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DC, 호그벡 철학을 도시 속에서 구현하다
치료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돌봄의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가 치매 환자를 위한 ‘치매 마을(Dementia Village)’ 조성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병원과 요양시설 중심의 돌봄 체계를 벗어나, 치매 환자가 일상생활에서 존엄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생활형 커뮤니티를 실현하겠다는 시도다.
이번 계획은 네덜란드의 ‘호그벡 마을(De Hogeweyk)’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미국 수도권에서 논의되는 첫 도심형 공공형 모델이다. 아직 설계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대도시 행정과 비영리기관이 함께 추진하는 치매 돌봄 사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호그벡에서 출발한 ‘삶 중심 돌봄’의 확산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은 2009년 암스테르담 인근 위스프(Weesp)에서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180여 명의 치매 환자가 27개 가정형 주택에서 생활한다. 각 가정에는 간호사, 요리사, 돌봄 인력이 함께 머물며, 주민들은 마트·레스토랑·미용실 등 일반 마을과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일상을 이어간다.
이 모델은 의료 중심의 돌봄을 생활 중심(person-centered care)으로 전환한 대표 사례다. ‘시설이 아닌 집, 환자가 아닌 주민, 치료가 아닌 삶’이라는 가치가 핵심이다. 이후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이 철학을 자국의 제도와 문화에 맞게 변형해 구현했다.
프랑스 남서부의 ‘랑드 알츠하이머 마을(Village Landais Alzheimer)’은 국가와 지방정부가 함께 조성한 공공형 치매 마을로, 약물치료보다 정서적 관계와 사회적 참여를 중심에 둔 돌봄 방식을 실현했다.
덴마크 스벤보르(Svendborg)의 ‘브뤼후셋(Bryghuset)’은 치매 환자와 일반 노인이 함께 거주하는 복합주거형(co-housing) 주거단지로, 돌봄과 자율성을 일상에서 병행한다.
영국 스코틀랜드 머더웰(Motherwell)은 도시 전체가 참여하는 ‘치매 친화 공동체(dementia-friendly community)’ 운동으로, 공공기관과 상점, 학교가 함께 치매 인식 개선과 지원체계를 구축했다.
일본 후지사와시의 ‘그룬트비(Grundtvig)’는 북유럽의 생활 돌봄 철학을 참고해 지역자립과 다기능 돌봄을 결합한 생활형 케어 커뮤니티로 발전했다.
이들 마을은 모두 “치매 이후에도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호그벡의 정신을 각 나라의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다.
“병원이 아닌 마을에서”…수도 한복판의 새로운 발상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는 11월 9일(현지 시각) 보도에서, 워싱턴 D.C. 내 복지기관과 재단이 ‘치매 마을형 주거 공간’ 조성을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핵심 주체는 지역 고령자 복지 비영리기관인 아이오나 시니어서비스(Iona Senior Services), 노인 돌봄 및 완화의료 지원 재단인 워싱턴홈(The Washington Home) 재단, 그리고 워싱턴 D.C. 시정부의 일부 부서다.
이들은 아나코스티아(Anacostia) 강변의 7·8구역(Ward 7 & 8)을 후보지로 검토 중이다. 이 지역은 고령화 속도가 빠르고 의료 접근성이 낮아 지역 간 건강격차(health inequality)가 두드러진 곳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워싱턴 D.C.의 65세 이상 인구 약 16%가 치매 관련 증상을 보이며, 특히 흑인·저소득층 지역에서 위험률이 높다”고 전했다.
아이오나 시니어서비스는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장 큰 장벽은 의료가 아니라 환경”이라며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사는 곳에서의 돌봄(care where life happens)’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워싱턴 D.C.가 검토 중인 모델은 미국의 의료·주거·복지 체계에 맞춰 ‘하이브리드 커뮤니티(hybrid community)’로 설계할 예정이다. 낮에는 인지활동, 사회참여, 운동치료 등이 운영되는 데이케어센터를 이용하고, 저녁에는 가족형 소규모 주거단지에서 생활하는 방식이다. 이는 기존 요양시설보다 생활의 리듬과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 접근이다.
치매 유병률 16%…도시의 불평등이 만든 간극
워싱턴 D.C.는 최근 10년 사이 65세 이상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 특히 빈곤과 만성질환의 비율이 높은 동부 지역에서는 치매가 공공보건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조지워싱턴대 메디컬센터에 따르면, Ward 8의 65세 이상 노인 중 약 20%가 인지저하 또는 치매 진단을 받았으며, 이는 미국 평균보다 높다.
아이오나 시니어서비스는 "치매는 병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며, 돌봄의 중심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와 일상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의료서비스보다 주거환경, 사회적 고립, 식생활, 스트레스 등 생활요인(social determinants of health)이 치매 위험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주거와 돌봄을 결합한 생활 돌봄형 마을(life-integrated care village)이 시정부의 새로운 공공정책 방향으로 부상하고 있다.
넘어서야 할 재정·제도·인식의 장벽
미국 시니어리빙 전문매체 시니어하우징뉴스(Senior Housing News)는 “호그벡식 치매 마을이 미국 내에서 드문 이유는 재정·제도·문화의 장벽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첫째, 지불체계(payment system)의 한계다. 네덜란드는 국가건강보험이 장기요양비용을 보장하지만, 미국은 민간보험, 메디케어(Medicare), 메디케이드(Medicaid)가 분절돼 공공지원 범위가 제한적이다.
둘째, 운영비용 부담(high operating costs) 문제다. 일상형 커뮤니티를 유지하려면 일반 요양시설보다 더 많은 인력과 공간이 필요하다.
셋째, 문화적 인식(cultural perception)의 벽이다. 여전히 치매 환자를 ‘의료적 관리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 워싱턴포스트는 “치매 마을의 핵심은 건물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변화(paradigm shift)”라며, “돌봄이 통제에서 동반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전했다.
시설이 아닌 커뮤니티가 돌본다
아이오나 시니어서비스와 워싱턴홈 재단이 구상하는 치매 마을은 ‘하이브리드 커뮤니티’ 철학의 핵심으로, ‘마을공동체(community collective)’ 자체를 돌봄의 주체로 세우는 실험이다. 교회, 상점, 카페, 학교 등이 참여해 치매 환자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개방형 네트워크를 구축할 예정이다.
이 접근은 워싱턴 D.C. 시정부가 추진 중인 ‘고령친화도시(Age-Friendly DC)’ 정책과도 맞닿아 있다. 교통·주거·보건·참여 영역에서 노인의 접근성을 높이는 WHO 국제 네트워크의 일환으로, 이번 구상은 그 전략의 도시형 시범모델로 평가된다.
한국의 시도: 용산·양주시, ‘호그벡식’ 모델 추진했으나 무산
한국에서도 호그벡 모델을 참고한 ‘치매 마을’ 조성 시도가 있었다. 2018년 서울 용산구는 양주시 백석읍 부지에 ‘호그벡식 치매 마을’을 조성하기로 하고, 총사업비 약 250억 원(1단계 약 170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역주민 반대와 도시계획 절차상 문제로 인허가가 지연됐다. 2021년 법원이 “사업 승인 절차가 위법하다”며 양주시의 손을 들어주면서 행정소송에서 패소했고, 사업은 최종 무산됐다.
이 사례는 치매 마을이 단순한 건축사업이 아니라 지역사회 수용성과 행정 협업 구조가 전제돼야 가능한 복합 모델임을 보여준다.
한국에 주는 메시지 “철학의 수입, 제도의 번역”
디멘시아뉴스의 기획 시리즈 〈한국에 없는 마을〉은 세계 각국의 치매 친화 커뮤니티를 탐구하며, 한국형 돌봄모델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워싱턴 D.C.의 구상은 제도적 제약 속에서도 생활과 존엄을 중심에 둔 공공 실험(public experiment)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의 치매안심센터 260여 곳은 검진, 상담, 가족지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사는 곳에서의 지원 체계’는 아직 초기 단계다.
이 논의는 돌봄의 초점을 의료에서 생활로, 시설에서 지역으로 옮겨가야 함을 보여준다. 즉, 돌봄의 중심이 치료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제도에서 사람 사이로 이동하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인 이러한 변화는 치매를 두려움이 아닌 공존의 언어로 새롭게 써 내려가는 장면이다.
- [한국에 없는 마을] ② 전 세계 치매 마을의 모델, 네덜란드의 호그벡
- [한국에 없는 마을] ① 치매 환자가 행복하게 사는 프랑스의 랑드 알츠하이머
- [한국에 없는 마을] ④ 덴마크의 치매 마을, 스벤보르 브뤼후셋
- [한국에 없는 마을] ⑦ 스코틀랜드의 치매 마을, 머더웰
- [한국에 없는 마을] ⑫ 일본 후지사와시 그룬트비(Grundtvig), 사람과 사람을 잇는 돌봄
- [한국에 없는 마을] ⑨ 호주의 치매 마을, 코롱지(Korong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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