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
[황교진 에세이]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09.15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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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27일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날

 

통금이 있던 시절 어머니의 출근 시간은 새벽 4시였다. 통금 해제가 된 19821월부터 그 출근 시간은 점점 앞당겨졌다. 내가 중학생이던 1983년부터는 밤 10시에 동대문 광장시장에 출근하셨다. 한 사람 겨우 들어가 앉을 만한 작은 공간에서 야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숙녀복 도매상을 하셨다. 지금 밀리오레 같은 동대문 의류상들은 낮 밤교대하며 근무하지만, 어머니가 일하신 광장시장은 집안 살림부터 가게 일까지 슈퍼우먼처럼 감당하는 상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방의 의류상들이 그 시간에 광장시장에서 도매로 물건을 떼어갔다. 어머니는 그분들을 상대로 새벽 장사를 하셨다.

1980년 중반부터 브랜드파워가 있는 옷들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우리 집처럼 시장 브랜드의 도매상은 매출이 급감했다. 어머니는 생활고를 붙드느라 매일 밤을 새워 일하시며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되기도 전에 조기축구회 동호회에서 유럽 여행, 일본 여행을 다녀오셨다. 두 분은 너무나 달랐다. 즐기고 누리는 분과 참고 삭이는 분, 나는 엄마의 고통에 아버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아버지 생각은 달랐다.

내 청소년기는 우울했다. 매일 밤 10시면 고단한 몸을 일으켜 삶의 기쁨과 보람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지친 얼굴로 생계를 위해 일하러 가시는 어머니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버지가 차로 어머니를 가게로 데려다주시지 못하는 날은 택시를 타셨는데 나는 어머니를 택시 승차까지 동행해 드리고 집에 오면서 우울감이 깊어 갔다. 어머니 낮과 밤이 다른 어머니들처럼 평범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 심정이 간절했다. 여행도 좀 다니시고 쉬는 날은 마음껏 쉬게 해드리고 싶었다. 이 기도는 후일에 뜻밖의 모습으로 이뤄졌다. 오전에 가게 문을 닫으신 뒤에도 어머니는 바로 귀가하여 쉬지 못하셨다. 을지로의 백화점을 돌며 시장조사를 해서 다음 시즌 디자인을 눈여겨보셔야 했고, 집안 살림을 위해 장을 보고 집에 오시면 반찬과 국을 만들어두고 바로 잠드셨다. 매일 4시간도 채 못 주무셨는데 불면증도 있으셔서 하루하루가 인내뿐인 삶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출근을 위해 잠깐 주무시고 일하러 나가시는 어머니 모습을 봐왔다. 주말과 주일에 잠시 어머니를 대면할 수 있었다. 왠지 어머니 삶의 고통은 전부 내 탓인 것 같고 그 책임감에 일기를 쓰면서 마음 달래는 조용한 모범생으로 자랐다. 부엌에서 창밖의 노을을 소녀의 얼굴로 바라보시던 어머니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진 적이 많았다.

내가 잘 돼야 해. 엄마가 편안하게 사시게 해야 해.’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시달린 날도 종종 있었다. 다음 날이 시험이어서 밤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집에 닥쳐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고 갔다. 그런 날도 어머니는 속상함을 감추고 가게에 나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든든하게 보호해 주지 못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며 심리적으로는 내가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교실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어쩌다 중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그들은 하루 종일 아무 말 없이 조용하던, 존재감 없는 아이로 나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아주 힘든 날이면 안개꽃에 쌓인 프리지어꽃을 사서 집에 오셨다. 그 꽃병이 엄마의 감성을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고덕동의 18평 주공아파트에 세를 얻어 할아버지, 할머니, 여동생과 함께 여섯 식구가 살았다. 어머니는 소리 내지 않으시고 시부모님, 시동생들까지 거두셨다. 수험생인 나를 다른 엄마들처럼 챙겨주지 못해 늘 미안하다고 하셨다.

다행히 내가 대학에 진학한 뒤 어머니 가게 매상이 오르기 시작했다. 군 복무 마치고 복학했을 때는 강변역 동서울터미널 부근의 우성아파트를 구입했다. 26평의 우리 집을 얻은 기쁨에 청소년기부터 불안정했던 나는 이런 평안이 실재일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불안불안한 감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여전히 어머니 출근은 밤 10시였다. 대학 4학년을 맞으면서 나는 학교 부근에 작업실 겸 자취방을 구해 건축 졸업작품에 몰두했다. 설계 과목 학점 따기가 어려운 건축공학을 전공하며 4학년에 제출해야 할 졸업작품과 학사논문을 잘 마치려면 시간을 아껴야 했다. 기독교 동아리 IVF 활동에 몰두한 대학 생활에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던 나는 4학년 때 학업에 집중했고 좋은 결실을 맺었다. 졸업작품은 공학 전공자들의 경연대회인 형남과학상에서 대상을 받았고, 학점도 좋았다. 대학원 특차 입학의 커트라인을 넘었기에 졸업 후 대학원에서 더 공부하기로 했다. 경제활동을 좀 늦추더라도 어머니를 쉬게 해드리려면 전공 공부를 더 깊이 하는 쪽이 합리적 선택으로 보였다.

문제는 내가 집을 비운 1997년에 벌어졌다. 고단한 생활을 20년 넘게 해온 어머니 몸에 이상 징후가 있었는데 우리 가족은 아무도 큰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내가 공부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아들이 유학을 원하면 보내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쉬지 않고 가게 일을 하시면서 계를 드셨다고 한다. 아들이 고등학교 때 등록금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보충수업비 납부와 교재를 사야 하는데 말도 꺼내지 못하며 3수를 한 것에 어머니는 늘 미안해하셨다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유학을 보내줄 준비를 하셨다. 나는 유학을 꿈꾼 적이 없었지만, 교육 뒷바라지에 한이 있던 어머니는 무리를 하셨다. 이제라도 아들이 원하는 무엇이든 뒷바라지해주고 싶은 심정이셨다.

그해에는 유독 어머니 두통이 심하셨다. 몸에 문제가 생겨도 병원보다는 약국 약에 의지하던 어머니의 수많은 약봉지를 화장대 서랍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문제는 계 모임에서 터졌다. 내 유학자금을 위해 차곡차곡 납입한 계 모임에서 어머니가 수익을 얻을 차례에 계주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고생하여 버신 돈으로 기대한 계가 깨진 데 대한 극심한 충격과 스트레스로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시다 심한 두통과 구토를 하셨다(두통과 구토가 함께 오면 반드시 응급실로 가야 한다. 뇌출혈이 시작된, 이상 조짐이다). 나는 무지했다. 건강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기도하면 지나가는 단순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받은 그 고통의 내용도 뒤늦게 알았다. 두 번째 구토를 일으킨 날도 어머니는 제시간에 가게로 출근하셨다. 그때 가족 중에 아무도 어머니를 빨리 병원으로 모시지 않은 사실이 장남인 내게 깊은 죄책감으로 몰려왔다. 나는 대학원 진학과 교제한 지 두 달쯤 된 연애로 하루하루가 설레던 날을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처참한 날을 맞이해야 했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IMF가 터진 지 6일이 지난 1127일 새벽이었다. 광장시장 가게 문을 열고 잠시 뒤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으셨다고 한다. 주변의 상인이 발견하고 어머니를 깨웠을 때 어머니는 의식이 돌아오셨다. 몸이 심각한 것을 직감하시고 처음으로 가게 문을 닫으시고 을지로 백병원으로 가셨다. 20여 년을 광장시장에서 일하시면서 가게 문을 닫고 병원에 가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응급실에 걸어 들어가셔서 혈압 측정 중에 큰 쇼크를 일으키며 의식을 잃으셨다. 나는 그날 졸업시험 두어 개를 남겨두고 대학원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선배의 건축자재 강도 실험을 돕다가 11시쯤 귀가했을 때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빨리 백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셨다. 마음이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우리 네 식구 중에 어머니와 나만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신실한 집사인 어머니는 수면 시간을 쪼개어 구역예배에 참석하고 절실하게 기도하며 주일성수를 지키셨다. 나는 대학생 선교단체 활동을 전공 공부보다 열심히 해왔다. 기도하면 지켜주시리라 믿었다.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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