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시마루 이동슈퍼·자조모임 카페·런치타임 행사까지
일본은 당사자 참여형 이벤트 확산, 한국은 기념식·공연 중심
치매 친화 사회 및 극복을 위한 과제는?
9월 21일은 전 세계가 치매를 돌아보는 날이다. 국제적으로는 ‘세계 알츠하이머의 날(World Alzheimer’s Day)’, 한국에서는 ‘치매 극복의 날’로 기념한다. 같은 날을 맞이했지만, 한국과 일본의 행사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일본은 치매 환자 본인이 직접 참여해 사회적 역할을 맡는 이벤트를 확산시키는 반면, 한국은 기념식과 공연 중심으로 제도적 성격이 강하다. 두 나라의 사례는 치매 친화 사회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던진다.
일본, 치매를 겪는 당사자가 스태프로 나서는 요리점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행사는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注文をまちがえる料理店)’이다. 치매 환자가 직접 주문을 받고 서빙하는 레스토랑형 이벤트로, 실수를 하더라도 손님과 함께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이 핵심이다. 2017년 도쿄에서 처음 열린 이후 일본 전역으로 퍼졌고, 이제는 치매 인식 개선의 대표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세계 알츠하이머의 날을 맞아 일본 전역에서 동시 개최를 추진하고 있다.
이와테현 기타카미시의 전통가옥 카페 ‘코비루(kobiru)’는 지역의 전통과 현대를 잇는 문화적 허브로 차와 함께 지역 농산물과 가공품을 활용한 계절 요리를 제공하는 명소다. 21일 이곳에서 치매 환자들이 직접 주문과 서빙을 맡아 손님과 교류하는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치매 환자들이 런치타임에 홀 스태프로 나서 손님을 맞이하고, 예약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민과 환자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했다. 하루 동안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으로 변신해 치매 환자가 손님들과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틀려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실감 나게 체험하도록 한다. 이 행사는 치매 인식 개선과 지역사회 교류를 동시에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각 지역 버전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틀린 주문도 삶의 한 장면일 뿐, 함께 웃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치매 친화 사회다.” _‘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관계자
이동 슈퍼와 치매 카페, 생활 속에서 치매를 품다
일본의 치매 친화 사례는 요리점 이벤트에만 그치지 않는다. 인구 고령화가 심각한 농촌에서는 이동형 슈퍼 ‘도쿠시마루(とくし丸)’가 중요한 생활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경트럭에 생필품을 싣고 마을을 돌며 판매하는데, 이용자의 80% 이상이 70세 이상 고령자다. 찾아오는 생필품 장 보기의 편리함을 넘어서 말벗이 되고, 필요할 때는 지자체나 경찰과 연계하는 ‘안전망’ 역할까지 맡는다. 물품 판매와 돌봄을 결합한 이 모델은 초고령사회 지역 돌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 곳곳에서는 치매 환자와 가족이 차를 마시며 경험을 나누는 자조모임인 ‘치매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스타벅스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열려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치매 환자와 가족이 차를 마시며 경험을 나누고, 시민은 자연스럽게 치매를 이해하는 계기를 갖는다. 노인들 위주로 찾는 카페가 아니라 홀에 젊은 층과 함께 융합하는 스타벅스에서 치매 자조모임을 여는 것이 특징이다.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을 사회 속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포용하는 문화를 전파하는 ‘치매 카페’는 당사자와 가족에게 정서적 지지망이 되고, 일반 시민도 자연스럽게 치매를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치매는 혼자 버티는 병이 아닙니다.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이 곧 힘이 됩니다.” _치매 자조모임 참가자
이처럼 일본은 치매 환자가 집과 시설에 고립되지 않고, 지역 주민과의 교류를 통해 관용적인 사회 실현을 지향한다. ‘세계 알츠하이머의 날’을 앞두고 치매에 관용적인 사회가 되도록 하는 이벤트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한국, 기념식과 공연 중심의 ‘치매 극복의 날’
한국 역시 일본처럼 시민과 당사자가 참여하는 이벤트를 통해 치매 친화적 사회로 나아갈 필요가 있지만, 양국의 행사를 비교하면 방향성 차이가 뚜렷하다.
한국은 9월 21일 ‘치매 극복의 날’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는 지난 16일 서울 과학기술컨벤션센터에서 제18회 기념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치매 극복에 기여한 유공자 161명이 표창을 받았고, 치매 환자·가족 합창단과 뮤지컬 공연이 무대에 올라 포용적 메시지를 전했다.
지방자치단체도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인천광역시는 SSG랜더스 구단과 협력해 야구장 이벤트와 건강 체험 부스를 운영했고, 강남구는 힐링 콘서트와 예방 특강을 열었다. 강동구는 치매 가족이 직접 참여하는 공연을 준비했고, 창원시는 온라인 인식 퀴즈 이벤트를 통해 시민 참여를 이끌었다. 원주, 대구, 부산 등에서도 기념식과 체험 부스, 홍보 캠페인이 이어졌다.
일본과 한국, 다른 길 같은 과제
일본은 치매 환자가 직접 사회적 역할을 맡는 체험형 이벤트가 중심이다. 실수를 포용하는 문화를 통해 당사자의 자존감과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틀려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사회 전반에 스며들도록 했다.
한국은 기념식과 공연, 포상 등 제도적 성격이 강하다. 참여 프로그램이 있기는 하지만 교육·관람 위주가 많아, 당사자가 직접 역할을 맡도록 한 사례는 드물다. 이 차이는 우리가 치매 친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드러낸다.
치매 환자를 돌봄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치매 친화 사회가 가능하다. 한국도 복지 제공 제도를 넘어 치매 환자와 시민이 함께 어울리고 실수를 포용하는 문화적 이벤트를 확산시켜야 한다. 런치타임 행사와 ‘주문을 틀리는 식당’ 같은 프로그램을 치매안심센터의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역사회 곳곳에서 정례화해, 치매 인식 전환의 실질적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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