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를 두려움이 아닌 돌봄의 언어로 말하는 기억친구 프로젝트의 요람
치매 정책을 지역 치매안심센터로 잇는 조용한 연결자

광역치매센터는 국가 치매정책을 지역 실정에 맞게 보급하고, 지역사회 치매관리사업의 내실 있는 추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서울시광역치매센터는 치매국가책임제 시행 10년 전인 2007년, 이미 ‘서울형 치매통합관리사업’을 설계·실행하며 국가 치매관리 정책의 기틀을 다져왔다.

이동영 센터장이 제시한 ‘시민 중심의 돌봄 체계’의 비전을 구체적인 실행으로 옮기는 현장 실무자가 윤세희 사무국장이다. “2008년에 처음 경로당을 찾아가 ‘치매 검사를 해드리겠다’고 하면 문전박대를 당했어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우리 동네는 몇 월에 꼭 와주세요’ 하고 먼저 요청하십니다.”

윤 사무국장은 20년 넘게 치매 현장에서 일한 간호사 출신의 실무 책임자다. 그는 “치매를 낙인이 아닌 삶의 한 과정으로 배우고 준비하는 시민이 늘었다”고 말하며, 서울 시민의 인식변화를 ‘현장에서 체감하는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윤세희 서울시광역치매센터 사무국장 / 황교진 기자

 

시민이 스스로 찾아오는 치매관리의 변화

서울은 전국에서 치매상담콜센터 이용률과 진단검사 참여율이 가장 높은 도시다. 윤 사무국장은 “시민들이 이제는 막연히 불안해하기보다, 나의 뇌 건강을 알고 대비하려는 태도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부 자치구 치매안심센터는 조기 검사 예약이 마감될 정도로 인식 변화가 빠르다.

“치매를 조기에 진단받으면 관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거죠. 서울의 각 치매안심센터는 예방–진단–치료–관리에 이르는 전 과정을 충실히 수행하는 전문조직입니다. 광역센터 입장에서는 든든한 파트너입니다.”

서울시광역치매센터는 이 같은 변화를 바탕으로 희망다이어리(가족지지 프로그램), e-희망교실(온라인 가족교육), 치매안심마을, 치매안심주치의 등 시 특화사업을 기획·운영하며 전국 확산 모델을 제시했다.

윤 사무국장은 인식개선 교육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저 자신도 언젠가 치매에 걸릴 수 있고, 기왕에 치매 진단을 받는다면 잘 생활하고 싶은 간호사입니다.” 치매를 두려움으로 회피하기보다, 함께 잘 살아갈 방법을 배우자는 메시지다.

서울특별시광역치매센터 전경 / 서울시광역치매센터
서울특별시광역치매센터 전경 / 서울시광역치매센터

 

시민 속으로 들어간 정책: 기억친구와 기억다방

윤 사무국장은 ‘기억친구’ 프로젝트를 이렇게 설명한다. “친구는 계약 관계가 아니고 기한이 없습니다. 한 번 친구가 되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계속 가는 관계죠.”

‘천만시민 기억친구’는 서울시광역치매센터가 추진하는 시민참여형 치매 인식 개선 사업이다. 10년 넘게 이어온 이 사업은 1만 2천여 명의 기억친구리더가 시민강사로 양성되어 약 30만 명의 기억친구를 만들어냈다.

기억친구
치매를 이해하고 치매 환자와 가족에게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가고 지원하는 사람.

기억친구리더
치매에 대한 지식과 대응 방법을 시민에게 알리는 시민 강사. 치매 사업 소개, 치매의 의학적 이해, 치매 예방 등 치매지원센터 전문과정을 이수한 후 지역, 직장, 학교 등에서 배운 경험을 일상에서 나누며 기억친구를 양산한다.

특히 ‘가가호호 기억친구’는 서울형 모델로, 건강한 어르신이 인지장애 어르신을 찾아가 말벗·투약관리·인지활동·산책 동행 등을 수행한다. 돌봄을 받던 어르신이 다시 돌봄을 주는 순환 구조가 서울형 돌봄의 특징이다.

일부 참여 어르신이 경도인지장애가 생겨도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 윤 사무국장은 “그럴 때일수록 ‘계속할 수 있게 돕자’는 게 우리 방식이에요. 돌봄의 관계가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라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기억다방’은 인지장애 당사자가 직접 바리스타로 참여해 시민과 교류하는 프로그램이다. 올해 약 2만 명이 이용했으며, “치매가 있어도 사회적 역할을 유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서울시광역치매센터 직원들 / 황교진 기자
서울시광역치매센터 직원들 / 황교진 기자

 

현장을 움직이는 연결자: 서울형 돌봄의 허브

서울시광역치매센터는 중앙지침을 단순히 전달하는 행정조직이 아니다. 윤 사무국장은 “우리가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고객은 바로 현장의 종사자들”이라며, “중앙의 정책이 서류에서 끝나지 않도록, 언제든 현장 기술지원을 이어갑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에는 25개 치매안심센터와 12개 분소가 있다. 광역센터는 이들의 운영을 연결·조정·지원하며 인력과 예산의 격차를 최소화한다. 각 구에는 지역사회협의체와 치매사업관리위원회를 구성해, 가족 대표와 민관기관, 전문가들이 함께 정책을 결정한다.

윤 사무국장은 “서울은 워낙 규모가 크고 지역별 환경이 다릅니다. 그래서 센터 간 공조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하죠”라고 강조했다. 광역센터는 직급별 간담회, 가치공유회,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열고, 현장의 애로사항과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이러한 협력망은 치매 돌봄을 건물 안 서비스에서 ‘생활 속 돌봄’으로 확장한다. 도서관, 복지관, 약국, 미용실, 마트, 학교, 직장 등 일상 공간을 치매 친화 환경으로 바꾸는 것이 목표다.

성공도 실패도 다함께 격려하는 서울시 치매관리 사업별 '가치 공유회' / 서울시광역치매센터

 

근거 기반의 정책, 사람 중심의 실행

서울시 치매관리의 강점은 ‘감이 아닌 근거’다. 윤 사무국장은 “서울시광역치매센터는 근거 기반 연구를 중심으로 치매관리사업을 운영합니다. 연구 인력을 별도로 두고 통계를 분석해 정책을 설계해요”라고 전했다.

복지부의 ‘치매안심통합관리시스템(ANSYS)’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서울은 자체 데이터베이스로 환자 등록·서비스 이용·경과를 관리해 왔다. 이후 이 시스템은 국가 표준 모델로 발전했다. 현재는 ‘서울형 치매 등록관리 매뉴얼’을 개발해 20개 구에서 시범 적용 중이며, 중년기 시민을 위한 디지털 치매 예방 앱 ‘브레인핏 45’를 보급 중이다.

올해 발표한 ‘서울 시민 치매 및 경도인지장애 인식도 조사’에서 인식변화를 확인했고, 12월에 ‘서울시 치매 환자 장기요양서비스 이용 분석’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데이터를 보면 구마다 돌봄 접근성이 다릅니다. 동일한 예산을 투입해도 참여율이 달라요. 수치를 근거로 정책을 조정하면 현장의 불균형을 줄일 수 있죠.” 윤 사무국장은 “행정이 아무리 정교해도 결국 사람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인력난은 가장 큰 어려움이에요. 간호사, 사회복지사 구인 공고를 여러 차례 내도 지원이 부족합니다. 예산도 해마다 빠듯하죠. 그래서 인력 처우개선과 안정적 예산 확보를 꾸준히 제안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치매관리사업 종사자 대상의 직무 스트레스 조사에서는 소진 수준이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났다. “단기 힐링 프로그램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현장 인력이 지치지 않도록 중장기 대책이 필요합니다.”

치매안심센터 팀장 워크숍 / 서울시광역치매센터
치매안심센터 팀장 워크숍 / 서울시광역치매센터

 

관계의 힘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돌봄

“치매 어르신들은 ‘고마워요’ 대신 ‘언제 또 와?’라고 하세요. 이름은 잊으셔도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싶은 좋은 감정을 표현해 주시죠. 그 표정에서 ‘내가 하는 일이 의미 있구나’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윤 사무국장은 광역센터로 옮긴 뒤에도 현장 종사자와의 관계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현장의 팀장님이나 간호사님이 ‘도움이 됐다’고 말씀해 주시면, 그게 제일 큰 보람이에요.”

그는 ‘제5차 치매관리종합계획(2026~2030)’을 언급하며, “광역치매센터가 단순한 전달체계가 아니라 인식 개선과 지역 연대를 주도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 17개 광역치매센터는 각 시도 특성에 맞는 사업을 최소 인력으로 운영하며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이 조용한 중간조직이야말로 치매관리의 근간입니다. 더 많은 이들이 그 가치를 알아주길 바랍니다.” 윤 사무국장은 인터뷰의 마지막에서 ‘관계의 가치’를 다시 꺼냈다. “치매가 있는 사람도, 치매관리사업을 하는 사람도 결국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AI나 시스템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사람 사이의 연결이에요. 나 혼자 옳다고, 우리 센터만 잘했다고 할 게 아니라 서로의 자원과 시간을 나누며 버텨야 합니다. 그 과정에 제 남은 간호사 인생을 쓰고 싶어요.”

숫자와 성과로 요약되기 쉬운 정책의 세계에서, 윤 사무국장은 ‘사람’을 본다. “정책은 어디에서 완성되는가?” 그의 답은 분명하다. “정책은 현장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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