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硏 ‘인지 취약자 지원 신탁 현황과 개선 방향’ 보고서 발간
미국·영국, 복지·세제 혜택 강화...싱가포르·홍콩은 공공 주도 모델
일본은 민간·지역 금융 연계로 확산...한국은 신탁 인식 개선부터

국회의사당 전경 / 픽사베이
국회의사당 전경 / 픽사베이

인구 고령화와 함께 치매 등 인지 취약자의 자산관리 수요가 늘고 있지만, 국내 신탁 제도는 제한적으로 활용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장애인특별부양신탁, 발달장애인신탁, 후견신탁, 유언대용신탁 등이 운영되고는 있으나, 시장 규모와 이용률 모두 해외 주요국에 비해 뒤처져 제도 개선과 활용률 제고가 시급하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특히, 장기적으로는 저소득 인지 취약층을 위한 재산관리 지원 측면에서 공공 부문의 역할 확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인지취약자 지원 신탁 현황과 개선 방향 / 보험연구원
인지취약자 지원 신탁 현황과 개선 방향 / 보험연구원

보험연구원(KIRI)은 지난 22일 ‘인지취약자 지원 신탁 현황과 개선 방향’(이윤영·강윤지)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해외 주요국의 사례를 분석하는 한편, 치매 고령자를 포괄할 수 있는 제도 설계와 공공·민간 협력 체계 강화를 개선 과제로 제시했다.

영미권 국가들은 중세 영국 형평법(Equity Law) 등의 영향으로 재산의 법적 명의와 실질적 이익을 분리하는 신탁 개념이 정착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신탁이 발달했다. 인지 취약자 지원 신탁은 정부의 개입보다 복지제도와 세제 측면에서 이들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미국은 1993년 OBRA(Omnibus Budget Reconciliation Act) 제정을 통해 연방사회보장법에 특별수요신탁(Special Needs Trust·SNT) 규정을 도입했다. 이에 따라 장애인이 신탁을 설정해도 메디케이드(Medicaid) 등 공공복지 수급권을 잃지 않도록 제도화했다. 신탁 종료 시에는 생전 받은 복지 비용을 잔여 자산에서 우선 상환하도록 하는 ‘페이백 조항’을 의무화해 공공 부담을 덜었다. 다만, 주마다 요건과 절차가 달라 제도적 복잡성이 높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미국 장애인보호법은 치매를 심각한 인지적 손상에 따른 장애로 규정하고, 사회보장청이 신경인지장애로 분류해 장애수당 지급 대상에 포함했다. 2010년부터는 초기 알츠하이머병을 신속심사 대상 질환으로 지정해 연방장애보험 등의 수급을 조기에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65세 미만 치매 환자는 자익신탁을, 고령인 경우 집합 또는 제3자 특별수요신탁을 활용해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영국은 장애인·취약자 신탁(Disabled/Vulnerable Persons Trust)을 통해 상속세·소득세·자본이득세에서 광범위한 면제를 제공한다. 국세청에 취약층 수익자 등록을 하면 수익세율과 면세 한도를 일반 개인 기준으로 적용받을 수 있다. 장애인·취약자 신탁은 수탁자 권한이 큰 재량신탁(Discretionary Trust)의 특수한 형태다. 법무법인과 전문 신탁회사가 설계 주체이며, 금융기관의 참여는 제한적이다. 강력한 세제 혜택이 신탁 설정을 유도하는 핵심 수단이다.

치매 등 인지장애를 앓는 고령자를 대상으로는 가정법원이 관장하는 법정후견인 지정제도와 계속적 위임장(Lasting power of attorney) 제도를 재량신탁과 연계해 후견신탁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계속적 위임장은 본인이 아직 인지 능력이 있을 때 치매 등으로 능력 상실에 대비해 미리 위임장을 작성하는 제도다.

미국·영국, 복지·세제 혜택 강화...싱가포르·홍콩은 공공 주도 모델

정부 주도 공공신탁이 발달한 싱가포르와 홍콩의 경우, 공공 수탁자가 적극적으로 중·저소득 인지 취약자의 신탁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정부가 설립한 공공신탁기관(Special Needs Trust Company·SNTC)에서 저소득층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별수요신탁을 운영한다. 최소 5천 싱가포르달러(약 540만 원)로 신탁 계좌를 개설할 수 있고, 관리수수료의 90~100%를 정부가 보조한다. 경험이 풍부한 전문 사례 관리자(Case manager)가 맞춤형 돌봄 계획을 수립하고 정기 점검을 수행해 정책 신뢰도를 높인다. 다만, 부동산·유가증권은 신탁재산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홍콩은 사회복지부 장관이 법적 수탁자가 돼 계정을 집합 운용하는 모델을 채택했다. 수익자의 돌봄 계획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돌봄 제공자(Caregiver)도 반드시 지정하도록 하고 있다. 수익자는 지적·정신 장애나 자폐에 국한되며, 치매는 해당하지 않는다. 높은 납입금과 고정비율 신탁 관리 수수료, 사회복지 급여 수급권 상실 가능성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며, 정부 주도 정책임에도 저소득층에 친화적이지 않아 이용률이 낮다는 분석도 내놨다.

우리나라와 신탁 법제가 유사한 일본은 2000년대 이후 고령 치매 인구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신탁 관련 법·제도를 거듭 손질하면서 관리형 신탁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전략을 펼쳤다. 그 결과, 치매 대비 신탁이나 후견형 신탁 등 고령자 보호 상품이 확대됐다.

일본 신탁 시장은 스미토모미츠이 등 상위 3대 신탁은행이 97% 점유하는 과점 구조이지만, 신탁 판매대리점 규제 완화를 통해 지역 금융기관이 참여하면서 도시 외곽이나 농어촌 지역 고령자의 접근성도 높아졌다.

후견제도 지원 신탁 구조 역시 우리나라와 차이를 보인다. 일본의 제도는 수탁자가 일정 범위 내에서 후견인의 재산 관리 행위를 감독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또한 후견인 구성에서도 차별점이 나타난다. 친족 후견인의 비중이 80% 이상인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변호사·법무사 등 전문 후견인이 성년후견인의 51.7%를 차지해 전문가 비중이 절반 이상에 달한다.

인지취약자 지원 신탁 현황과 개선 방향 / 보험연구원
인지취약자 지원 신탁 현황과 개선 방향 / 보험연구원

국내에서는 발달장애인신탁(특수지원신탁)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제도는 2015년 ‘발달장애인 권리보장법’을 근거로 자폐인사랑협회가 무연고 발달장애인 대상 재산관리지원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처음 도입됐다. 이후 2022년 국민연금공단이 수탁기관으로 참여하는 시범사업으로 확장됐으며, 내달 본사업 전환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협회 자체 신탁은 세제 혜택이나 복지 수급권 보장이 적용되지 않고, 신뢰성 확보에도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비영리 특성상 수수료를 받을 수 없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없이는 운영 지속성도 부족하다.

일본은 민간·지역 금융 연계로 확산...한국은 신탁 인식 개선부터

고령자 신탁의 경우 인식 제고가 선결 과제로 꼽힌다. 유언대용신탁이나 후견신탁은 제도적 기반이 구축돼 있으나,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다. 소유권 분리에 대한 거부감, 공증·등기 절차에 따른 시간·비용 부담, 적절한 후견인 선정의 어려움 등이 주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국내는 친족 후견인의 비중이 높아 전문성 부족과 재산 남용에 대한 우려가 상당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전문 후견인 확대, 자격 요건 강화, 법적 책임의 구체화, 감독 체계 보완 등의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국내 신탁 제도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대국민 인식 제고 ▲법적 불확실성 해소 ▲민간 규제 완화 ▲공공신탁 통한 중저소득층 보호 등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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