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요양원 생활 ③
자식은 부모의 전부, 부모는 자식의 밑거름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A 어르신이 사무실 문 앞에 섰다. “어르신, 필요한 것 있으세요? 도와드릴 것 있어요?” 여쭸더니 불쑥 “내 집 하나 팔아 줘요” 하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으신다.
“돈 필요하세요?” 하고 묻자 “마, 그게 아니고 필요 없는 집이 있어서” 하고 말씀을 더 잇지 못하셨다. “그럼, 얼마에 팔아 드릴까요? 얼마 받고 싶은지 말씀하셔야 여기다 써 붙이지요” 하고는 각종 게시물이 붙은 벽을 가리키자 “시세대로 팔아야지 얼마 달라고 하믄 주나?” 하신다. “알았어요. 제가 방 붙여서 후하게 살 사람 알아볼게요” 하자 만면에 웃음을 띠고 돌아서 가신다.
이 어르신은 결혼생활을 강원도 탄광도시에서 했는데 그때 사택에서 동네 분들과 어울려 살던 추억이 좋았나 보다. 낮에는 다른 어르신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지내시다가도 어스름한 저녁 때가 되면 “00 가는 버스 갔어요?”, “동네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이네”, “버스가 가면 간다고 얘기를 해줘야지요” 하시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신다.
“어르신, 또 차가 오고 있으니 저기 대합실에서 TV 보며 기다리시면 차 올 때 말씀드릴게요” 그러면 “나 혼자 남았네” 하며 한동안 앉아 계시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신다.
어느날 혼자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이 어르신이 주방 문을 열고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살며시 앉으셨다.
“탄광이 문을 닫으니, 식당에 손님도 없네. (주인도) 이제 곧 떠나야 안 카갔나?” 하신다. 이곳을 어르신이 살던 00시에 있는 식당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어르신, 아직도 00에 가시고 싶으세요?” 물으니, “하모, 가고 싶지!” 하신다. 때는 지금이다 싶어 솔직히 말씀을 드려 본다.
“어르신, 00에 탄광 없어진 거 알고 계시죠?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어 떠나고 슈퍼도 문 닫고 식당도 문 닫고 젊은 사람들은 애들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학교도 없어져서 애들도 없데요. 나이 드신 분들은 다 돌아가셔서 사는 사람이 없어 빌라에 전기도 끊기고 수도도 끊겨서 사람이 살 수가 없데요. 그래서 어르신도 00에서 못 살고 서울의 딸 집으로 오셔서 손녀딸 키우며 사셨잖아요”
“그래 나도 알고 있지” 하신다. 풀이 죽은 표정이시다.
“어르신, 그때 00에서 친구들이랑 재밌게 사셨잖아요. 여기서도 친구들과 함께 재밌게 사시니 좋잖아요. 그러니 사람들 안 사는 00은 잊고 여기서 재밌게 살아요” 하자 눈가가 촉촉해지며 “그래야지” 하신다.
B 어르신은 지인의 소개로 모신 분이다. 집에서 몇 년간 어르신을 모신 큰 아드님이 요양원으로 모시고 가기 전에 집에서 어르신을 뵙고 같이 상담해 주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 집을 방문했다. 집에 들어서자 이쁘장한 어르신 한 분이 방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인사를 나누고 “어르신, 그림을 참 잘 그리시네요. 이뻐요” 하자 “그림을 그려야 치매 안 걸린다” 하며 환하게 웃으시고 또 엎드려 열심히 그림을 그리신다. 어르신을 해바라기요양원에 모셨는데 작은 체구의 예쁜 모습으로 매사에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젊었을 때 그 어르신의 성품과 생활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지능력이 떨어지셨다. 어느날부터 혼잣말을 중얼중얼하신다. 처음에는 무슨 말씀인가 알 수 없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따님 이야기다. 어르신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딸은 수도권에 살지만 운전을 못해 대중교통으로 오려니 불편해서 자주 찾아오진 못한다. 어르신은 시간이 갈수록 아들들은 찾지 않고 딸만 찾으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르신은 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딸과 말씀을 하신다.
옷장에 붙은 거울을 보며, 화장실에 있는 거울을 보며, 물건을 붙잡고 마치 앞에 딸이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어르신, 누구하고 얘기하세요?” 하면 거울 속에 비친 어르신 자신을 가리키며 “우리 딸이야” 하고는 또 혼잣말을 계속하신다.
아마도 젊어서 딸에게 해주지 못한 것, 딸과 하고 싶은 것들이 가슴에 남아 있어서 그럴 게다. 몇 날 며칠을 해도 끝이 없을 이야기다. “네게 미안하다”, “너랑 즐거웠다”, “네게 고마웠다”, “네가 있어서 엄마가 행복했다”. 그런 말이 산처럼 쌓이고 바닷물처럼 많았으리라.
몇 년 전에 모신 C 어르신은 결혼해서 남편과 농사를 짓고 살다가 자녀들이 아주 어릴 때 남편이 돌아가셔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사셨다. 논 몇 마지기, 밭 몇 뙈기로는 자식들과 도저히 먹고살 수 없어서 중소도시에 있는 공장에 취직해 악착같이 일해서 작업반장까지 올라가셨다.
본인은 무학이었지만 그렇게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서 자녀들을 반듯하게 키워내셨다. 그 흔적이 어르신의 두터운 손에 남아 있었다. C 어르신의 손은 두꺼비처럼 두껍고 거칠었다.
C 어르신은 해바라기요양원에 입소한 첫날 느티나무와 장독대, 아궁이, 우물 등을 보시고 “우리 외갓집이네” 하며 무척 만족해하고 좋아하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은 잘 적응했고 활기가 넘치셨다. 어느날부터는 다른 어르신들에게 우리 남편을 “내 아들”이라 하고 필자를 “내 며느리”라고 부르셨다.
C 어르신이 우리를 자식처럼 며느리처럼 생각해 주시니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되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해가 어스름하게 지는 때가 되면 안절부절못하신다.
다른 어르신들을 보고 “니들은 와 집에 안 가고 우리 아들 집에 있냐? 당장 나가라” 소리를 치고 심하면 멱살을 잡고 흔들기까지 하셨다. 우리가 말리면 “아들, 며느리, 니들은 와 저 늙은이들한테 집에서 나가라고 말도 못하냐? 바보처럼!” 하는 소동이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일어났다.
우리가 “어르신, 저희는 어르신 아들, 며느리가 아니에요. 여기는 어르신들 하숙집이에요. 우리집은 여러 어르신이 같이 모여 함께 사는 곳이에요. 어르신도 노래도 하고 운동도 하고 같이 재밌게 살아요” 하면 속이 상하셨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식사도 거부하는 날이 많았다.
한동안 그런 소동을 겪고 난 뒤 면회 온 큰아들에게 들은 얘기가 다소 충격적이었다. 큰아들이 사업을 하다 망해서 집에 압류가 들어왔는데, 하필이면 그때 C 어르신이 집에서 그 장면을 겪다가 혼절하셨다는 거다. 지금은 TV 연속극에 그런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예전에는 집달관(執達官 법원 집행관)들이 채무자의 집에 강압적으로 들어와 빨간 딱지(압류표)를 TV와 냉장고 등 가재도구에 붙이는 장면이 종종 방영됐다. 돈 갚기 전에는 절대로 떼면 안 된다고 윽박지르고, 그걸 본 집안의 아이들은 겁에 질려 울고, 아내는 혼절하는 그런 일이 C 어르신에게 일어났다고.
아드님의 말을 들으니 C 어르신의 그동안 행동이 바로 이해가 갔다. 젊어서 혼자 된 어르신이 어린 자녀들을 고생고생해서 키워 먼저 간 남편에게도 자신을 낮추어 보던 사람들에게도 “자 봐라. 내가 자식들을 이렇게 훌륭하게 키웠어”라는 자부심이 충만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자부심이 무참하게 무너져 버렸을 때 어르신의 심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C 어르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 봐라. 이게 내 아들이고 이게 내 며느리다. 그리고 이 집은 내 아들 집이다”라고 확인하고 자랑하고 싶었던 게다. 그것이 어르신이 평생 고생하면서 쌓아온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집을 팔아 달라던 A 어르신의 아드님이 다음날 사전 연락도 없이 면회를 다녀가셨다. 그날 밤 어르신이 사무실 앞을 지나가셨다.
“어르신, 어제 집 판다고 하신 것 기억하세요?”
“내가 우째 그런 말을 했대요. 말 난 김에 잘 팔아 주소.”
쑥스러워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신다.
어르신의 마음은 서울로 유학 가는 막내딸 자취방 구해주고, 작은아들 대학 등록금 내주고, 큰딸 결혼할 때 보태주고, 큰아들 손주 낳았다는데 뭐라도 사라고 보태줄 생각에 조급하기도 하고 설레셨을 수도 있겠다. 어르신에게는 젊어서 남편과 한 푼 두 푼 아껴가며 모아서 산 추억이 서린 집보다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앞날이 더 소중하셨을 것이다.
“어르신, 잘 팔아 드릴 테니 복비나 후하게 주세요!”
슬픔도 애달픔도 자식 때문이고, 기쁨과 행복도 자식 덕분이다. 자식은 부모의 전부이고, 부모는 자식의 밑거름이다.
배정은
용인해바라기요양원 원장
간호사/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
용인시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노인분과실무위원
용인시 장애인 수급자격심의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