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 '놀이'로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다
5월 15일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 ‘초고령사회를 걷다 – 도쿄산책’ 편을 보았다. 한국보다 앞서 고령화를 겪은 나라이기에 노인정책이나 노인복지 서비스, 노인 관련 비즈니스에 관해 참고해 볼 부분이 많다.
‘도쿄산책’ 다큐 영상 초반에 소개하고 있는 도쿄의 한 노인 돌봄센터 Las Vegas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Las Vegas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돌봄센터 내에는 4인용 마작 게임 테이블을 비롯해 노인들이 한참 젊었을 때 유행한 아케이드 게임 등 추억의 놀이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어르신의 놀거리가 많은 문화 공간이다. 돌봄센터 직원과 참여 어르신들이 함께 “여기는 흠뻑 즐기며 보내는 장소입니다. 싫은 일은 다 잊고 열심히 놀도록 합시다” 크게 읽는다. 이 글귀를 함께 읽다 보면 하루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가득해질 것 같다.
이 놀이 프로그램은 돌봄센터의 가장 인기 프로그램이고, 고령 남자 어르신의 참여를 끌어내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센터를 이용하는 노인은 이전에 다니던 노인 돌봄센터는 가족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지루해도 주 2회를 갔지만, 이 센터는 재미있어서 주 4회를 온다고 한다. 이러한 형태의 센터가 도쿄에만 벌써 스무 곳 이상 생겼다니 어르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 돌봄센터 유형인지 짐작할 수 있다.
호모 루덴스, 인간다운 삶의 본질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인간)와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는 생각하기와 물건(도구)을 만드는 인간 기능에서 유래한 인류를 지칭한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는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기’나 ‘생각하기’ 외에도 인간의 주요한 제3의 기능으로 ‘놀이하기’를 들었다. 호모 파베르,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로 제시했다.
《호모 루덴스》에 따르면 인간 문명의 시작과 발전이 놀이를 통해 이뤄졌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놀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 예술, 종교, 법과 같은 문화 요소들은 놀이에서 파생했다. 결국 삶의 질과 창의성을 이야기할 때 놀이는 결코 부차적이지 않은 핵심적 활동임을 강조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놀이는 태어나서부터 살아가는 동안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며 삶의 즐거움과 활력을 주는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다운 삶이란 다양한 목표를 갖고 경쟁하고 함께 협력하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시간의 묶음 아닐까?
유아기에는 놀이가 교육이라는 인식에서 다양한 놀이 교육을 접한다. 청소년기에는 다양한 신체활동 및 그룹 활동으로 인성 및 신체 성장의 수단으로서 놀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그런데 어르신 삶에서는 놀이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놀이를 ‘시간 때우기’나 ‘소일거리’로 간주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노년기야말로 놀이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다. 신체적 제약이 커지고, 사회적 관계가 축소되며, 정서적 고립감을 경험하기 쉬우므로 함께 놀 수 있는 공간과 문화가 필요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치매 예방 측면에서 어르신들이 함께하는 놀이는 인지 개선과 정서 안정에 좋은 활동으로 매우 효과적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도쿄산책’에서 어르신들에게 오락 공간을 제공하는 돌봄센터 사례는 한국 노인시설에서 관심 두고 벤치마킹해 보면 좋겠다.
노년의 놀이는 건강지킴이
사회복지학과 현장실습 과목을 담당하다 보니 학생들이 나가는 실습 기관을 직접 방문해야 할 때가 많다. 다양한 실습 기관을 방문하는데 70% 이상은 노인 돌봄 시설이다. 대부분의 노인 돌봄 시설에서 이루어지는 서비스나 프로그램은 비슷하다. 건물 내에 있느냐 넓은 외부 시설에 있느냐의 차이만 있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어르신 돌봄 시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주야간보호센터를 다녀왔다. 이 센터도 다른 센터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활동 프로그램으로 만든 어르신 창작품을 빼곡히 벽에 장식해 놓았다. 그런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외부 경치가 훤히 보이는 통창으로 구성된 곳에 따로 마련된 어르신 놀이 공간이었다. 그곳의 여러 테이블에서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윷놀이와 다양한 놀이를 즐기고 계셨다. 센터장님도 이 놀이 공간을 만들어 어르신들이 즐겁게 활용하는 모습에 가장 자부심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많은 실습 기관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즐겁게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웃는 90대의 어르신 표정을 보는 일이 흔치 않다.
작년과 올해 상반기에 전통 놀이에 인지 활동을 결합해 어르신들 대상의 인지 개선 효과 연구를 R&D 과제로 수행했다. 연구 분석한 결과, 전통 놀이에 퀴즈와 같은 재미있는 인지 활동 요소를 함께 활용한 ‘두뇌청춘 전통놀이’ 수업이 참여 어르신의 인지 개선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도출해 R&D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마지막 회기마다 각 복지관 어르신은 이런 수업을 다시 열어달라는 이야기를 하셨고 기회가 되면 다시 열겠다고 약속해 드렸다.
이처럼 놀이가 단순한 여가를 넘어 인지 건강, 정서적 안정, 사회적 연결을 강화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돼 있다. 놀이에는 ‘함께 무엇을 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사회적 관계망이 단절되기 쉬운 노년기에,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는 경험은 삶의 질 향상과 직결된다. 따라서 어르신 놀이는 단순히 소일거리가 아니다. 건강, 관계, 문화의 교차점이다. 아이에게 놀이 가치만큼 노인에게 놀이 가치 또한 크다. 아이든 노인이든 모두가 호모 루덴스다.
노인, 다시 호모 루덴스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는 노인복지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고령 인구층이 두터워지는 만큼 고령인구의 건강 차이도 크다. 액티브 시니어 세대 등장으로 기존의 노인복지가 돌봄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건강한 고령층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복지에 관심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건강한 노인 놀이 문화의 회복에 있다.
노인복지관이나 노인복지센터 등 어르신 수업은 어떤 종류의 수업이냐에 따라서 남녀 성비가 확연히 갈린다. 그런데 놀이에 관련된 수업에는 남녀 비율이 비슷하다. 앞서 ‘도쿄산책’에 나오는 Las Vegas 돌봄센터 직원이 말하는 고령 남자 어르신의 참여율을 높였다는 효과를 내세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노인복지관이나 경로당 등 노인이 편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에 ‘도쿄산책’에서 나오는 어르신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놀이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어르신도 ‘놀이하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어르신 놀이 공간과 문화를 지원해야 할 때다.
지금의 액티브 시니어는 오락실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겔로그, 보글보글, 테트리스 등 동전이 생기면 달려가던 어린 시절 그 오락실에 대한 기억이 가득한 액티브 시니어가 8090 고령 세대가 되면 도쿄의 Las Vegas 같은 돌봄센터가 곳곳에 생겨도 괜찮지 않을까?
양은미
(주)마음생각연구소 대표이사
세계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사)건강소비자연대 건강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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