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마디와 매듭
[황교진 에세이] 마디와 매듭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2.28 2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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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지지 않고 다시 시작할 힘의 근원
한 해가 저물 때 병 간호의 시간은 더 애틋했다
한 해가 저물 때 병 간호의 시간은 더 애틋했다

 

어려움은 내게 늘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처럼 따라다녔다. 신혼 시절에도 평일 하루와 주말에 계속 병간호를 해야 했다. 주 4일을 병원에 방문해서 간호해 오다가 직장에 다니며 주 3일로 줄였고, 결혼하며 주 2일로 줄였다. 더 줄이면 어머니께 욕창이 생길 확률이 100%였다. 나는 간호 일수를 줄이는 게 늘리는 것보다 훨씬 괴롭고 힘들었다.

직장과 가정의 볼륨이 커질수록 어머니 간호에 드는 체력 또한 많이 소모됐다. 화곡동의 C요양병원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생겨 경기도 이천의 Y병원으로 옮겼다가 이곳에서 결핵에 걸리셨다. Y병원에서 결핵 치료를 반복하다가 중환자 간호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간병인이 엉망으로 간병하는 것을 더는 감안하기 어려워 Y병원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경기도 이천에서 서울의 적절한 병원으로 모셔 오기로 했다. 첫째 영승이의 출산일을 앞두고 있어 먼 거리를 오가며 어머니 병간호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비축해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 가던 병간호의 횟수를 줄일 수 없으니 병원 오가는 거리를 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서울 천호동의 R병원으로 모시고 왔다. 매월 고정 지출이 높아지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힘들게 한 건 많은 처치가 필요한 중환자인 어머니께 다시 낯선 병원이 잘 맞을까 조마조마한 부분이다.

걱정이 땅속을 파고들 것 같은 마음을 참고 어머니를 입원시킨 R병원으로 달려갔다. 1년 반 정도 있던 이천의 Y병원보다 비용이 더 드는 R병원으로 오시자마자 어머니는 또 퀄리티 떨어지는 간병인의 손에 의해 극도로 악화됐다. 그 간병인은 어머니 간호에 필요한 내 설명을 들은 체 만 체했다. 어머니 가래가 심해지고 열이 펄펄 끓자 내가 매일 와서 간호할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치료와 돌봄을 받게 놔두었다가는 고통만 겪게 될 게 뻔히 예상돼 내 마음은 지옥이 되었다. 그 외에도 R병원은 무책임한 요소가 많았다. 좀 특이한 보호자인 내 눈에는 그 허술함이 너무 잘 보였다. 보호자는 항의할 말이 있어도 참아야 하는 무력한 약자이며 을을 넘어 병, 정쯤 되는 위치에서 탄식만 나온다.

나는 시스템이 빈약한 R병원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기로 했다. 다급하게 알아본 영등포의 M병원과 상담해 하루라도 빨리 이송하는 편을 택했다. 병원을 옮기는 일은 환자와 보호자 모두에게 큰 스트레스다. 총각 시절에 집에서 내가 밤낮으로 섬세하게 간호할 때가 훨씬 편했다. 집에서 간호하는 일이 어렵게 되고 취직하고 결혼하면서 어머니의 힘든 병원 생활이 시작되게 한 건 큰 아픔이었다. 가장 잘 간호할 수 있는 내가 어머니를 맡겨 놓고 생활하는 건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고 일하는 엄마 심정과 같다. 게다가 병원을 옮긴 지 일주일 만에 또 옮겨야 하니 마음이 얼마나 처참해졌는지 모른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이 터널에서 조금의 빛도 안 보이면 어쩌란 말인가.

그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에 가면서 K에게 전화를 받았다. K는 교회 청년부 시절에 만난 치과의사다. 그녀와 결혼한 이도 같은 교회에서 잘 알고 지낸 후배다. K는 결혼 후 남편 직장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 아기들을 키우고 있었다. K 부부는 우리 모자가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며 곧 태어날 아기가 큰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며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계좌번호를 타인에게 노출하지 않던 나는 K의 마음이 고마웠다.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돈 문제로 고민이 많던 터라 어머니 간호를 마치고 귀가한 뒤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고맙단 메시지와 통장번호를 알리자 바로 백만 원이 입금됐다.

그때 M병원으로 이원하려면 보증금 백만 원이 필요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 부분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K는 어떻게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딱 맞게 보내 줬을까? 구약성경의 만나가 또 내린 날이었다. 아내와 대화 나누며 참 감사했다.

그 당시에 나는 회사에서 기대했던 승진에서 누락돼 낙심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홍보팀에 합류한 김 과장님이 회의실로 부르셨다. 동생 결혼식을 잘 마치고 가족이 감사헌금을 하려고 대상을 정하다가 내 책을 읽은 과장님 어머님이 내게 헌금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받아달라며 주신 헌금이 백만 원이었다.

내가 결혼 준비할 때 병원비 지출하고 재정이 바닥난 상태였을 때도 교회에서 어떤 분으로부터 지목헌금을 받았는데 감사하게도 백만 원이었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너무 기뻐서 갓 태어난 아기 사진과 함께 글을 썼는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내 책의 독자가 결혼과 아기 탄생 모두 축하한다며 육아에 쓰라고 백만 원을 보내 주셨다.

병간호로 신혼다운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때 그렇게 매번 백만 원의 만나가 내게 왔다. 큰돈을 덥석 내게 주시는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면 고통이 상쇄된다.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고 있지만, 아픈 마음 그대로 달려갈 힘을 주시는 사람들이 기도 응답이었다. 병 고침의 응답이 이뤄지지 않는 기도를 20년 동안 하면서 나는 감수성이 사라지거나 냉소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건강한 감성을 가지게 되었고 순간순간 충만해지는 기쁨들로 고통의 연속을 견딜 의지가 더해졌다.

어머니의 중병은 낫지 않았지만, 그 중병을 견디고 돌볼 힘은 늘 받고 있었다. 내 기도는 결국 나를 강하게 하는 쪽으로 응답되고 있었다.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현재, 함께 더 사랑하는 시간을 갖게 된 기적의 하루하루가 고마웠다. 내 책의 독자들에게 내가 무너지지 않아야 자신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편지를 종종 받았다. 수많은 고통의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인생의 마지막에 섰을 때,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했어요!”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7년 10월 14일, 어머니는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끝까지 견뎌 낸 평안과 기쁨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더 이상 이 땅의 좁은 병상에서 고통받지 않고 천국의 평온한 안식의 시간을 맞은 어머니를 축하했다. 고통을 마친 어머니의 영혼을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그리우면 마음에 새겨진 20년의 시간을 떠올린다. 잘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일상을 점검한다.

대나무가 하늘로 뻗어 오르면서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건 마디 때문이다. 새롭게 시작할 용기는 이전의 일을 잘 매듭지을 때 나온다. 내게는 남은 삶의 고통을 수월하게 견뎌 낼 수 있는 마디와 매듭이 있다. 2023년의 마디가 2024년을 견딜 수 있도록 잘 매듭짓자.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본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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