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5일은 미국 60번째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남의 나라 대통령 뽑는 데 웬 관심이냐고 하겠지만, 잦은 말실수로 치매 상태인지 의심을 받아온 바이든 대통령이 나이와 건강 문제로 압박을 받아 후보에서 사퇴하는 모습을 보니 치매가 사회 문제를 넘어 정치 문제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의 정신 건강 문제는 세계 평화에도 영향을 끼치겠다는 생각까지 한다면 너무 멀리 나간 것일까?
세월 앞에서는 그 누구도 건강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다. 만인의 사랑을 받아온 유명인의 치매 투병 소식은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한다. 배우에서 미국의 대통령으로 그리고 냉전 종식을 이끈 세계적 지도자로 기억되는 고(故) 레이건 대통령도 치매를 피해 가지 못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치매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정치, 경제, 외교 모든 면에서 20세기 미국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그를 냉전 종식,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로 불리는 보수 경제 정책, 그리고 자유주의적 가치 수호의 상징적 리더로 기억하고 있다.
1994년 11월 5일, 로널드 레이건은 서신을 통해 가족과 국민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알츠하이머병 진단 사실을 대중에게 직접 알렸다. 한 시대를 좌지우지하던 사람이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렸음을 알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치매 사실을 발표하는 서신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최근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수백만 미국민 중의 한 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낸시와 나는 이 사실을 우리의 개인적인 비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에게 알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예전에 낸시는 유방암을 앓은 적이 있었고 나는 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결과로 더욱 많은 사람이 검사받았기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암 초기에 치료를 받았고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한 많은 관심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병으로 고생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_레이건 대통령 서신 중
레이건 대통령의 치매는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적인 일이 아닌 치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전환했다. 발표 당시만 해도 치매, 특히 알츠하이머병은 대중적으로 논의되지 않던 질병이었으며, 많은 환자와 가족에게 사회적 낙인이 찍혀 병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에 레이건의 공개 선언은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인지 기능 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치매 진단 사실을 발표한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83세의 고령이었다. 이미 대통령직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시기다. 그의 발표는 전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도 치매 초기 증상이 있었을 것이라는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말실수나 기억력 저하와 같은 행동들이 치매의 전조였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변화로 치부되었고,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은 크지 않았다.
참으로 길고 긴 이별
레이건 대통령의 서신에는 앞으로 자신의 투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을 아내와 가족에 대한 걱정이 묻어 있다. 그리고 공인으로 사는 삶을 내려놓고 자연인으로서 홀연히 인생을 마무리할 황혼기로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로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내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병이 점차 심해지면 가족들이 힘든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 낸시를 이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가 오면 여러분의 도움으로 그녀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굳게 맞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일한 큰 영광을 준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언제일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으로 나를 부를 때, 나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조국의 장래에 대한 영원한 희망을 품고 떠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황혼기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미국의 앞날에는 항상 밝은 아침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들,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로널드 레이건
낸시 여사는 저서 《I Love You Ronnie》에서 치매를 “참으로 길고 긴 이별”이라며 레이건 대통령이 치매로 기억력을 상실하고 낸시 여사와 의사소통하지 못하게 되는 투병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낸시 여사는 치매에 대해 “점점 더 악화하는 질병”이라며 “나빠지는 것 외에 길이 없으며 터널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낸시 여사는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고 헌신적으로 레이건 대통령의 황혼기 여행에 함께했다.
마지막 선물
레이건 대통령은 재임 시절 냉전 종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등 여러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퇴임 후에는 자신의 치매 진단 공개라는 선물을 마지막으로 대중에게 남겼다.
그의 선물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치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다. 당시 치매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었으며, 이를 앓는 환자들은 종종 부끄러움과 사회적 낙인 속에서 고립되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이 이 병을 공개함으로써, 사람들은 치매를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치매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극복해야 할 과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의 투병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치매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치매를 둘러싼 편견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선물인 이 메시지는 치매와의 싸움이 단순한 기억 상실 이상의 도전임을 새겨 주었다.
양은미
(주)마음생각연구소 대표이사
세계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사)건강소비자연대 건강부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