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편안한 '일화기억'이 많은 것이 행복한 인생
오래 남기고 싶은 기억을 정리하는 글 쓰기 시간 갖기

2024년 12월 3일은 날짜를 기억하기도 쉽게 123이다. 그날 온 국민이 몇 시간 동안 머릿속에 번개가 친 것 같은 큰 충격을 경험했다. 대한민국 사람에게 이날은 2024년 “그때 그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너무 충격적이고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경험은 관련한 작은 단서에도 찰나의 빛이 스치듯 떠올리게 되는 섬광기억(閃光記憶)으로 남는다. 어쩌면 먼 훗날 치매를 겪더라도 늦게까지 기억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필자에게는 2024년 12월 4일도 “그때 그 기억”으로 남을 만한 일이 벌어졌다. 12월 4일 이른 새벽까지 잠을 못 자고 오후에 ‘긍정언어’를 주제로 어르신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가는 내내 ‘이미 계엄을 두 번 겪은 세대를 만나러 가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즐거운 기억을 나누며 긍정언어에 관한 내용을 잔뜩 준비했는데, 하필이면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푸념했다. 계엄에 대한 무서운 기억이 많은 세대인데…. 걱정이 앞섰다.

역시 예상대로 수업이 시작되자 어르신들은 저마다 예전 계엄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시며 무서웠던 감정과 기억을 풀어내셨다. 힘든 기억을 뒤로 하고 세상이 바뀐 이야기를 주로 하며 긍정적인 주제와 분위기로 수업을 마쳤다. 여하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2024년 12월 3일은 대부분 비슷한 섬광기억을 갖게 되었다.

 

내 인생의 작게 빛나는 순간, 오래오래

기억에는 섬광기억, 일화기억, 의미기억, 근육기억 등 여러 종류가 있다.

* 섬광기억(閃光記憶): 특별한 사건에 대한 기억. 다양하고 선명한 정보를 담고 있으나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 일화기억(逸話記憶):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정 상황이나 일화에 관한 기억. 어떤 상황을 겪음으로써 가지게 되는 장기 기억이다.

* 의미기억(意味記憶): 경험에 의한 기억이 아닌 일반적인 개념에 관한 기억. 전자가 특정한 날짜나 장소에 관계된 정보임에 비해, 후자는 날짜나 장소에 관계가 없는 정보의 기억이다.

* 근육기억(Muscle Memory): 일종의 절차 기억으로서, 반복을 통해 특정한 움직임의 수행력을 강화시키는 작용이다. 운동 기능 학습(Motor Learning)이라고도 한다.

살면서 겪는 일의 시기와 장소 등 다양한 재료로 엮은 일화기억은 한 사람의 인생에 역사가 된다. 역사책이 긴 역사에서 의미 있고 강렬한 사건을 담듯이 인생 역사책도 마찬가지다. 물론 매 순간의 경험이 의미가 있지만 모든 경험이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그중에는 평생 기억하는 것도 있고. 몇 분도 못 가서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먼 훗날 꺼내 볼 수 있는 기억이 될까?

 

마음생각연구소 제공
마음생각연구소 제공

 

뇌는 지루하거나 익숙한 것에는 흥미가 없고, 감정을 자극하거나 뜻밖의 일에는 큰 관심을 보인다. 이런 일들은 뇌의 편도체를 자극하여 해마에게 신호를 보내서 자세하고 오래 남고 쉽게 꺼내올 수 있는 강한 기억을 만든다. 그래서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은 뇌에 오래 남기 어렵다. 예를 들어, 평범하고 단순한 저녁 식사는 먼 훗날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혼 프러포즈를 받은 저녁 식사, 첫 데이트로 함께한 저녁 식사 등 인생의 첫 경험으로 감정을 크게 자극하고 의미 있는 저녁 식사에 대해선 소상히 기억하게 된다. 10년 전 12월 3일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해 보라.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면 아마 평범한 하루를 보냈을 거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2024년 12월 3일을 다수의 국민이 잠을 설친 날로 기억할 것이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나이가 되면 옛날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가진 사람은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남들의 귀를 쫑긋하게 하는 드라마틱한 섬광기억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 필요는 없다. 그 역시 굴곡 많은 힘든 인생일 수 있다. 소소하고 편안한 일화기억이 많은, 추억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평범한 나의 하루를 어떻게 일화기억으로 인생 노트 한 페이지에 적어둘 수 있을까? 영화로 제작된 《스틸 앨리스》의 저자이며 신경과학자 리사 제노바(Lisa Genova) 박사는 평범한 일상을 기억에 남기는 방법으로 ‘일상에서 벗어나기,’ ‘모바일 기기를 끄고 세상을 보기,’ ‘느끼기,’ ‘되뇌기,’ ‘일기 쓰기’ 등을 제시했다. 필자도 치매 예방 활동 질문을 받으면 늘 뇌가 신나는 활동을 하라며 비슷한 제안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뇌는 지루한 일에는 자극이 덜 되니, 심심한 뇌를 가끔 놀라게 할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하면 뇌에 자극이 전달된다. 다른 길로 가서 길을 잃어버려 고생한 경험도 몸은 피곤할지 모르지만 뇌는 아마 신이 날 것이다. 여행을 가는 것도 즐거운 방법이다. 늘 먹던 메뉴 말고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나 식당에 도전해 보자.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지인에게 연락해 보자. 그날 역시 그 전날과는 다른 하루가 될 것이다. 당장 만나는 약속을 해보는 것도 좋다. 그러면 또 다른 하루를 만들 수 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는데, 늘 익숙한 장소와 일만 편해서 좋다고 머무르지 말고 좀 불편할지 몰라도 새로운 일에 종종 도전하자.

 

마음생각연구소 제공
마음생각연구소 제공

 

필자가 하는 집단상담에서 빼놓지 않는 활동이 ‘감사 일기’ 쓰기다. 매일은 못하더라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한두 줄 정도 그날 기억나는 일을 쓰고 감사의 말을 쓰는 활동이다. 그리고 집단상담에서 이전 주 가장 감사한 날에 대해 나눔 활동을 한다. 효과가 매우 크다. 꽤 오랫동안 한두 줄의 ‘힐링 일기’를 써오고 있다. 매일 실천은 어렵지만 작은 수첩을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쓴다. ‘힐링 일기’를 쓰다 보니 감사한 시간이 참 많은데도 그냥 흘려보내고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글쓰기 활동은 정서 안정뿐만 아니라 인지 개선에도 도움이 되는 치매 예방 활동이다. 일기 쓰기가 어려운 분들은 필사를 추천한다. 종교에 맞게 성경이나 불경 등을 필사해도 좋고, 감동적인 글귀를 따라 써도 좋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필사한 내용에 대한 자기 의견이나 느낌을 한 줄 적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필사 활동에 도움을 주는 워크북이 많이 출시돼 있으니 활용해 보길 권한다.

신중년들은 고령 부모와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기억력을 나아지게 할 방법을 자주 묻는다. 오랫동안 가족과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고민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만나기 힘든 외국에 산다면 화상전화를 자주 하고, 동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한다. 어르신들이 심심할 때마다 보실 수 있도록 최신 자료를 자주 제공하는 것이다. 곁에서 돌보고 있다면 스마트폰의 사진을 열어 놓고 사진 내용으로 대화하라고 한다. 지겹게 느껴지더라도 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이야기하다 보면 그 사진과 관련된 기억이 튼튼하게 저장된다.

최근 기억부터 서서히 흐려지고 지워지는 치매로 인생 흔적이 지워지고, 결국 가족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며 못 알아보는 상황에 다다르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환자와 가족의 마음을 짓누른다. 인생의 순간순간을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인생이 저무는 시간까지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그때 그 기억’이 많았으면 좋겠다. 한해가 저물가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올해 가장 오래 남기고 싶은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더불어서 내년 버킷리스트도 한번 작성해 보고!

 

양은미
(주)마음생각연구소 대표이사
세계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사)건강소비자연대 건강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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