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18년째 어느 날, 가장으로서 아들로서
[황교진 에세이] 18년째 어느 날, 가장으로서 아들로서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2.0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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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할 수 없는 고통의 자리를 자각한 순간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간호할 때마다 그 마음을 묵상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간호할 때마다 그 사랑을 묵상했다

 

평범한 일상에 묻혀 있다가 한 번씩 정신 차리는 순간이 있다. 갑자기 병원에서 긴급 연락이 오는 날이다. 집에서 중환자인 어머니 병간호를 8년쯤 한 뒤 처음 요양병원으로 모신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나는 매년 어머니 병원을 옮겨야 했다. 그사이 취직하고 결혼했어도 매주 세 번은 병원에 달려가 나만 할 수 있는 케어를 반나절쯤 해드려야 어머니는 다소 안정적인 모습으로 투병하실 수 있었다.

너무 미숙한 간병인이 6인실 공동 간병을 맡으면 병실 환경이 금세 나빠졌다. 초보 간병인이나 고집 센 간병인이 맡아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안 보이면 답이 없었다. 나는 을이 아닌 병, 정, 무에 해당하는 보호자 위치였다. 자존심이 과한 남자 간호사와 갈등을 겪은 적도 있었다. 그 남자 간호사는 왜 그리 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일부러 어머니 Y거즈 드레싱을 안 하기도 했고, 어머니가 폐렴으로 악화되든 말든 방치해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겨우 참은 적도 있었다. 내가 평범한 보호자가 아닌 것이 그 남자 간호사에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결국 병원을 옮기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그 일을 제외하고는 간호사들과 아주 잘 지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간식을 준비해 간호 데스크와 간병인에게 드렸고 인사도 일부러 적극적으로 먼저 했다. 이후로 요양병원에서 과격한 간호사를 만난 적 없어서 그 남자 간호사에 대한 트라우마는 빨리 덜어낼 수 있었다. 그만큼 집에서 내가 간호할 때는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종종 접할 때의 충격은 컸고 감수해야 하는 인내 또한 많아야 했다.

한 병원에서는 비싼 항생제를 장기간 투여해 병원비 폭증으로 내 수입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 적이 있다. 보호자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투약을 마구 한 처방이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것은 어머니께 효과가 없는 강한 비급여 약을 계속 투여한 것이 문제였다. 월 370만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병원비가 3개월 동안 청구됐다. 월급을 다 쏟아부어도 틀어막지 못한 비용이다. 병원 측에서는 내가 어머니 간호를 너무 열심히 해서 약값을 생각하지 않고 썼다고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환자 고통과 보호자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병원은 없을까? 차라리 직장 다 접고 결혼 전처럼 집에서 간호해드릴 수 있다면.... 이것도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 난 두 아이의 아빠였으니까.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아들로서 책임감이 충돌할 때 둘 다 해결해야만 하는 고단한 보호자였다. 사막 한가운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헤매며 계속 걸어가야 했다.

감사하게도 2009년에 옮긴 병원에서는 원장님과 주치의 그리고 간호데스크 모두 우리 모자를 이해해 주었다. 병원 측과 상호 신뢰하며 안정적인 투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모자에게 큰 선물이고 위안이었다. 그후로 더는 병원을 옮기는 일은 없었다. 그때 내 수입이 일정치 않아 차상위계층 혜택도 받기 시작해 사방이 막힌 현실에서 햇살 같은 복지제도를 경험하기도 했다. 몇 년 뒤 아버지가 건물 경비 일을 시작하시면서 얼마 안 되는 배우자 수입이 잡히자 어머니의 차상위계층 혜택은 돌연 취소됐다. 병원비가 두 배로 뛰어 힘들었지만, 병원에서 감면해 주어 조금만 오른 금액으로 어머니를 계속 입원시켜드릴 수 있었다. 이렇게 돌발적인 사태가 오고 근심에 빠지면서 나는 보이지 않는 답을 고민한 적이 많았다.

집과 직장, 교회 그리고 병원을 오가는 반경을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가끔 멀리 가는 일이 있다면 강연 부탁을 받아 지방에 내려가는 일정이었고 강연 마치면 바로 귀가했다. 내게 병원과 멀어지는 여행은 없었다. 매주 일정한 시간에 병원에 달려가 간호해드렸고, 어머니께 쓰이는 소모품을 확인해 챙겨놓고 일상에 돌아오면 다시 일에 집중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일까? 매번 두근거렸다. 1층 중환자 병실에서 6층 일반 병실로 어머니를 옮겨야 하니, 보호자 동의를 유선으로 해달라고 했다. 일전에도 같은 전화를 두어 번 받은 바 있다. 세심하게 치료하고 돌봐야 할 중환자인 어머니는 환경이 바뀔 때마다 예민해지셨는데 일반 병동 간병인의 퀄러티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서 옮기고 나면 집중 치료를 받고 다시 중환자 병실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병실을 옮기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며 계속 1층에서 지내왔다.

이번에도 반대 의견을 전했지만 1층 간호 데스크에서는 기계호흡장치를 달고 있는 환자들만 남고 그 외의 환자들은 모두 일반 병동으로 가야 한다기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어머니도 나도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다른 환자들 생각을 해야 하기에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 상태가 좋아서 일반 병실로 가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답답했다. 늘 열이 오르고 머리 뒷부분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부질환도 있었다. 갈수록 상태가 조금씩 안 좋아지시는 데다 일반 병실에서 어머니 같은 콧줄 환자는 상대적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의식 없는 어머니가 의식이 또렷한 환자들이 있는 병실로 옮겨 가야 하는 게 불안했고 서글펐고 괴로웠다.

늘 나는 그렇게 기도가 필요한 자리에 서 있었다. 일반 병실은 치매 환자와 걸어 다니는 환자분들이 섞인 공동 병동이지만, 그 속에서 꼼짝도 못 하시는 어머니에게 불편함이 없기를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만나게 될 간병인이 중환자실 담당 간병인처럼 잘 돌봐주시기를 바랄 수밖에는....

내가 병원에 가는 날의 오전까지만 중환자실에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대답에 여간 마음이 힘든 게 아니었다. 직장에서 집중해서 해야 할 업무가 있었고, 두 아들의 아빠로서 집중해야 할 육아도 있었고, 18년째 병간호해 온 아들로서 집중해야 할 간호 일정과 병원비 문제 해결의 일도 있었다. 그 모든 위치에서 무거운 하루하루를 감당해야 했다.

편안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일상으로 익숙해져도 결코 익숙할 수 없는 고통의 자리임을 새삼 깨닫던 날, 나는 마라톤을 뛴 것도 아닌데 매일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났다. 내 마음은 누가 돌봐줄까. 가끔은 결론 없는 글을 쓰면서 자가 치유의 위안을 갈망한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본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
치매와 뇌질환 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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