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의료원, 치매공공후견인 교육과정 개발 연구용역
‘의사결정 주체는 본인’...일본 '후견사무 가이드라인' 참고
"정부, 후견청 설치해 취약 치매 환자의 권리보장 나서야"
정부가 극히 저조한 치매 공공후견사업 실적을 개선하기 위해 후견인 교육 과정에 일본식 ‘의사결정 지원’ 개념을 참고 모델로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사업 부진의 현실적 원인을 도외시한 채 후견인 교육 현장에 일본 사례를 해법으로 끌어온다면 형식적인 처방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최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저소득층에 한정됐던 치매 공공후견사업 지원 대상을 일반 국민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동시에 전문 후견인 확보를 위한 교육 인프라 구축과 후견 개시 기준, 업무 수행 방식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 제정도 예고했다.
국립중앙의료원도 이에 발맞춰 지난 2일 ‘의사결정 지원 중심의 치매공공후견인 교육과정 개발’ 연구용역을 공고하고 개선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 연구용역은 치매 환자가 질병 특성상 판단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더라도, 인간으로서 존엄과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후견인의 역할도 환자 본인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잔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취지다.
앞서 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는 올해 3월 '치매공공후견인을 위한 의사결정지원 가이드북'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가이드북은 일본에서 2020년 최고재판소(대법원)와 후생노동성, 일본변호사연합회가 공동으로 발표한 ‘의사결정 지원을 고려한 후견사무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제작됐다.
일본의 가이드라인에는 ‘모든 결정의 주체는 본인’이라는 원칙을 적용한 절차와 기준이 담겨 있다.
후견사무 프로세스는 일단 모든 사람에게 의사결정능력이 있다고 기본적으로 전제한 상황에서 지원이 충분히 이뤄졌는지 먼저 검토하고, 그래도 어렵다면 대리 결정(대행 결정)을 최종 고려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환자가 불합리해 보이는 결정을 내려도 의사결정능력이 없다고 즉시 판단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는 ▲의사결정 지원 환경조성 ▲의사결정능력 평가 ▲본인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 등을 기반으로 한 ‘의사 추정’ 절차 ▲의사결정이 환자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지 사전 평가 ▲불가피한 경우 ‘본인에게 있어 최선의 이익’에 근거한 대리 결정을 순차적으로 검토하도록 교육한다.
후견인이 환자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예로는 시설 입소나 거주지 결정, 자택 등 고액 자산 매각, 특정 친족 원조 등이다. 이때 지원은 후견인 혼자서 맡는 게 아니라 팀으로 진행한다.
이 가이드라인은 후견인의 역할을 재산 보호에 국한하지 않고, ‘의사결정의 주체로서의 본인’을 중심에 두는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정 주체가 본인이라는 관점을 명확히 하면서 후견인의 자의적인 판단 개입을 엄격히 경계하는 접근법이다.
일본은 이러한 가이드라인의 확산을 위해 전국 후견인을 대상으로 연수를 시행했다. 내용은 ▲의사결정 지원의 구체적 실천 사례 ▲상황별 역할극 ▲체크리스트 활용 등의 현장 실무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반면 국내 후견인 양성교육은 법 제도 이해와 이론 중심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국립중앙의료원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치매공공후견인 양성교육 수료자는 1,466명에 달하지만, 실제 활동 비율은 낮은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번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일본의 가이드라인처럼 후견인의 의사결정 지원 역량 향상을 위한 교육체계를 수립하는 게 목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제안요청서에 따르면, 향후 교육은 ▲의사결정 지원 개념의 이해 ▲실천 기술 훈련 ▲사례 분석 ▲팀 기반 접근 ▲추정 의사와 대리 결정 원칙 등의 내용으로 구성될 방침이다.
또한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사례 분석, 역할극 등을 통해 후견인들이 의사결정 지원 역량을 체득할 수 있는 실천 중심의 교육 프로그램이 도입될 예정이다.
하지만 국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일본식 모델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치매공공후견사업의 활성화를 꾀하는 정책이 실효성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관련 전문가는 디멘시아뉴스에 "치매 환자의 권리보장을 위해 의사결정 대리가 아닌 의사결정 지원이 필요하다는 문제 의식에는 공감한다"면서도 "현재 치매공공후견사업이 여러 이유로 활성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원인 해결 방안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의사결정 지원에 대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반 국민이 후견제도를 이용하지 않아도 권리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사전 의사결정지원제도의 확대와 사전 대리인 지정 제도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권리를 보장받기 어려운 취약 치매 환자에 대해서는 후견법인이나 후견청의 설립을 통해 원스톱으로 체계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치매안심센터와 후견법인(또는 후견청)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