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뛰어넘는 가족’, ‘지역이 하나의 큰 가족’인 마을
덴마크 철학에서 시작된 돌봄 공동체, 약 없이 치매 노인의 회복을 돕는 곳
진짜 사회 안전망은 시스템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 시작

1979년 일본 가나가와현 출생한 스가하라 켄스케(Sugahara Kensuke)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덴마크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교육자 니콜라이 프레데리크 세베린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의 철학에 매료됐다. 그룬트비는 덴마크의 목사이자 시인, 역사가, 정치사상가, 교육운동가로, 근대 덴마크의 정체성과 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덴마크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덴마크 사회 전반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룬트비 설립자 스가하라 켄스케(Sugahara Kensuke) / 그룬트비
그룬트비 설립자 스가하라 켄스케(Sugahara Kensuke) / 그룬트비

 

인간의 주체성과 평생학습, 공동체적 삶을 강조한 그룬트비 사상은 켄스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일본으로 돌아와 일반 기업에 취직했지만, ‘노멀라이제이션(Normalization)’ 이념에 공감해 물리치료사의 길로 전향했다. 노멀라이제이션은 장애인을 특별한 존재로 분류하거나 격리하지 않고,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보통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켄스케가 돌봄을 바라보는 관점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현장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그는 재활병원을 떠나 2년간 피해 지역을 돌며 재해구호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진짜 사회 안전망은 시스템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후 그는 고향 후지사와시로 돌아와, 2015년 ‘주식회사 그룬트비(Grundtvig Inc.)’를 창립했다. 덴마크에서 배운 철학을 일본형 공동체 돌봄 모델로 구현해 낸 것이다.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실험

2015년 8월 일본 최초로 아파트 단지 내 1실을 소규모 다기능 센터로 마련 / 그룬트비
2015년 8월 일본 최초로 아파트 단지 내 1실을 소규모 다기능 센터로 마련 / 그룬트비

 

그룬트비의 돌봄은 도시재생 공공임대주택(UR)을 기반으로 한다. UR 주택이라고 불리는 제도는, 일본 독립행정법인 도시재생기구(Urban Renaissance Agency)가 운영하는 공공 임대주택으로 정부 산하 기관이 운영하지만 일반 임대주택처럼 자유롭게 입주할 수 있다. 소득 제한이 없고 추첨 없이 선착순으로 입주하는 주거 제도다.

그룬트비는 239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 한 채를 리모델링해 ‘간호 소규모 다기능형 거주 개호’ 시설로 만들었다. '방문간호-방문요양-주간보호(통원)-단기보호(숙박) 서비스를 통합한 시스템으로 입주자가 낯익은 환경에서 자율적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단지에는 치매를 겪는 고령자뿐만 아니라 직원, 정신질환자, 장애인, 젊은 가족 등 다양한 세대가 섞여 살아간다. 돌봄을 받는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함께 ‘이웃’이 되어 살아가는 다세대 공동체다.

 

“돌봄을 받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 스가하라 켄스케

 

돌봄의 방식, 처방 약보다 관계, 규칙보다 자유

그룬트비에서 좋아하던 수영을 다시 시작한 치매 노인 / 그룬트비
그룬트비에서 좋아하던 수영을 다시 시작한 치매 노인 / 그룬트비
룸메이트와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입주 노인 / 그룬트비
룸메이트와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입주 노인 / 그룬트비

 

그룬트비는 치매를 ‘치료해야 할 병’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한 형태로 본다. 이곳에서는 약물 처방보다 사람과의 관계 회복, 자율성과 일상의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한다. 실제로 정신질환과 치매 증상으로 반복적으로 경찰의 보호를 받던 이들도 그룬트비 공동체 안에서 신체 억제대나 약물 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리를 배회하던 치매 노인이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중요한 것은 치료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삶”이라는 철학 아래, 그룬트비의 치매 돌봄은 약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실천을 이어간다.

또한 그룬트비 공동체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을 중심 철학으로 삼고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한 치매 노인은 좋아하는 수영을 다시 시작했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배우자와 재회했다. 어떤 입소자는 룸메이트와 방을 나누며 함께 늙어가는 삶을 경험한다. 지역 주민과 장례식을 함께 치르고, ‘마지막 삶의 장면’까지 공동체와 연결돼 있다.

 

모두가 참여해 애도하는 장례식 / 그룬트비
모두가 참여해 애도하는 장례식 / 그룬트비

 

특히 그룬트비는 ‘제도 바깥의 돌봄’을 추구한다. 철저하게 신뢰 기반으로 운영하며, 입소자들의 다양한 삶과 선택을 부정하지 않는다. 패스트푸드를 먹고, 밤늦게 이웃집을 방문하고, 맥주를 함께 마시는 것도 그룬트비에서는 가능한 일상이다. 이런 소소한 자유들이 삶의 의지를 되살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거절 없이’ 포용한다. 평범한 일상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안정감과 편안함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치료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입니다.” - 그룬트비 간호사 이시카와 카즈코

 

평소 취향을 존중하는 문화 / 그룬트비 
평소 취향을 존중하는 문화 / 그룬트비 

 

그룬트비의 평균 개호도(介護度)는 같은 지역 대비 더 높은데도, 그 안에서 자립적 삶의 회복이 관찰된다. 일반적으로 개호도가 높은 입소자는 자립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다. 여기서 ‘개호도’는 일본의 장기요양보험제도(介護保険制度)에서 사용하는 요양 필요 수준의 지표다. 얼마나 돌봄이 많이 필요한지를 수치화한 것으로, 숫자가 높을수록 신체적·인지적 기능 저하가 심하고, 더 많은 돌봄을 요구하는 상태를 뜻한다. 예를 들어 ‘개호도 1’은 경미한 도움이 필요함을, ‘개호도 5’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전면적인 돌봄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룬트비의 평균 개호도는 3.2로, 인근 유사 시설의 평균 개호도 2.5보다 더 돌봄 요구가 큰 입소자들이 많다. 그럼에도 그룬트비 입소자들은 일상생활을 스스로 영위하고 삶의 동기를 회복하며 활동적으로 지내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즉, 의료적 수치로는 ‘더 아픈’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들이 더 자유롭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역설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그룬트비의 돌봄 철학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회복력

단지에 거주하는 인지증 환자의 SOS에 신속하게 대응, 가족의 마음으로 모여 함께 생활함으로 신고도 빠르고 문제 대응도 즉각적이다. / 그룬트비
단지에 거주하는 인지증 환자의 SOS에 신속하게 대응, 가족의 마음으로 모여 함께 생활함으로 신고도 빠르고 문제 대응도 즉각적이다. / 그룬트비
개호(돌봄), 재해 예방, 쓰레기 청소, 순찰 모두 일상적으로 수행 / 그룬트비
개호(돌봄), 재해 예방, 쓰레기 청소, 순찰 모두 일상적으로 수행 / 그룬트비

 

그룬트비에는 정신질환이나 중증 치매로 반복해서 경찰 보호를 받던 이들도 있다. 칼을 들고 배회하던 노인, 신체 억제대에 묶여 있던 이들도 이 공동체 안에서는 사람과 사람 간의 연결을 통해 변화한다.

심야 0시에 “사람이 쓰러졌어요!”라는 주민의 연락이 바로 직원에게 전달되는 구조를 갖췄다. 서로의 존재를 돌봄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생활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이것이 제도 밖의 안전망, ‘이웃 돌봄’이다. 결국 “사람과 사람 간의 연결에서 회복된다”는 켄스케의 돌봄 철학이 입주민들의 변화를 끌어냈다.

 

아이부터 고령자까지, 다세대가 살아가는 복지 공동체

노인들만 모여 있지 않고 다양한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다세대 공동체 / 그룬트비
노인들만 모여 있지 않고 다양한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다세대 공동체 / 그룬트비

 

그룬트비 공동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인 중심을 넘어 세대 융합 모델로 확장됐다. 최근에는 어린이 스포츠 교실, 산후 회복, 운동 재활 등으로 돌봄 범위를 넓혔다. 실제로 젊은 세대 39가구가 새로 입주하며 공동체 구성이 다양해졌다. ‘복지’를 이유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식이 그룬트비가 제시하는 미래다.

 

지속 가능성, 그리고 확장성

모두가 참여해 축하하는 결혼식 / 그룬트비
모두가 참여해 축하하는 결혼식 / 그룬트비

 

그룬트비의 또 다른 강점은 비용 효율성과 지속 가능성이다. 기존 주택을 활용하고, 민간 법인 주도로 운영하며, 입소자 1명당 공공예산 부담이 낮다. 개소 이후 매월 흑자를 기록하며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2019년에 케어플랜센터, 2020년 또 다른 간호 소규모 다기능 센터 ‘칸타키(Cantaki)’ 등을 확장 설치하면서, 지역 전체의 복지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칸타키(Cantaki, 看護小規模多機能型居宅介護)는 고령자들이 자택이나 지역사회에서 가능한 한 오래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통합형 돌봄 서비스다. 병원과 집 사이의 ‘제3의 공간’으로 불릴 만큼, 의료와 돌봄, 생활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특징이다.

 

호그벡과 그룬트비, 돌봄 공동체의 철학

일본의 그룬트비는 북유럽에서 시작된 공동체 돌봄 철학이 아시아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네덜란드의 호그벡(Hogeweyk) 마을은 치매 노인들이 약물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치매 친화적 마을’의 시초로 잘 알려져 있다. 그곳에서는 주민이 삶의 주체로 살아가고, 돌봄은 자연스러운 공동체 활동으로 스며들어 있다.

그룬트비는 이 철학을 일본식 ‘소규모 다기능 거주형 개호’ 모델로 재해석했다. 공공 시스템과 민간 공동체의 경계를 허물며, 제도 중심의 서비스가 아닌 삶의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돌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호그벡과 철학적으로 맞닿아 있다.

특히 제도보다는 사람, 처방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그룬트비의 방식은, 한국이 2026년 3월 27일 시행 예정인 돌봄통합지원법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의 통합돌봄이 ‘사례관리 중심 행정 모델’을 넘어서려면, 법과 제도 안에서 신뢰, 관계, 자율성이라는 삶의 질적 요소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가 핵심 과제다.

그룬트비는 우리가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지역 커뮤니티 모델이다. 법과 규율을 넘어 사람 간 연결로 작동하는 돌봄의 효능을 실제로 구현해 냈다. 지금, 한국의 통합돌봄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주제다.

 

규칙과 제도를 넘어 사람 간의 연결, 서로 돕는 마음으로 안전망을 구축한 그룬트비 / 그룬트비
규칙과 제도를 넘어 사람 간의 연결, 서로 돕는 마음으로 안전망을 구축한 그룬트비 / 그룬트비

호그벡(네덜란드)과 그룬트비(일본)를 잇는 치매 공동체의 원칙

1. 사람 중심 - 치료보다 ‘삶’을 우선시 함, 삶의 주체는 ‘환자’가 아니라 ‘사람’.
2. 관계 기반 -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 신뢰와 연결이 돌봄의 출발점.
3. 통합된 일상 - 주거, 돌봄, 여가, 죽음이 모두 한 공간 안에 두고 분리하지 않음,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돌봄 추구.
4. 자율과 선택의 존중 -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을 보장.
5. 제도를 넘어선 안전망 - 법과 규칙은 최소화, 시스템보다 사람 간 연결이 안전을 구현, 진짜 안전망은 제도가 아닌 ‘사람’.

 

새로운 가족의 탄생, 한국 돌봄 정책이 향해야 할 곳

지역 내 노인과 청년이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 그룬트비
지역 내 노인과 청년이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 그룬트비
지역 내 노인과 젊은 세대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 / 그룬트비
지역 내 노인과 젊은 세대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 / 그룬트비

 

그룬트비는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의 확장’으로 돌봄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룬트비에서는 ‘가족을 뛰어넘는 가족’이라 부른다. 생물학적 연대가 아니라 삶을 함께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신뢰와 책임이 바로 그 새로운 가족이다. 초고령사회 일본이 지향하고 있는 이러한 돌봄 시스템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낯설지만 분명한 영감을 준다. 돌봄은 ‘서비스’ 이전에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의 통합돌봄은 행정적 분절, 관리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룬트비는 우리에게 묻는다. “삶의 터전 속에서, 가까이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가족 개념의 통합돌봄을 계획할 수 있을까?” 제도 밖의 돌봄, 삶 안의 돌봄이야말로 지금 한국의 통합돌봄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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