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어머니와 속옷
[황교진 에세이] 어머니와 속옷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1.08 10: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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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같은 맑은 삶을 꿈꾸다
KBS TV동화 행복한세상 _어머니와 속옷 편
KBS TV동화 행복한세상 _어머니와 속옷 편

 

어머니 뇌수술 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신 지 103일이 흘렀을 때다. 예사롭지 않은 두통으로 가게 문을 닫고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에 걸어 들어가 혈압을 재던 중에 갑자기 사지 경련을 일으키며 의식을 잃으셨다. 심각한 상황에 맞는 응급조치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다시피 한 현장에 달려갔다. 긴급한 수술이 시행되어야 할 타이밍에 병원을 옮겨 다녔고 수술이 거절돼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작은 병원에서 긴급하게 서약서를 쓰고 머리를 여는 수술을 하긴 했으나 “기다려 봐야 안다”는 집도의 선생님 말에 100일 넘게 기다렸지만 조금의 차도도 없었다. 그 기다림의 세월이 꼬박 20년이 될 줄은 예상 못했다.

중환자실 문밖에서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날이 이어졌다.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슴 찢어지는 상황이 계속 발생했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간의 터널 안에서 견뎌야 했다.

길고 추웠던 그 겨울에 매일 세 번의 면회 시간을 위해 여섯 장의 수건을 삶아 빨아서 얼굴과 손발을 닦아드렸고, 사골을 끓여 어머니 코 튜브로 넣어드렸다. 혹시나 조금이라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낙심의 연속이었다. 억울하고 답답하기만 한 심정을 해결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구의동 혜민병원의 중환자실에서 회기동 경희의료원으로 옮기기로 하고 한방치료를 겸했지만 차도는 없었다.

왜 이런 고통이 내 인생에서 필요한 걸까? 난 성경의 고난 받는 욥처럼 의롭지도 않은데. 너무 혹독한 삶이 버겁기만 했다. 내가 믿어온 하나님은 어디 계신 걸까? 우리 인생을 세심히 돌보신다는 성경의 메시지와는 너무나 맞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 현실의 끝이 보이지 않아 신앙의 회의도 깊어만 갔다.

인생의 고난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평생 선하게 가족을 섬기고 온갖 힘든 일에도 묵묵히 참고 헌신하신 어머니를 기억할수록 마음은 울분으로 가득 찼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눈도 못 뜨신 채 등에 욕창이 생기지 않을까, 호흡이 갑자기 끊기지 않을까 염려해야 하는 심각한 모습에 내 하루하루는 불행한 현실에 이길 힘을 찾을 수 없었다.

음식도 호스로 넣어드려야 하고, 호흡도 목의 기관을 절개한 곳에 산소를 공급하는 관을 맞춰 놓고, 수시로 끓는 가래를 석션기로 뽑아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건강해서 어머니를 돌봐드릴 수 있다는 것, 면회할 때마다 내 손으로 어머니를 씻기고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연재 글에 썼듯이 어머니는 내가 지쳐 있고 힘든 상황일 때 기분 전환하라며 옷 선물을 자주 해 주셨다. 대학 4학년 봄 건축 졸업 작품과 기사 시험 준비로 분주할 때 백화점 한 번 같이 가자고 하셨지만, 시간을 내지 못했다. 집에도 거의 못 들어오고 학교 부근의 설계 작업실에서 졸업 과제를 준비하며 시간을 아껴 쓰고 있었다. 기사 시험에 떨어지고 낙심해서 집에 왔는데 나는 알지도 못하는 브랜드의 멋진 새 옷이 여러 벌 책상에 놓여 있었다. 기사 시험 떨어진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도 기운 내라고 위로해 주셨다.

늘 그렇게 내게 뭔가 힘든 일을 겪을 때면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가슴 설레는 선물을 안겨 주셨다. 매일 잠깐 주무시고 심야에 광장시장에 나가 장사하시는 어머니와 나는 말없이 통하는 사이였다.

“공부도 못하고 기사 자격증도 못 따는 아들이 뭐 좋다고 이런 좋은 선물을 사줘요?” 하면 어머니는 눈은 반달 모양이 되어 웃으시며 말했다.

“공부 잘한다고 아들이고 공부 못 한다고 아들 아니냐?”

갑자기 중환자가 된 어머니의 100일 넘는 투병 세월 동안 어머니 부재를 집안 곳곳에서 마주했다. 청소, 빨래, 설거지를 내가 모두 해결하면서, 일인다역을 해 오신 어머니 손길이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속옷이 낡았는데 그대로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내 손으로 사야겠다’ 생각하며 경희의료원에서 회기역으로 가는 도중 보디가드 매장에서 화려한 속옷들을 보았다.

첫날밤 입으면 너무 좋을 것 같은(그 와중에 이런 생각을 다?) 속옷 세트를 보니 어머니가 옆에 계셨더라면 분명 저 디자인을 사 주셨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갑자기 마음이 서글퍼지면서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아 겨우 눈물을 참고 구경만 하고 집에 왔다.

이젠 그런 비싼 속옷 사 입으려 하지 말고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 그런데 내 방의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찾는데 상단 수납대에서 속옷 세트 상자를 발견했다. 보디가드 속옷 상자였다. 놀랍게도 내가 아까 매장 진열대에서 본 것과 아주 흡사한 디자인이었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기 얼마 전에 그 속옷을 사서 내 옷장에 넣어두신 것이다. 당신 눈에도 그 디자인이 무척 좋아 보여 아들에게 입히고 싶으셨던 게다. 가슴속에 눈물이 고여 넘쳤다.

지금도 나는 봄이 오면 세련되고 비싸지 않은 옷을 한두 벌 산다. 설렘이 없다는 건 나이 듦과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는 것의 증거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 다시 시작하는 삶의 기분을 얻고,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아직 오지는 않은 어떤 기쁨을 기대하는 열망이 필요하다. 나는 경희의료원 병실에서 병간호하며 병원 밖 세상 풍경을 잊고 살던 그 봄에 어머니가 미리 챙겨 놓으신 속옷 세트의 감동과 슬픔을 잊지 못한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하늘에 계신 어머니와 오랜 세월의 병간호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어머니께 옷 선물을 받아 감정이 화사해지고 사랑을 느낀 그 청춘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지금 나는 계절이 바뀔 때 새로 시작하는 마음, 일상을 기대하는 열망이 있을까?

 

2005년 9월 19일, KBS <TV 동화 행복한 세상>에서 내 책 《어머니는 소풍 중》의 ‘보디가드 속옷에 흘린 눈물’ 편을 각색해 ‘어머니와 속옷’이란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방송했다. 우리 모자의 모습과 따뜻한 대화가 담긴 애니메이션에 이금희 아나운서의 다정다감한 내레이션으로 함께하니 가슴 찡한 아픔과 감동이 더해졌다.

우리 모자의 이야기가 방송 콘텐츠의 재료가 된 것이 신기했다. 이 애니메이션을 간만에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제 속옷조차 내 손으로 사 입어야 하는구나”는 독백은 좀 오버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그때 그 심정이 잘 들어가 있다.

내가 나눈 글의 대화가 동화의 모습으로 다시 각색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항상 동화처럼 맑은 모습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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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진 2023-11-17 11:32:37
https://www.youtube.com/watch?v=GSGbSpJ5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