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어머니 소천하신 날
[황교진 에세이] 어머니 소천하신 날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3.24 2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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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편의 연재를 마치며
이 땅에서 이별하지만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으로 드린 첫 꽃다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합니다. 지난 20년의 삶, 깊고 긴 꿈을 꾼 것만 같습니다. 많이 괴로웠고 감당하기에 벅찬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갖지 못한 능력을 구하면서 그 긴 세월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매여 살아왔습니다.

어머님이 하늘의 부름을 받으시기 전 4개월은 제 한계를 넘어버렸습니다. 소화 능력을 상실한 어머님께 투입되는 독한 약들로 생명을 유지하고 계신 얼굴에는 몹시 힘들어하고 계신 마음이 상세히 읽혔습니다. 기본적인 식사와 투약만 하기로 결정한 뒤 4개월 내내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습니다. 똑같이 간호하면서 마음은 낯설기만 한 혹독한 좌절과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머니를 바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병원에서는 당장 내일이 마지막 날일 수 있다고 했는데 4개월을 견디셨습니다.

매일 밤 머리 옆에 핸드폰을 두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밤에 병원에서 연락이 오면 달려갈 준비를 했습니다. 20년의 간병 세월을 채우고 이 땅에서의 어머님과 이별할 시간이 오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시간을 대기한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가장으로서 생계도 걱정해야 했습니다. 계속 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생계를 위해 몇 가지 일도 맡았습니다. 언제가 끝인지 모를 고통의 시간을 받아들이며 서점에서 나를 위로할 책을 붙잡고 씨름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10월 11일 수요일에 어머니를 뵀을 때 열이 계속 나고 있다는 의료진 소견에 오늘이 마지막 간호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진짜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때 하나님 품에서 편히 쉬게 해달라는 기도를 좀 더 다정하고 긴 언어로 해드릴 걸 하는 후회가 남습니다.

10월 14일 새벽 3시 반에 머리 옆에 둔 핸드폰이 심하게 울었습니다. 전날 금요예배를 다녀와 밤늦게 귀가한 터라 잠깐 눈을 붙였다가 깨면서 어머니의 마지막 밤임을 직감했습니다. 예상대로 병원에서 어머니 맥박이 약해지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오라는 연락이었습니다.

그날이 그렇게 왔습니다.

새벽에 머리가 너무 맑아서 아무 생각도 어떤 감정도 없이 차분하다가 외곽순환고속도로에서 병원 방향의 송내로 꺾어지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조용한 새벽에 병원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 긴장된 마음에 심장이 떨렸습니다.

병실에 들어서자 수요일 마지막에 만난 어머니 모습에서, 20년이나 익숙하게 붙어 있던 의료기구들이 막 제거돼 있었습니다. 5분 전에 숨을 거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10분만 빨리 왔다면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건데...

나중에 알았습니다. 간병인 말로는 지난밤에 너무나 힘들어하셨다고요. 내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시려고, T케뉼라, 레빈튜브, 폴리라인 등 거추장스러운 의료기구가 더 이상 몸에 달리지 않은 깨끗한 모습부터 보여주시려고, 대학 시절에 늘 곁에서 웃어 주시고, 광장시장에서 고생하시면서도 유일하게 밥 차려 주신 주말 저녁의 그 따뜻한 밥상 앞 편안한 얼굴을 보여 주시려고, 힘든 모습이 막 끝났을 때 저를 만나주신 거라고...

다른 가족이 오기 전까지 2시간 동안 온기가 그대로 남은 어머니 몸과 함께했습니다.

“주님, 이 몸은 상할 대로 상하고 고통스럽게 쓰다 남은 흔적입니다. 수십만 번 기저귀를 갈고 위생 케어를 한 그 몸이지만 이제 어머니는 영원한 생명의 새 옷을 입고 하늘에 계십니다.”

혼자 울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심경을 어머님이 남긴 그 몸을 만지며 천천히 식어가는 체온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동안 피부의 핏줄 하나라도 상하면 속상해하고 기저귀에 오물이 보이면 바로 갈아드리고 맨손으로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겨드린 그 몸 그대로였습니다.

메르스 때 한 달이나 보호자 면회가 안 되어 괴로워했습니다. 골다공증이 와서 물리치료를 내 손으로 할 수 없을 때 점점 관절이 뻣뻣해질 때 속상하고 죄책감이 들던 피부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보이면 가슴이 타들어가던 그 몸. 1998년 6월에 병원에서 가망 없다고 하여 집으로 모시고 와서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고 혼자 간호법을 연구하고 집중하여 8년이나 잠 안 자고 외출 안 하고 보전해 드린 그 몸. 내 몸과 생각을 가두었지만 그 고독 속에서 어머님이 안정되실 때 얻은 무한한 자유와 행복과 자존감의 선물을 받은 남겨진 몸.

이제 그 몸이 더 이상 아프지 않다고 하니 여러 기억과 감정이 몰려왔습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20년을 함께한 어머니의 몸이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병원비 마련하느라 쩔쩔매며 괴로웠던 날들, 4계절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병원에서 할 수 없고 하지 못하던 간호를 해드리느라 힘이 다 빠져나가고 지쳐서 아내와 아이들 얼굴 볼 때 여력이 없던 날들이 이제 끝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흔적은 내가 지금 잡고 있는 손이지만 어머니의 본질은 하나님 품에 계십니다. 2시간 동안 어머니 몸과의 마지막 시간은 곁에 있는 다른 환자들 방해되지 않도록 차분하게 조용하게 흘려보냈습니다. 천천히 식어가는 어머니 체온을 곁에서 보낸 시간은 깊은 감사와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장례식장으로 옮길 차가 왔습니다. 곧 아버지도 도착하셨습니다. 어머니도 힘들게 했고 저도 몹시 힘들게 한 분, 아버지의 통곡이 병실을 채웠습니다. 장례사가 어머니 몸을 시트로 감싸고 앰뷸런스로 옮겼습니다. 앰뷸런스 안으로 어머니 몸이 들어갈 때 1997년 11월 27일 갑자기 의식을 잃은 어머니가 앰뷸런스에 들어갈 때의 기억과 닿아서 장례식장으로 출발한 앰뷸런스를 바라보며 병원 밖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이 출근해 사망진단서를 끊어 주실 때까지, 원무과에 마지막 병원비를 결제해 줄 직원이 출근하기 전 2시간여를 홀로 기도하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이 고통스러운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 어머니 모습에 제 마음의 고통도 조금씩 증발해 갔습니다.

어머니 마음이 읽혔습니다.

“교진아, 이제 엄마에게 매이지 않고 네가 살 수 있어 기쁘단다. 이제 엄마는 너무 홀가분하고 행복해. 너도 꼭 행복해야 해.”

부천 가은병원에서 노원 을지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는 길은 몹시 막혔습니다. 천천히 운전하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준비된 상복으로 갈아입고 빈소를 정비할 때 제일 먼저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교수님이 조문을 오셨습니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많은 분이 오셨는데 가장 일찍 오신 신은경 교수님의 첫 조문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객실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신 교수님은 10년 전 어머니를 보내드릴 때 심경을 말씀해 주시며, “어머니는 어느 때에 보내도 어떻게 보내도 한이 남더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 마음의 고통을 그대로 읽어 주신 말씀이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오랜 세월 책임지고 돌보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는 얘기보다는 한으로 남는 게 당연하다는 말씀이 저를 위로했습니다.

주말 새벽에 천국에 가신 어머니, 평일 근무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그 시간을 택했을까요. 많은 분이 일찍부터 빈소에 들러주셨습니다. 점점 제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어머니도 나도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었구나.

글로만 저를 마주한 분들도 찾아 주셨습니다. 처음 만났지만 그분들은 저를 아주 친밀하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얼마 전에 투병하던 어머니와 이별한 대학 후배도 조문을 왔습니다. 제가 대학원을 1달 다니고 휴학한 뒤 자퇴했는데 잠시 몸담은 대학원에서 얼굴이 가물가물한 선배도 다정한 얼굴로 만나러 왔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과 함께하는 조미선 누나, 강영희 집사님, 그리고 사랑하는 이진오 목사, 오준규 목사가 반가운 얼굴을, 선율의 이재원 대표, 예책의 장병주 대표, 아르카의 이한민 대표 등 출판계 지우들이 책 만드는 우정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이지선의 주바라기 홈페이지에서 친해진 박송아 교수도 이승범 교수와 함께 얼굴 봐서 참 반가웠습니다.

300여 분이나 되는 조문객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열거하지는 못합니다. 이 감사 글에서 빠진 분들은 너무 친하기 때문에 언급이 안 된 것일 수 있으니 이해 바랍니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계셨지만 그렇게 많은 분과 마음을 교환한 것이 영광스러웠습니다.

조금 정신을 차리니 일찍 도착한 화환이 보였습니다. 예수전도단 박석건 대표님이 ‘부활’이란 글자가 새겨진 작은 화한을 보내셔서 저를 크게 위로했습니다. 어머님의 부활과 천국의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장례식은 제게 가장 영적인 예배 시간이 되어갑니다. 부활과 천국을 묵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예배는 없습니다.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경험하는 것만큼 십자가와 예수의 복음을 직접 깨닫는 은혜는 없습니다.

병상의 어머니끼리 맺어준 인연인 인순이 선생님도 화환으로 위로의 마음을 보내주셨습니다. 제 결혼식 날 서프라이즈 선물로 축가를 불러주셨는데 아프고 영광스러운 날에도 마음으로 함께해 주시니 너무나 큰 힘이 됐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 함께하는교회 김요한 목사님이 설교를 앞두고 달려와 주셨습니다. 빈소에서 허깅을 하는데 눈물을 겨우 참았습니다.

한국 IVF 총무님인 김종호 대표 간사님이 어머니 병상에서의 시간은 현대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는 말씀을 해주시며, 자신이 외국에 있을 때 어머니 돌아가셔서 조문을 못하면 어떡하나 염려하며 계속 기도하셨다는 마음을 들려주셨습니다. 간사님 말씀에 저는 선물이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20년 기도하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던 하루하루는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천국으로 불러주신 지금 이 순간은 더욱 큰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가 편집한 책의 저자들이 오셨을 때 기뻤습니다.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의 최규창 형, 《본질이 이긴다》의 김관성 목사님(조영진 이사님), 《공간의 해석학》의 임시영 교수님. 모두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분들인데 일정 사이에 조문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제가 기획한 모든 책이 다 소중하지만 이 세 권은 저를 출판인으로 성장시킨 목록입니다.

주일 정오에 어머니 입관식을 했습니다. 저는 2시간 넘게 어머니의 남겨진 몸과 대화를 나누었고 지금 이곳에 있는 몸은 어머님의 흔적이고 본질이 아님을 알기에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동생, 다른 가족들은 크게 통곡했지만, 저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둘만의 시간을 넘치게 보낸 것이 이 시간을 축복으로 채웠습니다.

천국과 부활을 아는 것은 장례에 큰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참 슬프고 아팠습니다. 덤덤하게 입관식을 마치고 어머니 사진 앞에 오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별에 대한 눈물이 아니라 아프리카 기아처럼 말라간 몸이 사라지고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걱정해 주고 내가 뺨 뽀뽀를 하면 “이눔의 자슥” 하며 웃어 주시던 20년 전의 그 모습으로 바뀌는 정화가 일어나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상심과 회한의 눈물이 아니라 제 기억의 어머니 모습이 평화롭게 바뀐 순간의 눈물인데 상주의 눈물을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말았습니다. 조문객들과 함께한 입관 예배에서 유가족 대표로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낭떠러지 끝에서 지내온 제가 지난 20년의 어머니 간호 기간에, 교회는 제가 떨어질 때 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보호해 준 안전망이었습니다. 그 안전망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절벽에서 기어오를 수 있었고 다치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큰 섬김만 받던 제가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섬기는 자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돼 감사하단 고백을 전했습니다.

화장터가 있는 용인 평온의숲 주변 자연환경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어머니의 관이 들어가고 흙으로 돌아갈 재가 되어 나올 때까지 교인들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분골 상자를 든 제게 상실감은 한 줌도 없습니다. 작은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와 걸으면서 환한 햇살이 비출 때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엄마, 이 햇빛이 정말 좋네요.
엄마가 만나고 싶은 햇살 안에 이미 계시죠?
그동안 얼마나 이 햇살을 만나고 싶으셨어요? 참 좋죠?

청계공원묘지까지 이동하는 차에서도 어머니가 제게 주신 마음이 샘솟듯 떠올랐습니다. 늦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어머니를 모신 작은 묘 터를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여기까지 함께한 가족이 많지 않아 교인들이 자리를 채워주시지 않으면 단출할 뻔했는데 어머니 주변에 사람이 많이 와 있다는 것이 또 큰 위로였습니다. 화장터에서의 예배에 이어 마지막 예배를 유철규 목사님이 인도하셨습니다. 부활과 천국의 메시지 그리고 남은 가족이 살아가며 기대할 복음의 메시지가 제 마음을 밝게 이끌었습니다.

어색하고 서먹했던 가족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눴습니다. 삼촌과 이모들에게 그동안 수고 많았다는 말을 들으니 울컥 눈물이 나와 구석에 가서 조용히 울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와서 동사무소에 들러 시립묘지사용허가서를 받아 처리하느라 다시 어머니 묘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천사들뿐인 곳에 계시지만 잠시 그곳에 머무르며 하늘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묻힌 곳에서 올려다본 하늘

엄마가 좋아한 저녁노을이 장밋빛으로 수놓은 구름 하늘이 저를 보고 웃고 있는 듯합니다. 끝까지 잘 마치고 졸업이구나. 자유, 기쁨, 영광 그리고 이곳이 천국이구나. 집에 와서 아이들 데리고 아내와 외식을 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한식뷔페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내에게 당신 사고 싶은 옷 한 벌 사라고 했습니다.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아빠가 그동안 많이 미안했음을 아이들 머리 쓰다듬으며 표현했습니다.

어머니를 20년 간병하다가 천국에 보낸 제게 상실감이 한 줌도 남지 않은 것도 조용히 기도해 주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긴 감사의 글도 처음 써봅니다. 천국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날 날을 기대하니 세상살이가 그다지 괴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시간까지 함께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으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2017년 10월 14일 새벽에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저는 어머니와 같은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를 창업했습니다. 현재는 디멘시아뉴스에서 돌봄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작년 9월 1일에 첫 글을 올린 뒤 이번 글까지 30회의 에세이를 연재했습니다. 이 글을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연재한 글들 외에 몇 편의 글을 더 써서 책으로 독자분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2004년 여름에 출간된 첫 책 《어머니는 소풍 중》은 집에서 어머니를 간호한 8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책이 제 삶에 많은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제 20년 전체의 이야기와 그 이후의 삶을 정리해 《어머니와의 20년 소풍》(가제)으로 뵙겠습니다. 매주 한 편씩 올린 제 글을 관심과 사랑으로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본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
치매와 뇌질환 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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