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용태] 알츠하이머병,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부모님 이야기 6
[곽용태] 알츠하이머병,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부모님 이야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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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3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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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병에서 행동장애 증상군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4)불안의 시대, 혹은 우울증의 시대?

 곽용태
효자병원 신경과장/연세대 외래교수


1977년 보스톤 컨벤션센터
미국 정신과 학회가 열리는 곳이며 오늘은 마지막 날입니다. 정신과 레지던트인 탐은 부랴부랴 마지막 날 마지막 세션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학회의 하이라이트이며 탐이 큰 관심을 가졌던 정신분열병 환자와 그 부모 사이에 벌어지는 정신분석 세션이 이미 끝나고 탐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마지막 발표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갑자기 응급실을 방문한 노이로제(신경증) 환자를 입원시키고 오느라고 늦어져서 탐은 그가 원했던 세션을 들을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마지막 날 오후 중에서도 마지막 세션은  Robert Spitzer 에 의한 미국정신의학 분류체계인Diagnostic Statistical Manual II(DSM-II) 에 대한 개선 방안과 DSM-III 개발에 대한 초안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중요한 학회 발표는 다 끝나고 이루어지는 이 세션은 DSM II가 국제질병분류의 정신 진단과 용어가 일부 불일치하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수정 보완해야 할까 하는 아주 평범한 회의였습니다. 4일에 걸친 마라톤 학회가 끝나가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각자 일정에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일부는 보스톤 시내 관광으로 빠져 나가 학회는 썰렁하기조차 하였습니다.

새벽부터 응급실 환자에게 시달리던 탐은 자기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 왔고 학회 도중 졸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는 중에도 발표 석상에서 Spizter는 빠른 속도로 말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 앞으로의 정신과 진단은 일체의 가상적인 원인에 근거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증상군을 모아 진단명을 재구성할 것이며…..  " 

그때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 언급이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학회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부 정신분석을 전공하는 교수들만 세션이 끝나고 나서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탐은 이것이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대부분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은 Spitzer 가 한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차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 앞에 몰려 오는 쓰나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1776년 7월 4일 영국이라는 대제국과의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미국의 13개 주가 모여서 이룬 Continental Congress 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후 미국은 남북 전쟁이라는 내홍을 겪었지만 1900년으로 들어서면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고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명실 상부한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비해서는 미국의 학문적인 위치 특히 의학 분야는 매우 취약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유럽 대륙에서 정신분석학이 태동되었고, 유럽 사회의 여러 정치적, 군사적 문제로 마치 영국에서 1620년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왔듯이 프로이드를 비롯한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미국으로 오게 됩니다.

이들은 당시 끊임없는 전쟁, 공황 등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급속히 미국의 정신의학계 뿐 아니라 미국 사회를 장악하게 됩니다. 즉 정신분석 학자들에게 미국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으로 인한 불안, 즉 노이로제가 지배하는 사회로 여겨졌으며 그들이 활동하기 이상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말만 하며, 좋은 환자 나쁜 환자(즉 치료가 잘되는 환자 혹은 돈이 되는 환자)를 나누었던 이들은 일부 환자와 단체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실지로 환청이 들리고, 우울 증상으로 자살을 하고,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 살아왔으나 정신적으로 상처받은 군인들 등 실질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많이 받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른 의학 분야와는 달리 그 자체로의 완전성과 특수성을 주장하면서 실험적 검증을 회피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탑 속에 있으면서 그 탑 안에서 환자를 보고 환자가 좋아져도 탑 밖으로 나가면 다시 나빠지고 기약 없이 돈만 지불해야 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일부 정신 의학자들은 정신 의학 자체가 일반 의학 분야와 같이 검증 가능한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단 체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의 대표주자가 Robert Spitzer이었으며 마침 미국정신과 학회에서 DSM-II의 명칭 수정을 위해 그를 이 위원회의 리더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정신과를 장악한 정신분석학파에 대항하여 이를 진행하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이 개정하려고 하였던 DSM이라는 진단 체계는 일반 의사 뿐 아니라 정신과 의사에게도 당시에는 중요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이론을 만들고 병명을 붙이는 정신분석의 개인적 성향에서 이것은 단지 참조 매뉴얼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끝까지 Spizter를 경계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정신과 병명 체계에서 노이로제를 없애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노이로제는 그 병이 정신분석학자들에게 중요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면으로는 정신분석 의사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프로이드 박사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노이로제를 정신병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던 Spitzer 도 이들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DSM-III에서 병명으로는 삭제하였으나 이를 기술하는 것으로 타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물론 다음 개정판인 DSM III-R에서 이들을 완전히 제압한 후 노이로제라는 용어를 전부 삭제하였습니다).

1980년 드디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DSM III 가 발표되었고 이는 전 세계 정신의학에 혁신적인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정신의학에서는 1980년에서야 반세기 이상을 지배하던 프로이드로 대변되는 유럽의 비엔나 학파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수가 있었습니다.

DSM III 가 발표되고 37년이 지났습니다. 이후 DSM 진단 체계는 작년 DSM V 까지 진화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정신과가 의학의 한 분야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 역시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선 모든 의학이 병인 중심으로 진행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의학만 1980년대  체제를 고수하며, 병인을 진단명에 편입하려는 시도에 극도의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이는 마치 인간이 완전히 파충류을 제압한 이후에도 조그만 뱀을 봐도 기겁하는 원초적인 공포일 수가 있습니다).

작년에 DSM V를 개정할 때 1980년 체제에 대한 수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은 이 체제를 수정 보완한 형태로 발표 되었습니다. 또한 정신과가 정신분석학파와 결별할 때 버리고 간 신경증(neurosis)이라는 증상은 의사보다는 오히려 심리사, 상담사 등 다양한 직종에게 그 역할이 넘어갔습니다.

그 결과 현대사회 정신의학의 축은 '신경증의 사회(불안의 사회)'에서 '정신증의 사회(우울증의 사회)'로 변모하였습니다. 물론1900년대 초와 1980년대, 그리고 2017년의  사회가 다른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떤 안경(즉 어떤 진단체제)을 썼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치매 환자에게는 인지기능 장애 뿐 아니라 다양한 행동심리증상(Behavioral psychological symptoms of dementia; BPSD)이 나타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안인데 이것은 뇌에 존재하는 변연계라는 구조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치매 환자는 변연계의 손상이 초기부터 나타나는 경우가 흔합니다. 따라서 의사들은 치매 환자가 불안 증상을 보이면 이 변연계를 강화할 수 있는 치료를 고민합니다.

18세기 말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Kierkegaard 는 불안이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길 수 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속성이며 신을 향한 외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집에서는 전지전능한 아버지이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였고 존경받았던 존재가 점차 남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하며, 대소변조차 못 가리게 되어 자식의 화난 눈치를 보고, 배우자의 한숨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 파도를 피하려고 여기 저기 뛰어보지만 더 큰 파도가 밀려 오고 안전한 지대는 없습니다. 파도와 파도 사이 좁은 공간에서 공포스럽게 이 순간이 지나기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보는 가족들의 모습은 걱정, 불안, 심지어는 화를 내면서 보고 있는 중입니다.

예전 같으면 자기 손을 잡아주실 부모님은 이미 세상에 없고 고아로서 세상에 버려진 것입니다.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물컵 옆에 있는 약이 아니라, 파도가 올 때 같이 손잡아 줄 가족입니다. 어느덧 불안이 점차 사라지면 점차 세상은 더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치매가 너무 진행되면 불안은 사라지게 되고 마지막 길을 내 딛겠지요.

정신의학(정신과)은 신경증이라는 증상을 너무 쉽게 버려  수많은 정신병 속에 숨어 있는 이 증상을 무시하거나 놓쳐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자의 뇌 MRI 사진만 보려고 하고 환자가 뻗는 손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어느 누구도 인생에 있어서 그 인생을 시작할 때 잡아주는 손이 있었겠지요. 마찬가지로 마지막 석양길을 따뜻하게 해줄 손도 필요한 것이지요. 부디 그 손이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위의 일부 삽화 내용은 컬럼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픽션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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