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골든타임이 무너지는 과정을 겪다
[황교진 에세이] 골든타임이 무너지는 과정을 겪다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09.21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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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28일 새벽에 경험한 죽음 가까이 순간들

그러나 백병원 응급실에서 마주한 어머니의 모습은 경악과 충격 자체였다. 좁은 응급실 침대에서 온몸을 무섭게 떨고 계셨다.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어머니 옆에 남자 간호사 한 명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입에 수동식 인공호흡기인 앰부를 눌러가며 호흡을 돕고 있었고, 나는 당장 응급조치를 하지 않으면 이 순간이 이별일지 모른다는 다급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응급실 분위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어머니 외에도 응급 환자들이 몇 분 계셨는데 의사 선생님은 한 분도 보이지 않았다. 전화기를 계속 돌리던 간호사는 짜증이 가득 오른 목소리로 좀 기다려 보라고 소리쳤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한 지 30분이 지나도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골든타임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119에 전화했다. 응급실로 구급차를 보내달라는 요청에 의아해하던 119는 빨리 환자를 이송해야 한다는 절박한 내 외침에 와주었다. 앰부를 누르던 남자 간호사와 함께 어머니를 119구급차에 태운 뒤 빨리 가까운 큰 병원으로 가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119기사는 부근의 서울대병원이나 세브란스병원으로 가지 않고 좀 떨어진 왕십리의 한양대 병원으로 갔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의식 없이 심하게 떨고 계셨고 일일이 확인하고 목적지를 외칠 경황이 없던 터라 한양대 병원 응급실 도착 후 빨리 의료적 조치를 해주기만을 바랐다. 

하나님께 절박하게 기도하고 울음을 참았지만 꺽꺽거리며 절규하는 통곡이 튀어나왔다. 한양대 병원 응급의가 어머니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구원자를 드디어 만났다는 조금의 안심은 금세 무너졌다. 지금 어머니는 사망하실 것 같고 현재 병원에서 급하게 수술할 준비를 할 수 없어 건너편 구의동 혜민병원으로 가보라는 소견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을까. 

혜민병원이 있는 구의동까지 멀지는 않았지만, 발병 후 중대한 골든타임은 그렇게 무너져 갔다. 대학병원보다는 규모가 작은 혜민병원에서 급하게 신경외과 선생님을 호출했다. 무시무시한 내용의 수술동의서를 쓰고 어머니 머리카락을 깎아내는 장면을 목도했다. 별일 없을 거라 믿고 기도하며 택시 타고 달려온 지난밤부터 이 새벽까지 가까스로 참았던 울음이 폭발했다. 

분노와 답답함,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도의 배신감, 청소년기 때부터 기도해 온 어머니에 대한 소망이 땅에 떨어져 버린 착잡함, 내가 아는 하나님과 다른 모습의 현실을 마주할 때의 고립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수술실 문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런 복잡한 마음으로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었다. 화도 나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벼랑 끝에서 내 영혼은 이미 끝없는 미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손에 걸려 이 추락이 꿈이기를,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3시간쯤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머리를 붕대로 감고, 목에는 기관 절제 후 삽관한 T케뉼라가 끼워진 상태로 상상하지 못한 중환자가 된 모습의 어머니를 마주했다. 여전히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못한 생태로 훅 들어온 그 모습에 침착하려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려 하는 가운데 “엄마, 엄마”라는 외침만 터졌다. 수술 후 어머니 침대는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철문이 닫히고 면회 시간까지 기다려달라는 안내를 받았다. 수술을 집도하신 선생님은 “수술은 잘 됐으니 기다려 보라”는 짧은 말씀을 하고 가셨다. 그 기다림이 20년이나 이어졌다. 

식물 상태라는 어마어마한 중환자가 된 어머니와 함께한 20년의 기다림은 내 청춘과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고민보다 어머니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 심한 고통을 덜어드리는 힘과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바로 넘어왔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우리 어머니여야 할까? 난 왜 의대생이 아니고 공대생일까? 도대체 내 삶의 과정은 왜 이렇게 뒤죽박죽이 됐을까? ‘왜… 왜… 왜…’ 질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머니 뇌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첫 면회는 눈물바다였다. 이 갑작스럽고 끔찍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멀리 마산과 울산에서 외가 친척들이 급하게 오셨고, 중환자실의 20분 면회에서 다들 통곡하며 의식이 없는 어머니와 마주했다. 

어머니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목에는 기관 절개한 T케뉼라 통해 가래를 뽑아내야 호흡을 유지할 수 있었다. 폴리라인이라는 소변 줄도 착용했다. 주변에는 교통사고 환자가 입원해 정신이 없는 분위기였다.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심한 지옥이라면 그 응급실 풍경이었다. 중환자실 문밖 복도를 떠날 수 없었다. 

다음 면회 시간까지 그저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심정, 누군가 내게 다가와 손이라도 꼭 잡아주었으면 하는 깊은 외로움과 절망이 차올랐다. 밤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자정 가까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외가의 친척들이 모두 안 자고 계셨는데 어찌 된 일인지 분위기가 몹시 차가웠다. 아버지는 안 보였다. 늘 과묵한 큰외삼촌이 가족들을 달래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어머님이 곧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딘가 공격해야 할 대상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듯이 소리 지르며 싸운 흔적을 감지했다. 

이 순간 함께 위로하고 곧 나을 거라고 격려해야 할 혈육들이 희생양을 찾고 싸우다니! 가장 괴로운 건 우리 가족인데, 날 선 공격은 우리 가족을 향해 있었다. 이런 일에 가장 먼저 찾아오는 건 분열이다. 위로와 격려보다 자기감정이 우선인 것을 나는 아프게 여러 번 경험했다. 차라리 다른 아픔은 생각도 말자며 나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그분들은 그렇게 자기 할 말 해놓고 각자의 자리로 떠났다. 나는 어머니 곁을 지키면서 결국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혼자서 책임져야 할 아픔임을 처음부터 느꼈다.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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