동원예비군 훈련은 받을 수 없다고 증빙하고 출퇴근 훈련으로 대신했다.

건축구조 대학원 사무실에 가서 자퇴서를 제출하고 오후 4시쯤 대학원 교학과를 찾아갔는데 업무가 끝났다는 공지가 붙은 문이 열려 있었다. 다행히 남자 직원 한 분이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등록금 환불에 대한 가능성을 여쭈었다. 그런데 내가 방문한 바로 전에 교육부에서 내려온 공문이 왔는데 그 공문에 등록금 문제를 학생 위주로 처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등록금 환불에 대한 전례가 없지만 내가 최초로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사실 나는 그분이 안 된다고 하면 수긍하고 귀가할 참이었다. 그분은 내가 받을 수 있는 금액은 입학금 외 부수적인 금액은 제하고 수업료만 해당된다고 했다. 그 수업료는 신기하게도 입학금의 꼭 절반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줄 알았으면 다 돌려달라고 기도하는 건데!’

웃음이 났고 눈물도 났다.

불가능하리라 여겨지는 상황이 가능한 현실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들어온 수업료로 다시 통장의 배가 불렀다. 1999년 봄, 6개월간 그 수업료를 쪼개어 쓰면서 잘 버틸 수 있었다.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게 만들던 실연도 겪었다. 난 첫사랑과 헤어짐을 통해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에 대해 묵상하면서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매일 밤 어머니 병원 침대 옆 좁은 공간에서 운동을 했다. 특별한 운동 기구 없이 방바닥과 장롱 아래 틈을 기구 삼아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를 꾸준히 했다. 이전에 없던 근육들이 꽤 단단하게 붙었고 정신적으로도 잡생각을 치우고 강해졌다. 그 사이에 문학청년의 감성은 깊어져 틈틈이 글을 쓰며 치유를 경험했다.

7월 들어 통장 잔고가 6천 원을 가리켰다. 수없이 건조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꿋꿋하게 지나온 터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신 환자였지만 시어머니인 할머님은 건강하셨다. 어머님은 둘째 며느리였지만 시부모를 모시며 살아오셨다. 내 생일은 친할머니 다음 날이라 매년 피해(?)를 입었다. 할머님 생신 축하하러 오신 분 중에 내 생일을 기억하는 분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할머니 생신을 축하하러 방문한 친척들이 어머니 간호하는 데 쓰라고 돈을 조금씩 보태주셨고, 특별히 내 생일도 기억해주셨다. 나이 서른에 친척들 돈을 받는 게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어쨌든 통장이 비어 있어 기도 중에 들어온 돈이라 넙죽 입금했다.

그해 교회 청년부에서도 내 생일 선물로 가장 필요한 것은 현금이라고 생각했다며 축하 카드와 현금을 보내 주었다.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받으라는 코멘트도 곁들여 있었다. 보내는 사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지목 헌금도 받아서 결국 며칠 만에 꽤 두둑한 잔고가 쌓였다. 내가 알 수 없는 순간에 일하시는 하나님은 매번 살아갈 힘을 주셨다.

집에서 병간호한 지 사계절이 흐르자, 초기의 두려움과 달리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맛보며 잔잔한 즐거움이 쌓였다. 나는 주부처럼 장을 보면서 각종 야채와 채솟값부터 식료품, 세재 등의 최젓값과 최적의 물품이 무엇인지 구별했고, 단위 개수당 단가 비교표를 머릿속에 입력해 두었다. 짧은 시간에 가장 경제적으로 마트를 휘저어 장을 볼 수 있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마그넷(후에 롯데마트가 됨)이 5분 거리에 있어 큰 도움이 됐다. 어머니 치료에 많이 쓰이는 식염수도 아파트 입구에 있는 약국이 종로의 약국들처럼 도매로 판매했다. 이런 작은 요소들이 내게는 큰 감동이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어머니를 호플리스 퇴원하기 바로 얼마 전에 모두 새로 생긴 곳들이다. 동네 밖을 떠날 시간이 없는 내게 유리하도록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 가게들을 보면서 나는 ‘너무 불안해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마침내 깨달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염려한 모든 불안과 고통의 삶에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가설은 믿음으로 살면 살아진다는 것을.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비극을 헤쳐나가려는 자에게는 길이 보인다. 빌딩 회전문이 움직이지 않아 막혀 있는 것처럼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면 돌아가는 것처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견딜 힘을 제공받을 수 있다. 정서적으로 큰 파탄을 맞아도 감당해 내려는 의지와 믿음을 붙잡으면 치유가 일어난다. 그 믿음 없이는 죽은 삶과 다름없는 현실은 내 힘이 아닌 외부에서 주어지는 도움으로 극복이 된다.

평생 돈에 대해 걱정 한 번 할 일 없는 자본가는 이런 삶의 환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젊은 날에 돈 문제로 겪는 환희를 조금이라도 맛본 경험은 내 인생의 큰 자산이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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