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 지금 그대로도 충분하니까
은퇴한 내외가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일 중 하나는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다.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았다.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제목만 보고 희망적이고 즐거운 영화일 것으로 기대하고 골랐다. 그러나 첫 장면부터 생을 막 마감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살아온 시간보다 남아 있는 생의 시간이 더 짧은 사람들에게 삶의 끝자락 이야기는 더 두렵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공포영화를 보듯이 다른 삶의 마무리를 관찰한다. 생각만큼 죽음 이후의 모습도 그리 어둡거나 무섭지는 않다. 단지 조금 쓸쓸해 보일 뿐이다.
영화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기 직전, 중간역인 ‘림보’라는 곳에서 일주일 동안 머문다.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이렇게 선택된 그들의 추억은 짧은 영화로 만들어지고, 망자는 이 순간을 간직한 채 영원으로 떠난다.
‘림보’역에는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있어 새로 들어온 손님들을 인터뷰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인터뷰하는 사이 손님들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를 고르도록 요청을 받는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추억 단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기억을 삭제시켜야 영원으로 떠날 수 있다고 안내를 받는다.
너무나 단조롭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되어 한 장면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지나간 70여 년간의 삶을 회고해 볼 수 있는 비디오 자료가 제공된다. 그는 해마다 하나씩 기록된 영상을 돌려보며 의미 없이 반복된 일상만을 살아온 한심한 자신에게 수없이 “바보”, “멍청이”를 내뱉는다. 그러다 그도 결국 무미건조한 것 같던 인생 가운데 행복한 한 장면을 고른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의 추억이 의외로 사소하고 평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한 장면은 대단한 사건이거나 깜짝 놀랄만한 행운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아주 디테일하게 행복했던 그 순간과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들은 그날 입었던 옷과 색깔과 그때 먹었던 음식과 그 맛을 길게 길게 설명했다.
어느새 영화의 시선은 그들을 인터뷰하는 직원들에게 옮겨간다. 그들도 삶을 마무리한 망자들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기억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기억을 삭제시켜야 영원으로 떠날 수 있는데, 그 작업에 실패한 자이거나, 아직 이 세상에 할 일이나 미련이 남은 사람은 영원으로 떠나지 못하고 그 사무실에 남아 직원으로 일한다. 그들은 거기서 연정도 품고, 질투도 하고, 땅에서 살아 있던 곳으로 잠시 내려가 보기도 한다.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자신이 언젠가 누군가의 행복한 순간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나마 그 기억을 가지고 영원으로 떠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스토리텔링 흐름과 병렬로, 나의 머릿속에도 내 스토리가 흘렀다. 나는 내 인생의 어떤 장면을 선택하고 영원으로 갈 것인가? 고를 수 있는 장면이 있는가? 정말 엄마 배 속에 있던 순간처럼, 완벽한 평화와 행복의 순간이 내 삶에도 있었을까? 한 장면도 고를 수 없을 것 같으면 어쩌지? 혹시 여러 장면을 간직하고 싶은데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어떻게 하지?
영화가 끝나고도 생각은 이어졌다. 과연 내 인생엔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순간이 있을까? 좀 슬프고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회상 속의 나는 늘 ‘무엇이든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달리고 긴장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다 지친’ 나의 모습만 떠올랐다.
그러다가 전등의 스위치가 켜지듯 반짝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렇지.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판타지일 뿐이잖아? 나는 ‘림보’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책’을 믿는 사람이며, 나를 인터뷰할 사람은 림보의 직원들이 아니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전능자인 것이다. 그리고 기억되고 기록되는 순간은 단 하나가 아니고, 내 생애 전부라는 것을 소스라치게 깨달았다.
차근차근 되짚어 보니, 내게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참 많았다. 눈 내리는 어느 날 피아노 연습을 하는 초등학생 나. 눈 내린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거실 큰 창으로 바라보던 순간. 엄마가 키우시는 여러 쌍의 잉꼬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던 기억. 부엌일을 하는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하루에 있었던 일을 종알대던 그날. 엄마가 만든 도넛 반죽과 튀김 기름 냄새. 손뜨개로 만든 노란색 긴 털목도리를 칭칭 늘이고 얼음판 위를 바라보던 그 겨울의 햇살.
전 국민에게 날마다 새 소식을 전하는 프라임타임 뉴스 앵커. 아름다운 음악과 공감의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클래식 음악 진행자. 바다 건너 공부하러 갔던 나라 영국 웨일스의 카디프.
아빠를 꼭 닮은 딸, 꽃봉오리처럼 입술을 모으고 엄마 젖을 먹던 내 아기. 지금은 엄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게 무럭무럭 자란 아름다운 숙녀, 내 아기.
복도식 대단지 아파트 주차장에서 유세차를 세우고 마이크를 열면 깃발처럼 손을 흔들어 주시던 지역 주민들. 그분들을 올려다보며 지역대표로 제대로 일하겠다고 다짐하던 자랑스러운 내 남편.
그래, 지금부터 살아가는 모든 순간도 영화 찍듯 만들어 기록해 나가야겠어. 네가 감독이고 네가 배우야. 벤치에 앉아 만개한 봄꽃을 바라보며 꽃멍하는 순간도,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놓고 마주 앉아 먹는 순간도, 막히는 도로를 운전하며 가는 시간도, 우리에게는 모두 영화 같은 한 장면이 되는 거야. 풍광 좋은 음식점에서 팥죽을 먹던 초여름날도, 길가 찻집에서의 저녁 시간도, 육각형 접시도, 밤을 밝히는 조명등도 다 아름다운 인생 컷들이라는 거지.
대신, 감독의 입장으로 배우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첨가하도록 해야겠어.
‘너무 힘이 들어갔어. 힘 빼고, 긴장하지 말고.’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 지금 그대로도 충분하니까.’
신은경
전 KBS9시뉴스 앵커
전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KYWA) 이사장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 3개월 연수 후 KBS 9시 뉴스 앵커로 12년간 뉴스 진행
《9시 뉴스를 기다리며》, 《홀리 스피치》, 《신은경의 차차차!》,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잠언 읽고 잠언 쓰자》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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