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어머니가 된 아들의 삶
[황교진 에세이] 어머니가 된 아들의 삶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0.0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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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Why)’를 ‘어떻게(How to)’로 전환한 후

1998년 6월, 나는 지치고 낙망한 심경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밤을 새우며 어머니를 간호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잠시 집에 오가는 길에 마주하는 젊은 혜화동 거리의 초록빛은 낯설기만 했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변화를 나는 세 곳의 신경외과 병동, 좁은 보호자 침상에서 뜬눈으로 맞이했다. 11월부터 반년 이상 내가 겪은 극심한 고통과 이 젊음의 거리는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경희의료원 부인과 병동의 창가 침상에서 서울대학교병원의 불편한 응급실에서 며칠 견디다가 겨우 일반병실의 자리를 얻은 뒤 무수한 검사를 새로 받았다. 

좀 더 진보된 의료에 대한 한 가닥 기대는 그 비싼 검사들의 결과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국내 최고 병원의 신경외과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내게 조심스레 말씀하셨지만 나는 슬픈 결과를 예상한 듯 담담히 받아들였다.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미 경희의료원에서 모두 들은 얘기였고, 의료진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진단으로 희망이 꺾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대학원 휴학이 문제가 아니었다. 병실에서 끼니와 수면을 해결하며 어머니께 초점을 맞추고 지낸 길고 긴 시간에 대한 답답함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내 앞가림 문제는 문제 축에도 끼지 못했다. 다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았다. 

인턴들에게 긴장감을 주던 권위 있는 선생님은 사망 진단과 다름없는 어려운 얘기를 내가 덤덤하게 받아들이자 “보호자님은 어머니를 많이 닮으셨네요” 하며 친근한 말투로 미소를 지어주셨다. “서울대병원에 가정간호 서비스 제도가 있어요. 그 서비스를 신청하고 집에서 간호하는 방법이 있어요.” 

마지막 대책으로 집에서 가까운 아산병원에 어머니를 입원시켜 드릴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예약 후 만난 아산병원 신경외과 선생님은 냉정하게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딱딱한 거절을 받아들인 뒤, 결국 집에서 내가 해보기로 했다. 당시에는 장기 연명치료 환자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왜(why)’를 묻지 않고, ‘어떻게(how to)’로 금세 넘어간 것은 이 불행 가운데 축복이었다. 

내가 재벌이거나 아산병원 의사였다면 하는 생각은 무의미했다. 서울대학교병원이나 아산병원보다 더 좋은 병원의 VIP 병실이 우리 집 안방이 되도록 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나는 건축을 전공한 공대생이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섬세한 청년이었다. 사람을 좋아했고 고독을 이기는 대화와 글쓰기를 즐겼다. 

주변 정리를 깨끗하게 하고 위생에 철저한 편이었다. 남자치고는 매우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이다. 아무도 내게 식물 상태의 중환자를 집에서 간호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내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받는 영감밖에 없었다. 

병원 침대, 환자복, 석션기, Y거즈 드레싱을 위한 의료용품, 평면 기저귀, 팬티 기저귀, 중환자용 휠체어, 열기 소독 도구들을 차근히 준비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이 더 있을까? 이제 정신력과 체력 그리고 지혜의 싸움이다. 계산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야 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앰뷸런스에 어머니를 태우고 집을 향한 날은 햇살이 무척 환하고 더운 날이었다. 내 심경은 절망과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었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사무적으로 집에 어머니 도착하기까지 과정만 돕고 돌아가셨다. 

경희의료원에서 만나 4개월 넘게 함께한 분이지만 처음 만날 때와 다르게 팁과 휴일 수당을 드리지 못하면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고통당하는 약자인 보호자에게 간병인은 강자였고 환자에 대한 애정이 아닌 수입원으로만 보는 냉정함을 발견하고 아쉬웠지만 불평할 수 없었다. 

내 건의는 어머니에 대한 간병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기에 숨죽여야 했다. 요즘 간병인으로 일하는 분들은 중국에서 오신 분, 탈북인이 대부분이다. 

현재 간호간병통합서비스가 시행되고 있지만 환자를 세심하게 간호할 수 있는 간병인의 매칭 문제와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대책이 절실하다. 관련 문제로 많이 아파 본 나 같은 사람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1998년 6월, 어머니와 나, 둘만이 안방에 덩그러니 남았다. 작년 11월 26일 출근하신 어머니가 7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조금도 예상할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이 내게 펼쳐져 있었다. 

멀쩡히 출근하신 어머님의 귀가가 식물 상태의 중환자라니…. 여동생은 어머니가 일하신 동대문 광장시장에 밤 10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했고, 아버지는 이 현실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동생과 가게 일만 돌보는 데도 정신이 없었다. 나는 외로웠다. 

어머니의 생명과 고통의 문제를 지고 가기에는 힘이 부족해서 괴로웠다. 숨 돌릴 틈도 없었다. 하루 시간표는 내 손발이 계속 움직여야 하는 일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1주일은 잠을 잘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오전 8시에 경관식 첫 죽과 약을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액체 상태의 죽을 하루 여섯 번 데워서 레빈 튜브로 넣어드려야 했고, 식사 30분 후마다 가루약 세 가지를 물에 타서 주사기로 넣어 드렸다. 

목의 가래와 이물질을 빨아내는 석션은 수시로 기계를 돌려서 뽑아내야 한다. 기저귀도 얼마나 자주 갈아야 하는지 모른다. 누워 계신 자세를 수시로 바꿔 드려야 했고 이 체위 변경과 석션 때문에 나는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첫날은 빵으로 시장기를 겨우 때웠다. 레빈 튜브로 어머니 죽을 넣어드리는 동안 처참한 현실과는 너무나 다른 창밖의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절망감에 눈물을 주룩주룩 터져 나왔다. 잠시 어머니 침상에 기대어 잠이 들면 모두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제는 집에 온 다음 날 아침에 터졌다. 나 혼자서 익숙하지 않은 침상 목욕법으로 처음 어머니를 씻겨 드렸는데 그만 감기에 걸리셨다. 아침에 잰 어머니 체온이 너무 높아서 물 온도를 낮게 하여 씻겨 드린 게 화근이었다. 

곁에서 보조해 줄 사람이 없으니 너무 장시간 피부가 미지근한 물에 노출되었다. 말을 못하시는 어머니는 열이 나는 몸에 설상가상으로 추위까지 겪은 셈이다. 괜히 목욕까지 도전했다는 자책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어머니 목에서 가래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데 계속 석션기를 돌려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때 동생이 가게에서 퇴근했다. 녹초가 되어 울고 있는 내 곁에 왔다. 바깥일을 하고 이 상황을 접한 동생은 침착했다. 

약상자에서 타이레놀을 꺼내더니 빻아서 물에 타 왔다. 나는 동생에게 받은 타이레놀을 어머니 콧줄에 넣어드렸다. 감사하게도 가래가 잦아들고 어머니도 천천히 잠이 드셨다. 한숨 돌렸지만 그날 아침의 공포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동생은 새벽 장사 출근을 위해 자기 방에 자러 들어가고 나는 다시 홀로 식사, 투약, 체위 변경, 석션, 기저귀 교체 등의 일들을 수행했다. 과연 내가 감당해 갈 수 있을까? 언제 끝날지 모를 이 현실은 거대한 납덩이가 온몸을 내리눌러 결박하는 고통으로 덮쳐 왔다. 

나는 꼼짝할 수도 없었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물에 빠진 아기를 보고 뛰어든 수영 못하는 아비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첫날의 끔찍한 경험은 훗날 20년의 간병 기간에 두고두고 약이 되었다. 나는 아침마다 조심스레 어머니 목욕을 시켜드리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물 온도를 민감하게 체크했고, 외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문을 꼭 닫고 시작했다. 

어머니 체온이 높다면 천천히 마사지하듯 상태를 살피며 답답한 침상에서 지내는 어머니 몸을 위생적으로 보호했고 관절 상태도 부드럽게 유지해드렸다. 어머니 관절은 매일 오전 침상 목욕과 내가 개발한 관절 운동법으로 부드러운 상태를 보존했다. 

문제 고통자에서 문제 해결자가 된 나는 새로운 능력, 절실히 필요한 현실 타개 능력을 갖추면서 매일 밤을 새우고 밥을 제대로 못 먹으며 쉬지 못하는 간병 일상이어도 기쁨이 있었다. 자존감도 좋아졌다. 어머니 간호에 있어 나는 전문적인 배움이 없어도 하루하루 새로운 지혜가 더해졌다. 어머니 표정만 보면 왼쪽으로 눕고 싶으신지 오른쪽으로 눕고 싶으신지, 배변에 문제가 있는지, 귀가 가려우신지 모두 느껴졌다. 

이 센서는 살면서 내가 얻은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이요 능력이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표정과 옹알이만 보면 무슨 표현인지 알아듣는 엄마처럼 나는 엄마가 된 아들로 삶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20년 가까이 침상 환자로 지내시면서 가장 위험하다는 욕창이 생기지 않았다.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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