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을 힘껏 잡고 있던 때도 그 줄을 탁 놓아버린 때도 모두 소중한 인생

나는 아직 5월을 맞을 준비가 안 됐는데, 계절은 벌써 라일락과 아카시아의 때로 달려가고 있다. 쏜 화살처럼 시간이 흐른다. 인생은 자기 나이만큼의 속도로 달린다는 말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내 삶의 속도는 60km. 요즘 웬만한 시내는 50~60km로 달리니 바쁜 도시 생활만큼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갈수록 빠른 속도로 달리는 인생에 운전자인 나까지 서두르면 사고가 나기 쉬우니 규정 속도를 지키고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단단히 타이른다. 아직도 연락해 오는 곳이 많고, 만날 사람도 너무 많아 운전 중 스마트폰을 꺼내 본다거나, 길 양옆 볼거리에 한눈이라도 팔면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

한때 열정과 인내, 끈기를 찬양하는 그릿(grit)이 화두였는데, 최근에는 그만두기의 기술인 큇(quit)이 눈길을 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줄리아 켈러(Julia Keller)는 자신의 책 《퀴팅: 더 나은 인생을 위한 그만두기의 기술(Quitting: A Life Strategy)》에서 퀴팅은 새로운 방식으로 인생살이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일, 건강, 가족, 행복, 인생 등 소중한 것들을 새로운 맥락에서 결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동안 강박에 가깝게 열심히 일하면서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자신을 밀어붙이던 이들에게, 기꺼이 그만두면 삶의 가능성은 확장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있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더라도 자신에게 또 다른 기회가 많을 거라는 나쁘지 않은 꼬드김 같다. 그만두기가 결코 실패나 낙오가 아니라 ‘영리함, 민첩성, 유연성’이라고 위로한다.

내 인생의 ‘퀴팅’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청년들에게 강연할 때 자주 나누는 나의 경험담이다. 실패담일 수도 있으나, 결국은 성공 스토리다. 나는 살면서 꽉 잡고 있던 줄을 손에서 탁 놓아버린 사건(?)이 몇 번 있었다. 대학 시절, 내 인생에 연극 말고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철저하게 믿으며 간절하게 울면서 엄마를 설득해 기성 극단 배우로 무대에 서려던 일이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허락을 받아놓았는데 극단 측에서 갑자기 내 배역을 바꿔 버렸다. 화려하게 주연으로 데뷔하기 직전인데 조연을 맡기다니. 나는 간절하게 붙잡고 있던 연극배우의 줄을 순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마 계속 연극을 했으면 아나운서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졸업 후 아나운서가 되어 12년 동안 화려한 시절을 열정으로 불태웠다. 그러다 또 한 번 붙잡고 있던 줄을 놓았던 ‘그만두기’가 있었다. 아나운서로서 최고의 꽃이라 여긴 뉴스 앵커 자리를 미련 없이 떠난 일이다. 박사학위를 위해 갔던 영국 유학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대로 가장 화려한 자리에 있을 때 유학을 갔고, 학위를 마치기 위해 방송국에 사직서를 냈다.

물론 그 덕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다. 후학을 지도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삶을 살았지만, 그 줄은 유독 팽팽했고 나는 또다시 지쳐갔다. 남들은 정년이 지나서도 어떻게든 교수직에 오래 머물려 한다는데, 나는 은퇴를 2년 앞두고 잡은 줄을 놓아버렸다. 정년까지 견디면 번아웃으로 인생 3막을 열어갈 기력조차 없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 돌아보니, 내가 인생의 한 막을 연기할 때마다 그렇게 고단했던 건 그 줄을 ‘너무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 줄은 두꺼운 동아줄 같아서 힘겹게 부여잡고 지내는 동안 얼마나 긴장해야 했던지, 한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줄을 잡고 버티는 팔과 어깨가 아팠고, 손가락도 부어올랐다.

연극을 할 땐 인생에 의미 있는 게 연극밖에 없는 것처럼 올인했고, 딸이 밤늦도록 연극 연습한다고 돌아다니는 게 못마땅해 반대하시는 엄마와 대치해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방송할 때도 내 삶은 온통 뉴스와 앵커, 아나운서의 일로만 가득 찼다. 저녁 뉴스를 하니, 누구와 편안히 저녁 식사를 한 적 없을 뿐 아니라, 휴가 간다고 자리를 떠날 엄두도 못 냈고, 아파도 병원에 입원하지 못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그런 나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경조사도 못 챙겨 사람 노릇을 못 했다. 이 모든 게 다 무얼 하나 시작하면 지나치게 몰두해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나의 성품 탓인 것만 같다.

나는 작년과 올해 각각 한 권씩, 두 권의 책을 냈다. 그런데 생각만큼 책이 술술 팔리진 않는다.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한다는, 15년 전 어느 편집자의 말이 무섭게 증명되는 시간이다. 신문 방송사에 보도자료를 뿌려도 기독교 매체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 사이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내용이 아니면 뉴스로 선택되기가 쉽지 않다.

요즘 세상 탓도 있었다. 내 책만 고전하면 무척 힘들 테지만, 대부분의 책이 다 잘 안 팔린다고 하니 그 말에 위로가 됐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탔을 때 작가들은 대부분 한 조각 기대가 있었다. 사람들이 이제 책을 살 거야. 노벨상 받은 책 한 권, 그리고 내 책도 한 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벨상 작가의 책 여러 권을 사는 데 지갑을 연 독자들은 다른 책들까지 관심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여러 권 구입한 노벨상 수상작들을 읽느라 다른 책은 읽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글을 쓰고 책을 낸다. 온 힘을 기울여 온갖 우여곡절 끝에 책을 낸 어떤 작가는 급우울 모드에 빠져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큰 기대를 하고 책을 냈지만 생각지도 못한 냉담한 반응에 우울하다는 얘기였다. 모르는 사람으로선 좋은 책 써낸 것으로 충분하지 꼭 잘 팔려야 하나 싶겠지만, 꼭 그런 게 아닌가 보다. 출산한 여인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열 달 동안 뱃속에 든 생명을 고이 키워 죽을듯한 고통을 무릅쓰고 아기를 낳은 뒤 엄마는 여러 이유로 산후 우울증이란 걸 겪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의 실패담이 내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게 미안하지만, 한편 고마운 메시지로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실패한 기억들을 끄집어내 강연에서 말하면 듣는 청년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그 이치가 이해가 간다. 저 사람도 실패했지만 결국 이겨냈다는데, 나도 이 어두운 터널을 한번 잘 지나가 보려고 다시 힘을 낸다며 청중인 젊은이들이 말했다.

여섯 작가의 인생 분투기라는 부제가 붙은 《나의 왼발》은 독서 선동가 김미옥 작가가 이끌고 박지음 작가가 기획해 나온 책이다. 작가들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를 일을 그들은 용기를 내 책에 담아냈다. 누구는 출생 때부터 실패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고, 가정 폭력으로 두들겨 맞았다. 누구는 이단 종교에 빠진 아버지를 겪었고, 형제의 죽음을 보았다. 누구는 심한 학교 폭력에 시달렸고, 20년 동안 무명작가로 살았다. 누구는 딸이라고, 여성이라고, 엄마라고, 정당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책에 묻혔고, 시를 쓰고 소설을 지었다. 책이 사람을 살렸고, 학폭을 이겨냈고, 어린 학폭 피해자를 살리는 출중한 어른이 되었다. 글을 쓰는 작가인데도, 원고 청탁이 전혀 없는 자신에게 스스로 원고 청탁서 이메일을 보내고 일 년에 백 편씩 글을 써나갔다.

여섯 작가의 맨살 같은 상처 이야기는 더 이상 실패도 좌절도 아픔도 아니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에서 “전진! 전진!” 하고 부르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인도에서 삶을 이어 나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을 읽을 때 느낀 격려의 메시지 같기도 했다. 살다 보면 넘어질 때가 있다. 넘어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잘 넘어지는 게 중요하다. 팔이 부러지지 않도록, 머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낙법을 잘 연구하고 익히는 게 인생의 지혜다. 더 중요한 건 다시 일어나는 일이다.

60km의 속도로 인생을 달리고 있는 요즈음, 나는 굵고 거친 동아줄을 힘껏 잡고 있던 때도 삶이고, 그 줄을 탁 놓아버리는 때도 인생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릿’도 ‘퀴팅’도 성공과 실패의 때라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일이다.

인생의 여러 장면에서 내가 열연했던 아름다운 작업이 그릿을 장착한 때였다면, 아쉬웠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참 잘한 결정들이 퀴팅의 전술이 아니었나 싶다.

 

신은경
전 KBS9시뉴스 앵커
전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KYWA) 이사장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 3개월 연수 후 KBS 9시 뉴스 앵커로 12년간 뉴스 진행
《9시 뉴스를 기다리며》, 《홀리 스피치》, 《신은경의 차차차!》,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잠언 읽고 잠언 쓰자》, 《시편 읽고 시편 쓰자》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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