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케어의 과정에서 내린 ‘시설 전환’이라는 선택
간병으로 인한 개인 고통과 선택, 적절한 사회적 지원을 말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버지가 더 이상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때였어요.”
미국 인기 시트콤 <커뮤니티> 출연 배우 이베트 니콜 브라운(Yvette Nicole Brown)은 지난 10년 동안 아버지 오마르 브라운(Omar Brown)의 알츠하이머 간병을 홀로 맡아왔다. 그 여정은 배우로서의 경력을 잠시 접는 것을 포함해, 삶의 중심을 ‘간병’에 두어야 했던 치열한 시간이었다.
브라운은 미국 신경학회 공식 매거진 <브레인앤라이프(Brain & Life)> 6~7월호에 자신의 긴 간병 여정을 털어놓으며, “간병인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배워야 하는 전문가”라고 말했다.
‘어벤져스’에도 등장한 에미상 후보 배우, 이베트 니콜 브라운
이베트 니콜 브라운은 NBC 시트콤 <커뮤니티>에서 기독교 신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 ‘셔리 베넷’ 역으로 사랑받은 배우다. 마블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SHIELD 직원으로 출연해 눈길을 끌었으며, HBO 코미디 <어 블랙 레이디 스케치 쇼> 시즌 2에 출연해 이 작품으로 2021년 에미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브라운은 애니메이션 성우, 넷플릭스 영화 각본과 제작, 다양한 프로그램의 사회자로 활약하며 여러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아버지의 알츠하이머 간병 경험을 바탕으로 간병 가족의 목소리를 전하는 활동가로도 주목받고 있다.
수석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의 치매 진단
브라운이 아버지를 캘리포니아 자택으로 모셔 오게 된 계기는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거주한 아버지 오마르는 지역 중학교에서 수석 엔지니어로 일하다 은퇴한 뒤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브라운은 아버지의 은퇴 절차를 돕기 위해 고향으로 갔고, 필요한 서류와 재정 관련 자료를 한데 모아 정리한 바인더를 만들어 드렸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로 돌아오던 날, 아버지가 그 바인더를 분실했다고 연락해 왔다. 신분 도용 위험까지 우려한 상황에서 다행히 분실물이 회수되며 일단락됐지만, 이 일을 계기로 브라운은 ‘아버지가 혼자 지내기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아버지는 잦은 혼란, 물건 분실, 길을 잘못 찾는 일을 반복했다.
당시 브라운은 NBC 인기 시트콤 <커뮤니티>에서 ‘셔리 베넷’ 역으로 활약 중이었고, 바쁜 촬영 일정에서 간병을 병행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마침 2014년 <커뮤니티>가 시즌 5를 끝으로 종영하자, 브라운은 이를 전환점으로 삼아 아버지와 함께 살 집을 마련했다. 금요일에 프로그램 취소 소식을 들었고, 일요일에 아버지와 함께 살 집을 계약해 공간을 리모델링하며 재가케어의 새로운 일상을 꾸렸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합가해 재택 돌봄으로 시작한 간병
브라운이 한 살 무렵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살아왔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동거는 생애 처음이었다. 아침마다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레고를 조립하고, 좋아하던 음악과 영화를 함께 보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이후 <커뮤니티>가 시즌 6 제작을 재개하면서 복귀 제안이 들어왔지만, 브라운은 아버지의 돌봄을 이유로 하차를 결정했다. 다행히 CBS 시트콤 <오드 커플>에 주당 20시간만 일하는 조건으로 출연하게 되면서, 일과 간병을 병행했다. 점심시간에 잠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챙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아침이면 음악을 틀어놓고 함께 춤을 추고, 저녁에는 TV 퀴즈쇼 <Jeopardy!>를 함께 보며 퀴즈를 맞히는 소소한 일상을 이어갔다. 레고를 함께 조립하고, 오래된 사진을 보며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한동안 아버지는 낮 시간대 혼자 식사하고, 간단한 집안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기능을 유지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외부 간병인의 방문이 제한되고, 1년 반 이상 가족 둘만의 격리 생활이 이어지며 치매 증상이 빠르게 진행됐다.
아버지는 이름을 잊고, 샤워와 식사를 거부하며 혼잣말을 하거나 잠을 자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브라운은 “내가 아는 아빠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기분”이라며, 그러면서도 ‘이건 아빠가 아니라 병’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되뇌어야 했다.
죄책감과 사랑 사이에서 내린 결정
2024년 중반, 브라운은 아버지가 고관절 골절로 침대에 눕게 되면서 더는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돌봄의 현실과 마주했다. 24시간 내내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고, 브라운은 간병 수업을 듣고 전문적인 치매 돌봄을 배우려 했다. 하지만 사회복지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버지의 간호사로 남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딸로 남고 싶으신가요?” 이 질문은 결정적이었다.
이후 브라운은 적절한 시설을 찾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일부 요양시설에서는 돌봄이 아니라 방치에 가까운 현실을 목격하기도 했다. 브라운은 소파에 방치된 사람을 보고, 그 가족이 그 사실조차 모른다는 게 너무 마음 아팠다. 돌봄이 누군가를 밀어내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다행히도 브라운은 집에서 15분 거리의 ‘보드 앤 케어(Board & Care)’라고 불리는 소규모 돌봄 시설을 발견했다. 대규모 요양원과 달리, 5~6명의 치매 환자가 가정집과 같은 환경에서 일대일 간병을 받는 시설이다. 약물 투여에 의존하지 않고, 존중과 정서적 교감을 중심으로 한 돌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설로 모신 후, 브라운은 ‘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딸이 되었어요. 더 이상 간병인이 아닌.” 그녀는 매주 시설을 찾아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고, 산책하며, 가끔 아버지가 좋아하던 노래를 같이 불렀다.
“돌봄의 이유는 죄책감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브라운은 자신의 SNS와 팟캐스트 <Squeezed>를 통해 다른 간병 보호자와의 경험을 나누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1. 계획 없는 간병은 불행해진다
돌봄은 충동이 아닌 세심한 준비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기 삶과 가족, 직장, 재정 상황까지 고려하고,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를 대비한 지원 체계도 필요하다.
2. 시설 선택은 ‘내가 살고 싶은 곳’인지부터 생각하라
브라운은 “시설을 고를 땐 예고 없이 방문해 보라”고 조언한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시설 모습과 직원의 말보다 환자들의 표정과 냄새, 분위기가 정확한 정보를 알려준다.
3. 시설 돌봄은 사랑의 포기가 아니다
많은 보호자가 시설에 부모를 보내는 순간을 ‘실패’로 여기지만, 브라운은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는 선택도 있다”고 말한다. 그 선택은 ‘딸’로 남기 위한 용기였다.
브라운은 사랑하는 가족이 치매에 걸렸을 때 집에서 보호 시설로 옮길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것은 가장 어려운 결정이라고 말했다.
시애틀 워싱턴 대학교 기억 및 뇌 건강 센터의 임상시험 책임자 마이클 로젠블룸(Michael Rosenbloom) 박사는 “치매 간병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초기에는 환자가 일상생활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어 부담이 크지 않지만, 중기 이후에는 관리가 어려워지고 공격성, 망상, 수면 장애, 배회 등으로 인해 보호자의 부담이 급격히 커진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는 “사랑하는 가족이 고속도로를 배회하다 경찰에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고 덧붙였다.
미국 알츠하이머 협회 수석 이사 엘리자베스 에저리(Elizabeth Edgerly)는 “정답은 없다. 누구도 당신 가족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단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모든 치매 가족에게는 저마다의 방식과 속도가 있으며, 돌봄 방식에도 정해진 답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한국의 치매 환자 10명 중 8명은 가족의 손에 의해 돌봄을 받고 있다. 중앙치매센터 <2023 치매현황>에 따르면, 전체 치매 환자의 약 77.9%가 재가(在家) 상태이며, 이들 대부분은 가족 간병에 의존하고 있다.
가족 간병인의 71.5%는 여성이며, 절반 이상이 50~60대 중년층이다. 부모를 돌보는 중년 자녀뿐 아니라, 고령의 배우자가 서로를 돌보는 경우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일부에선 노부모가 치매에 걸린 성인 자녀를 돌보는 세대 역전 간병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많은 보호자가 사회적 고립과 정서적 탈진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시설 이용에는 죄책감을 느낀다.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면 불효’라는 인식, 가족 중심의 돌봄 문화, 시설에 대한 불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라운의 말처럼, 직접 돌봄은 사랑의 방식 중 하나일 뿐 유일한 답은 아니다. 직접 돌봄과 기관 돌봄 사이에는 다양한 연계 방식이 존재하며, ‘돌보는 보호자도 인간’이라는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국가 치매 정책의 핵심 방향도 ‘가족 책임’이 아닌, '돌봄의 사회적 분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가 아픈 엄마(또는 배우자)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느냐”는 질문을, “내가 어떻게 해야 가장 잘 돌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꿔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브라운이 선택한 ‘보드 앤 케어(Board & Care)’처럼 치매 노인을 위한 소규모 가정형 돌봄 시설인 치매전담형 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이 지역 곳곳에 마련돼야 한다. 다가오는 돌봄통합지원법 시행을 앞두고, 환자 중심의 돌봄 환경이 우리 가까이에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지 점검하고 정비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