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신탁, 국정과제 채택…새 정부 첫 치매 정책 ‘주목’
현장 종사자들이 말하는 공공신탁 도입 필요성과 한계
전문가들 “공공신탁, 돌봄과 존엄 연계한 제도로 설계돼야”
이재명 정부의 첫 치매 정책으로 추진되는 치매안심재산관리(공공신탁) 지원 서비스가 내년 시범사업을 앞두고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사업은 정부가 지난 16일 국무회의에서 확정한 123개 국정과제 가운데 보건복지부의 ‘인구 가족 구조 변화 대응 및 은퇴 세대 맞춤형 지원’ 항목에 포함된 것으로, 새 정부 치매 정책 현안 중 유일하게 채택돼 주목된다. 국회입법조사처 역시 다가오는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위원회가 다뤄야 할 쟁점으로 ‘고령 치매 환자 자산 보호 제도’를 제시했다.
앞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2023년 기준 국내 65세 이상 치매 상병자(약 124만 명)를 대상으로 자산을 처음 전수 조사한 결과, 무려 154조 원 규모의 ‘치매 머니’가 드러났다고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50년에는 그 규모가 무려 488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조사 대상자를 모두 치매 진단자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향후 수백조 원의 부(富)가 고령 치매 환자의 손에 쥐어질 것이란 점에서 경제적 학대나 사기, 금융 범죄 등의 표적이 될 우려가 커지는 대목이다.
일본의 사례를 보면 경각심이 더 높아진다. 2023년 특수사기 피해자 10명 중 8명(78.4%)이 65세 이상으로 조사됐다. 2023년 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기반 투자사기 피해자 중 절반에 가까운 44.7%가 60대 이상이었다. 지난해 말 다이와연구소(Daiwa Institute of Research)에 따르면, 일본 치매 노인의 금융자산은 2023년 126조 6,000억 엔(약 1,190조 원)에서 2035년 221조 9,000억 엔(약 2,087조 원)까지 불어날 전망이다.
치매안심재산관리는 재산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치매 환자가 일상생활이나 치료, 여가 등을 이어가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정부는 공공신탁뿐 아니라 민간신탁 제도 전반을 손질해 초고령사회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제도가 자리 잡기까지는 고령층의 심리적 저항감, 가족 구성원의 반대, 전문 인력 양성과 관련 기관 간 협력망 구축 등 넘어설 난관이 많다는 평가다.
현장 종사자들이 말하는 공공신탁 도입 필요성과 한계
국민연금연구원은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노인요양시설과 치매안심센터, 국민연금공단 노후준비상담사, 종합사회복지관 등 20명의 현장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를 담아 ‘고령자 공공신탁 사업모델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지난달 5월 발간했다. 종사자들은 재산 관리가 어려워진 노인들이 경제적 학대와 재산 갈취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공공신탁이 이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보고서는 먼저 치매와 학대의 밀접한 상관성을 부각했다. 한 노인보호 전문기관 관계자는 “치매가 있는 4등급 어르신인데 재산이 많았다. 조현병이 있는 아들이 때리는 상황을 반복했음에도 시설이나 병원으로 가지 못했다”며 “경제적 여력이 있지만 학대 위험 상황에는 지속적으로 노출돼 있었다”고 전했다
불법 계약과 사기 피해 사례도 소개됐다. 치매 노인의 명의를 도용하거나 불필요한 계약을 체결하게 만드는 경우다. 치매안심센터 사회복지사는 “본인 집에 있지도 않은데 정수기 몇 대가 계약이 돼서 갑자기 통지서가 날아오기도 하고, 건강식품을 산 적이 없는데 어르신 필체가 아닌 사인이 돼 있는 경우도 있었다”며 “결국 후견 케이스로 넘어와 관리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사회복지사는 “동네 식당 주인이 어르신이 드시지 않았는데도 매달 식대를 20만 원씩 갈취했다”며 “후견인 선임 후 경찰 신고를 통해서야 멈출 수 있었다”고 경험을 들려줬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인의 취약점도 드러났다. 가족으로부터 직접 돌봄을 받지 못하는 노인의 경우 요양보호사나 생활지원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또 다른 위험에 처한다.
한 사회복지사는 “200~300억대 부동산 재력가이신 어르신인데 아들이 지적장애가 있었다”며 “재가 요양보호사가 집안 사정을 파악하고는 요양기관 서비스를 끊고 개인적으로 개입하다가 입양 딸로 입적해 버린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돌봄 제공자와 노인 사이의 신뢰 관계는 긍정적인 요소이지만, 학대가 발생하면 오히려 돌봄이 장기간 지속될수록 개입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가노인돌봄센터 관계자는 “독거 노인은 자식 같은 역할을 하는 요양보호사나 생활지원사 의존도가 더 높다”며 “통장을 맡긴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기관 차원에서는 절대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돌봄의 폐쇄성이 학대 발견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경고다.
또한 가족이 해체되거나 무연고인 노인의 경우, 사망 후 재산 처리가 사각지대에 놓인다. 치매안심센터 관계자는 “무연고 노인이 돌아가시면 상속재산관리인을 누가 지정해야 하는지 기준이 없고, 지역사회 기관 간 의견충돌이나 역할 떠넘기기가 벌어진다”며 “이런 경우 공공신탁이 개입돼 상속재산 관리 절차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대로 생전에는 연락이 없던 가족이 사망한 뒤에야 나타나 유산을 요구하는 상황도 발생해 현장 대응에 어려움이 크다는 호소가 이어졌다.
현행 치매 공공후견제도의 한계도 드러났다. 한 사회복지사는 “시민 후견인이 전문성이 없다 보니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부담이 크다”며 “결국 치매안심센터 담당자가 사실상 그 역할을 떠안게 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 역시 “치매공공후견사업은 재산관리보다는 신상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어 후견인이 재산 문제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응급 상황에서는 한계가 더 두드러진다. 한 종사자는 “병원 응급실에서 보호자 서명을 요구하는데, 후견인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결국 담당자가 대신 서명하며 과도한 책임을 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기관 내부의 부정적 태도와 직원 소진이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무엇보다 공공신탁 도입의 가장 큰 걸림돌은 고령층의 낮은 수용성이다. 일단 관리를 위해 통장 자체를 넘겨받기가 쉽지 않다.
노인전문간호센터 원장은 “그 시대 여성 어르신들은 재산 문제를 평생 스스로 해결해 본 적이 없어서 ‘몰라, 우리 큰아들이 알아서 하겠지’라고 하신다”며 재산을 외부에 맡기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전했다. 한 사회복지사는 “사기를 당해도 통장은 내가 관리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강하다”며 “본인 재산을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선뜻 맡기지 못한다”고 했다.
상속권자의 반발도 빈번하다. 한 관계자는 “상속인이 있는 치매 환자의 경우, 자녀가 소송을 걸며 민원을 제기하는 일이 많았다”고 경험담을 전했다. 그렇다 보니 후견 심판 청구 때 아예 재산관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사례도 전해졌다. 후견인한테 소송을 건다며 법무사를 찾아가는 상황까지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공공신탁의 중요함을 거듭 강조했다. 정착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으나 저출산·고령화의 인구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는 데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앞으로 치매 노인뿐만 아니라 노후 준비 차원에서 일반인들도 필요성을 느낄 것이란 전망이다.
특히 지역사회 서비스를 받던 노인이 건강 상태 악화로 요양시설에 입소한 이후 치매가 더 심해지면 문제가 시급하다. 여기에 가족의 지원이 없다면 속수무책이다. 한 관계자는 “시설에 입소하면 사실상 치매안심센터의 개입은 종결된다”며 “요양시설이나 요양병원에 입소한 분들에 대한 재산관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 “공공신탁, 돌봄과 존엄 연계한 제도로 설계돼야”
보고서는 공공신탁이 자산 운용뿐만 아니라 돌봄과 존엄을 함께 지원하는 ‘돌봄 연계형 신탁’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 복지기관 담당자는 “재산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는 판단이 중요하다”며 “이는 생활 설계와 돌봄 계획이 함께 가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밖에 “노인의 의향을 존중하며 맞춤형 계약과 상품을 설계하고, 전문성과 신뢰성을 갖춘 독립적 인력이 장기적으로 배치돼야 한다”, “한 기관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고,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통한 협력 구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계약직 순환보직으로는 전문성이 확보될 수 없어 장기적 전담 인력이 요구된다” 등 의견도 이어졌다.
나아가 공공신탁이 실효성을 갖추려면 ▲신뢰 형성 ▲위탁자의 의사결정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 마련 ▲디지털 기반의 투명한 관리 체계 ▲금융·법률 전문가와 사회복지사가 함께 참여하는 협력 구조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렸다.
보고서는 “공공신탁은 단순한 자산 운용을 넘어 개인의 돌봄설계와 통합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담당인력이 전문성을 갖추도록 교육하고 연속적 업무수행이 가능한 체계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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