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치매
권력과 치매
  • 양인덕 기자
  • 승인 2017.05.0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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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일이 가깝습니다. '예, 대통령이요', 훗날 커서 무엇이 되려느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이렇게 응답하곤 하던 필자의 어린 시절이 새삼 떠오릅니다. 마치 꿈꾸는 바를 막강한 힘으로 모두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대통령은 참 멋있고 꼭 해볼 만한 역할이리라 여겼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조금씩 철들어가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반드시 지위에 따른 권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힘이 세지는 만큼 감당해야 할 몫도 더불어 커진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습니다. 권력자의 책임 중 하나는 바로 건강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작년에 대통령 선거가 한창일 때, 거친 언행과 부도덕성 등 자질논란으로 시종 궁지에 몰렸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후보 진영은 경합후보의 건강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열세를 만회하려 집요하게 파상공세를 퍼부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후보의 건강이상설이 세상에 숱하게 유포되었고, 온갖 낭설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그녀는 경선기간 내내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힐러리 후보가 혈관성 치매에 걸려서 1년을 넘기긴 어려울 거라는 어떤 정체불명 의대교수의 발언영상이 유튜브에 오르기조차 했습니다. 물론 그녀에게 실제로 건강상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아직 모를 일이며, 치매 여부 또한 지금껏 판명된 사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 세간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평소 지친 모습이나 사소한 동작불안마저 유권자들의 우려와 부정적 반응을 증폭했으리라, 적어도 이렇게 짐작해볼 순 있겠습니다.

애초부터 투표종료 시점까지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줄곧 낙승할 것으로만 점쳐지던 힐러리가 낙선하자 사람들은 흔히 'shy Trump' 현상을 그 까닭으로 지목합니다. 그렇지만 필자는 'uneasy Hillary (지지한다고 답했지만 막상 건강이 미덥지 못하여 힐러리에게 표를 주지 않은 유권자들)' 징후 또한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리라 진단해봅니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 어느 대선후보의 건강문제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습니다. 어쩌면 그 후보가 치매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돌연 어디선가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치매국가책임제를 자신의 중점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그 일은 단순 소란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미국 대선 당시 후보의 건강문제가 불거진 것을 떠올리게 하면서 대통령의 자격요건으로서 건강을 우리 국민들이 더욱 중시하고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대선후보로서 인품과 도덕성, 그리고 선거공약의 실현가능성과 실천의지 등 모든 사항들이 분명 중요합니다. 하지만 안심하고 중책을 맡겨도 되겠다 싶을 만큼 건강하고 믿음직스런 모습 또한 유권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그저 필부로만 살아간다면 설령 치매라는 질병에 걸리더라도 본인이나 가족의 문제로 국한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에 오르게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 직위가 높아질수록 보통 권한과 권력도 증가하기 때문에 자칫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태의 실상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허울만을 믿고 경솔하게 판단했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만 권력자의 파국을 조명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정체성과 진실의 가치에 관해 성찰한 대작입니다. 물론 그 작품의 취지는 관점에 따라서, 행복하려면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올곧게 지켜주려는 사람을 선택하라는 권고로 파악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 자신을 비롯하여 가정과 왕국까지도 모두 파멸시킬 만큼 중대한 과실을 범한 원인이 다름 아닌 치매였음을 감안할 때,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뜻은 '공동체가 행복하려면 그 우두머리가 온전해야한다', 이것이기도 하리라 해석해봅니다. 셰익스피어는 처음에 어느 치매 가장의 행동거지를 예의주시하다 그 식솔들의 고통과 번민, 나아가 주변 인물들의 갈등과 좌절로 점차 확대된 실제 관찰경험에서 얻은 영감으로 이 비극을 창작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려있었던 세계사적 사건들을 되짚어보면 권력자의 치매로 인한 폐해가 비단 자기 나라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란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조기에 벗어날 기회가 있었고, 해방 이후 우리에겐 남과 북이 합쳐진 통일국가를 세울 기회도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 수장들이 프랑스 파리에 한데 모였을 때,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원칙과 국제연맹창설의 제창자로서 세계평화의 사도로 큰 주목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김규식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안고 파리강화회의(1918년)장에 찾아가서 약소 민족대표들의 청원대열에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체결된 베르사이유조약(1919년)에는 승전국의 전리품 목록, 패전국에 대한 천문학적 배상금, 그리고 허울뿐인 국제연맹 수립결정 등만이 열거되어 있었으며, 정작 약소 식민국가들의 염원인 독립보장 약속은 아예 자취를 감췄습니다.

비록 역사적 가정이긴 하지만, 약소국의 독립은 그때 회의를 주도하던 윌슨 대통령이 만일 보다 강력하게 주문했더라면 얼마든지 관철될 수 있었으리라고 역사가들은 분석합니다. 아울러 동맥경화(1906년)와 혈관성 치매(1917년)로 이미 심신이 극히 쇠약해진 그가 차라리 사임했더라면 제1차 대전의 평화적 종전처리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의 예방도 가능했으리라고 몇 해 전 영국 BBC방송이 보도한 바 있습니다.

건강한 후임 대통령이 (경제학자 케인즈도 이미 지적했듯) 독일 등 패전국들에 대한 징벌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부과함으로써 반발심 앙등과 독재정권 재등장의 소지를 줄이고, 자국 의회를 직접 설득해서 베르사이유조약 비준을 가결시켜 미국이 국제연맹에 적극 합류할 수 있었으리란 추론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럽대륙의 한복판에서 만국의 주권평등과 세계평화의 길로 향한 관문을 활짝 열 수도 있었던 장본인은 귀국 직후 뇌졸중(1919년 9월)으로 반신이 마비되고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은 채 백악관을 나와 실의에 젖어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도시 얄타(현 우크라이나)에서 전승연합국 수반 세 사람이 회담을 했습니다. 의제는 전후 동유럽 문제, 태평양전쟁과 극동아시아 문제, 전쟁억제를 위한 새 국제기구(국제연합, UN) 설립 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회담 초기엔 전쟁 조기종결과 전후 세계평화 및 정의와 자유를 위해 협력하는 듯 했지만, 결국 그 실속은 거의 소련이 독차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헝가리를 위시해서 동유럽 제국의 지배권은 온통 소련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한국과 독일 등 소련이 분할점령한 나라들은 추후 냉전시대의 이념적 분열과 정치적 갈등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었습니다. 그중 특히 한반도에는 신탁통치라는 올무가 씌워졌는데, 그로 인해 한국은 참혹한 내전까지 치르고 나서도 아직껏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습니다.

이 또한 역사적 가정이지만, 그 회담장에서 미소 띤 스탈린 서기장 곁의 수뇌들이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이나 두터운 외투로 몸을 감싼 채 졸고 있는 처칠 수상처럼 무기력한 치매노인들이 아니라 혹여 다른 누군가라도 건강한 인물들이었더라면 지금 한국은 과연 어떤 나라일까 하고 얼핏 상상도 한 번 해봅니다(이에 관한 세부내용은 '치매이야기: 역사와 현실', 양현덕·양인덕, 2016, 브레인와이즈, 제6장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루즈벨트는 회담이 열렸던 그 해 4월 뇌출혈로 쓰러져 이내 숨을 거두었고, 처칠은 종전 후에 인지장애와 혈관성 치매, 뇌졸중 증세가 깊어지자 스스로 수상 자리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눈을 감았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인지기능이 저하되고 성격의 변화가 오는 등 평소의 정상적인 판단과 직무수행이 곤란해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운명이 단지 몇몇 유력 지도자들의 치매증상 하나 때문에 달라졌노라고 단언하긴 힘들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치매가 회담 협상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서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과거 주요국가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평소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진 못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건강상의 문제점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동유럽 독점지배권이 확보되고 (이전 러일전쟁 패배로 상실했던) 극동지역 영토반환이 보장된 것에 만족해서인지 한반도에 단일 자치정부가 들어서든 혹은 미국이나 영국이 관할하든 그리 개의치 아니하려는 듯한 눈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루즈벨트가 어눌한 말투로 피식민지 국가들의 자활능력 부족을 운운하며 5년 이상 신탁기간을 두면 어떻겠느냐고 묻자 스탈린이 그 순간을 포착하여 루즈벨트를 치켜세우며 선뜻 동의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녕 사실이라면 극히 짧고도 우발적인 대화로 한반도의 명암이 엇갈려버리고 만 셈이지요.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면, 역사 속 인물들이 치매 등에 대한 건강진단을 미리 받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영국왕립의사협회의 연례총회(2004년)에 참석했던 관련 전문의들은 '그렇다'는 분석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치매에 걸린 사실을 인지하고 자진하여 물러났거나 대응조치를 취했더라면 세계대전을 위시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각종 참사를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몇몇 역사적 실존인물들(이 글의 등장인물 가운데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의 치매가능성에 관한 연구논문을 그 연례총회에서 발표했던 영국 헤이우드병원 전문의 엘 님 박사는 만약 그들에 대하여 조기진단과 효과적인 치료가 이뤄졌더라면 해당 국가는 물론 전 세계의 운명까지도 바뀌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이 곧 결정됩니다. 바람직한 지도자의 면모를 그려보고 나서 이 글을 맺으려 합니다. 이상적 인간형으로 일찍이 맹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겸비된 군자(君子)를, 플라톤은 四德(지혜·용기·절제·정의)이 구비된 철인(哲人)을 각각 제시했습니다. 이 덕목들 중에서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더 강조되는 요소가 있는데, 그에 알맞은 판단을 내려 시의적절(時中)하게 실행함이 곧 중용(中庸)이라 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대통령에게는 분별(智)과 지혜의 덕목이 한층 더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에겐 무엇보다 일 잘하는 인물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을 '잘' 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할 것입니다. 반드시 일을 '열심히(노력)', 그리고 동시에 '제대로(지혜)' 해야 합니다. 이 둘은 결코 선택의 문제라 하기 어렵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필자는 후자를 먼저 꼽겠습니다. 대통령이 명철하되 나태하면 당장 국가 잠재력이 한껏 발휘되진 못하더라도 장차 그가 분발할 날을 기약하며 지켜볼 수 있지만, 대통령이 근면하되 우매하면 나라 역량이 허비될 것이므로 그가 애를 쓸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주지하시듯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제일 긴 시간 일하면서도 노동생산성은 최하위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불문하고 노동자들이 장시간 업무에 매달리는 한편, 막상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자꾸 늘어갑니다. 국가 전체를 조망할 때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확실히 윤택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왠지 피부로 느껴지는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참작하면 한국이 과연 건강하고 행복한 나라인가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우리가 진정 잘 살아가려면 열심히 일하더라도 과연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늘 면밀히 점검하면서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성찰과 실천은 기본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몫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자신의 소임을 '잘' 이행하려는 국가 경영자, 대통령의 책무이기도 할 것입니다.

"Nothing will come of nothing." (無에서 생기는 것은 없다) 리어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치매는 곧 망각입니다. 대선후보들에게 당부합니다. 건강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건강하도록 힘써 주십시오. 우리가 앞으로도 응원할 테니 오늘 이 당부만은 꼭 기억해주십시오.

여러분 모두의 행운을 기원합니다.

디멘시아뉴스 dementianews@dementi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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