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없는 마을 ④ 덴마크의 치매 마을, 스벤보르 브뤼후셋
한국에 없는 마을 ④ 덴마크의 치매 마을, 스벤보르 브뤼후셋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3.15 1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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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뒤의 사람을 보자는 철학이 있는 마을
사라져가는 기억 그러나 매일 길을 잃어도 안전한 곳

전 세계는 치매 인구 급증에 대한 비상 시즌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선진국은 사회 전체가 치매로 인한 부담을 느끼고 치매와의 전쟁을 치르며 실효성 높은 해결책을 만들어 내고 있다. 치매 진단을 받은 뒤 그 가족이 오롯이 돌봄을 도맡고 존엄성이 무너지는 일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고 있다. 사회가 함께 고통받는 질병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국가가 나서 입체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한국도 치매 돌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경제적 문제가 연이어 터져, 나라 전체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지금도 수도권에 주로 포진된 치매안심센터는 치매 환자에게 맞춘 서비스보다 진단해 내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치매 조기 진단을 하더라도 후속 조치가 부족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직 치매 환자에 관한 이해도 부족하고 치매가 안겨주는 두려움의 골은 여전히 깊은 현실이다.

한국에 없는, 세계 치매 마을 4편으로 덴마크의 스벤보르 시에 있는 치매 마을 브뤼후셋을 살펴보고자 한다. 덴마크는 세계적인 복지국가이며 노인이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힌다. 유엔의 인구 통계에 의하면 2019년에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치매 유병률 또한 20%가 넘어 한국보다 두 배 높다(한국 2020년 기준 10.3%).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야외 공간 건축회사 LAND+ / landplus.dk/demensbyen-svendborg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야외 공간 / 건축회사 LAND+(landplus.dk/demensbyen-svendborg)

덴마크는 1987년 요양원 급증을 막고 노인 공동 주택 건설을 유도하기 위해 요양원 신규 건축을 금지했다. 국가가 나서서 노년의 고립을 막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노인들이 살 수 있도록 했다. 쉽게 사람을 만나 함께 산책하며 세상에 대한 간접경험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 노인 건강에 중요함을 인지한 것이다. 노인이 다양한 활동과 사교적으로 지내도록 장려해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이 우울증과 치매로부터 보호하는 처방이라고 인식했다. 덴마크에서 은퇴한 노인들은 노인 공동 주택에서 생기 있고 젊게 산다.

스벤보르는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2시간 떨어진 곳으로 인구 5만 9,000명이 사는 작은 도시다. 이 마을이 치매 친화 도시로 유명해진 것은 2016년 12월에 브뤼후셋에 세운 치매 마을 덕분이다. 이 마을은 2014년 스벤보르 시 공무원들이 네덜란드의 호그벡 마을을 견학한 뒤 기획됐다. 공무원들은 호그벡 마을 입주민들이 치매 발병 이전과 같은 삶의 질을 누리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 스벤보르에 돌아와서 치매 마을 조성에 착수했다. 지방정부는 시립 요양원 17곳을 검토한 뒤 브뤼후셋을 마을 형태로 전환하기로 하고, 건물과 토지를 매입해 2016년 덴마크 최초의 치매 마을을 세웠다. 스벤보르 시는 리모델링 비용에만 예산 13억 원을 들였다.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브뤼후셋 마을은 2023년 기준 125명이 거주하고 있다. 125세대가 살 수 있는 아파트와 그룹홈, 단기보호시설, 데이케어센터가 있고 치매 관리동에 레스토랑, 서재, 헬스장, 상점, 미용실 등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관리동에는 간호사와 직원 125명과 자원봉사자들이 상주한다. 이용자의 본인부담금은 1인당 월세, 식비, 생활비 포함 130만 원 내외다.

치매에 걸리지 않은 가족이 함께 입소할 수 있고, 혼자 입소하더라도 마을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가 돼 있다. 특히 마을 밖에 거주하는 치매 환자도 브뤼후셋의 데이케어센터 입소가 가능하며 치매 관련 교육과 프로그램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이 마을의 철학은 “치매라는 질병이 아닌, 사람을 보자”다. 그래서 치매에 걸리기 전의 일상생활과 같은 삶의 질을 유지하도록 돕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치매에 걸린 입주민이 자유로우면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돕는 데 집중한다. 기억이 사라져 가며 길을 잃어도 안전한 마을, 치매 환자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마을로 계획됐다.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브뤼후셋 마을에서는 치매를 앓는 노인이 물건을 사면서 가격이 틀리거나 돈을 내지 않거나 혹은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내도 괜찮다. 정확한 가격을 연금에서 차감하고 제대로 된 계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치매 증상으로 일어나는 불편한 소통이 없다. 통제보다는 인간으로서 기본 욕구를 충족하도록 하고 치매에 걸리기 전처럼 살 수 있도록 배려한다.

덴마크 법에서는 거주자 감금을 금지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지 않도록 법적으로 제재하는 국가이므로, 중증 치매 환자라는 이유로 한국의 적잖은 요양시설처럼 침대에 팔다리를 묶어 놓고 건물 밖을 나가지 못하게 강제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치매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족이나 친구들의 방문이 쉬운 것이 브뤼후셋 마을 특징이다.

통제가 아닌 자유가 배회를 예방한다는 원칙을 가진 브뤼후셋 마을은 배회 노인, 실종 노인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을 주민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산책할 수 있다. 치매를 앓는 마을 거주민인 헬가 엔슨(85)은 “점심 먹고 산책하면서 정원에 있는 닭이랑 오리를 구경하는 게 일과”라며 “마을 밖에서 살 때와 다를 바 없이 자유롭다”고 했다. 거동이 힘든 환자들은 자원봉사자와 함께 카트를 타고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안전 문제나 실종을 우려해 치매 어른 대부분이 건물 내부에서 생활하는 한국의 돌봄 현실과 확연히 다르다.

 

자원봉사자와 함께 마을 밖 자전거 투어 중인 입주민 모습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자원봉사자와 함께 마을 밖 자전거 투어 중인 입주민 모습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정기적으로 자원봉사자와 함께 마을 밖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는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마을에서만 지내며 답답해하는 입주민이 없도록 수요자 중심 계획이 반영돼 있다.

치매를 앓아도 불편함이나 위축감을 느끼지 않도록 디자인된 마을이므로 공동으로 이용하는 식당, 도서관, 카페, 이발소, 마트 등 편의시설이 입주민 맞춤 서비스로 운영된다. 편의시설 운영은 자원봉사자가 맡고 있다.

아이스크림 가게 자원봉사자는 “환자들이 계산하지 않고 나가도 다그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간다”며 “입주민들이 불편함을 느끼거나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마을의 매니저 아네트 소비는 “보호자는 환자가 좋아하는 물건을 우리 마을로 보내 상점에 진열할 수 있고, 환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물품을 구매한다”고 말했다.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거주 비용은 스벤보르 내의 다른 시립 요양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식비와 주거비를 제외한 모든 돌봄 비용은 덴마크 정부가 부담한다. 소비 매니저는 “입주민이 내는 비용은 덴마크 노인들이 받는 연금으로 충분히 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마을 입소는 스벤보르 시의 치매 상담기관이 결정한다. 소비 매니저는 “상담기관 세 곳에서 증상을 진단한 뒤 입소 여부를 결정하며, 마을에서 직접 환자를 선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마을 입소자 대부분은 스벤보르 시 주민이고, 인근 지역의 치매 환자도 입소할 수 있다.

 

마을 내 편의 시설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이 마을은 외부와 단절돼 있지 않다. 외부인 출입도 입주민의 외출도 자유롭다. 면회 시간이나 횟수 제한도 없다. 마을 출입구를 잠가 두지 않는다. 정원 곳곳에서 산책을 돕는 자원봉사자가 있어 입주민이 마을 밖으로 나가려 해도 안전하게 인도된다. 소비 매니저는 “일부 입주민은 위치추적기(GPS)를 사용하지만, 거주자를 속박할 수 없다는 게 우리 마을의 기본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배회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입주민이 있으면 회의와 상담을 통해 배회 욕구의 근원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입주민을 단순히 치매 환자로 치부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소비 매니저는 “환자마다 배회하는 나름의 사연과 이유가 있다”며 “그분들이 무슨 의도로 어떤 의사를 전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아내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소비 매니저는 “치매에 걸린 사람이 많아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가 치매 마을을 조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매일 그분들 일상에 많은 활동을 배치한다. 치매 진단을 받기 전에 하던 행동 패턴을 유지하며 평범한 삶을 안겨주려고 한다”고 브뤼후셋 마을의 핵심 가치를 전했다.

스벤보르에 4년간 거주한 비어기트 무세우스는 치매 진단을 받기 전 미술 교사였다. 그녀는 현재 이 마을과 인근 주민들에게 그림 수업을 하며 즐겁게 살아간다. 달라진 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치매에 걸렸어도 이전과 똑같은 삶의 질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이 마을이 추구하는 바다.

스벤보르 치매 마을 주민은 마을 안에서 과일을 키우고 화초를 가꾸며 자유롭게 생활한다. 서로를 치매 환자로 보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으로 책장을 만들고 꽃가게를 운영하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 치매 환자냐 아니냐 하는 질문 자체가 필요 없다. 사람과 사람의 평범한 일상만 있다. 그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이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스벤보르 브뤼후셋 마을 / 스벤보르 지방자치단체 SNS​

전문가들은 한국에 호그벡, 랑드, 랭글리, 브뤼후셋 같은 마을을 당장 만들긴 어렵지만, 덴마크의 돌봄 철학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배회의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치매 환자의 외출을 제한하고 감시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우리는 치매 환자의 욕구와 불안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지 못할까.

세계 치매 마을에는 공통점이 있다. 마을 주민이 치매 환자라는 설명을 하지 않으면 평범하고 건강한 노인의 모습이란 점이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단장하고 쇼핑한다. 즉,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 모두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이전에 해왔던 일들을 평소처럼 하고 싶어 하며, 치매 마을은 그 소원을 현실화한 곳이다.

국가가 나서 치매를 책임지려는 뜻으로 조성한 치매 마을에서는 삶의 질이 높아져 호전된 사람들의 생생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다. 치매가 발병해도 행복하게 살 방법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치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화 마을을 조성해 마을 전체가 치매 입주민의 존엄을 지켜주는 계획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치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다. 우선은 덴마크처럼 ‘치매 환자를 보는 성숙한 관점’이 필요하다.

치매 마을은 새로운 공간과 환경이지만 치매를 관리하는 곳이 아니다. 치매와 공존하며 생활하는 공간이며 치매 환자를 이해하고 관대하게 대하는 공동체다. 그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인간답게’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치매 진단을 받아도 행복한 삶이 가능한 마을, 병을 보지 않고 사람 전체를 보는 마을, 그러한 한국형 치매 마을이 조속히 조성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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