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요양원 생활 ①
입소 첫날의 다양한 표정과 긴장
요양원에 입소하시는 어르신들의 첫날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입소 첫날은 어르신 본인도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라 두려운 표정이 역력하다. 어르신을 모시는 돌봄 제공자로서 ‘이 어르신은 어떤 어르신일까? 우리가 잘 모실 수 있는 어르신일까?’ 하는 긴장감이 차오른다.
거부감 없이 순순히 요양원 환경을 받아들이는 분이 있는가 하면, 차에서 내리기를 거부하며 “내가 자식을 몇 명이나 키웠는데 어떻게 나를 요양원에 버릴 수 있냐”고 몇 시간을 우시는 분, 들어오실 때는 담담하셨지만 자녀들이 떠난 후 신세를 한탄하며 한동안 힘들게 지내시는 분도 있다.
요양원 개원 초기에는 인지 능력이 거의 없어서 오로지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2박 3일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배회하는 어르신이 다수 계셨다. 이렇게 집에 가야 한다는 어르신은 주로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분들이다. 집에 가시려는 이유는 멀리서 손님이 온다고 생각하거나, 동네 사람을 만나 같이 일을 해야 한다거나, 비가 오니 깨(농작물)를 들여놓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대셨다.
흔히 농촌 생활은 평화롭고 느리게 사는 여유 있는 삶을 떠올리지만, 그분들의 농촌 생활은 치매에 걸린 후에도 일에 쫓겨 살아야 하는, 한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삶이었다.
요양시설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로 생긴 두려움, 아직도 혼자서 밥을 지어 먹으며 살 수 있는데 왜 나를 이런 곳에 데려다 놨나 하는 자기 신체나 정신 건강 상태에 대한 현실 인식 부족,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하는 바깥세상에 대한 미련, 고생해서 자식을 여럿 키웠는데 그중 누구도 함께 살겠다는 이가 없는 데 대한 분노, 배신감, 그리움 등.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최고조에 달하는 날이 바로 입소 첫날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힘든 것은 물론 어르신 본인이겠지만, 돌봄자들로서도 어르신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긴장 상태가 된다.
요양원 개원 후 몇 년 지나고 나니, 이런 상황에 대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남편이 회사 인사업무에서 했던 RJP(Realistic Job Preview 현실적 직무소개)가 떠올랐다. RJP는 회사에 입사한 신입 직원이 입사 전에 가졌던 높은 기대와 실제 회사 현실 간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직장 생활의 현실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불필요한 시간 낭비와 비용을 줄이는 제도다.
요양원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어르신들이 요양원에 대해 가진 과도한 불안감과 오해를 줄이고, 빨리 요양원 생활에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 어르신과 돌봄자 모두의 만족을 높이는 길이다. 그래서 늘 입소하기 전에 방문해 보시게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우리 요양원 입소를 원하시는 보호자에게 어르신을 모시고 오셔서 차 한잔하며 시설을 둘러보고, 현재 생활하고 계신 입소 어르신들과 대화도 나눠보고, 생활 모습을 살펴보게 하고, 기회가 되면 노래도 함께 하는 ‘현실적 요양원 생활 소개(RNP, Realistic Nursing home Preview: 우리가 만든 용어임)’를 실행하고 있다.
모든 어르신이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80~90%의 보호자가 어르신을 모시고 미리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고, 입소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눈 후 이곳에서 생활할 것인지 결정하고 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대기 명단에 있는 어르신 중 누구에게 연락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중 넉 달 전에 다녀가신 어르신의 아드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오늘 아침에 ‘나 해바라기인가 보내준다고 했는데 왜 아직 안 보내 주냐?’라고 하셨어요. 혹시 입소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요?”라고 물으셨다.
놀라운 것은 그 어르신은 식사 후 바로 한 일도 기억 못 하시는 중증 치매 상태였다는 점이다. 여담이지만 요양원에서 어르신들과 함께하다 보면 보통 사람이 믿기 어려운 기적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런 어르신은 요양원에서 잘 생활하시고 자녀들을 그리워할 때가 있어도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일은 없다. 집으로 가겠다며 2박 3일 동안 배회하는 어르신도 거의 줄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들도 어르신을 모시는 데 필요한 준비를 차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다.
어제도 어르신 한 분이 새로 입소하셨다. 이 어르신은 2개월 전 자녀분들과 함께 사전에 방문하셨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두 분의 어르신이 동시에 사전 방문을 한 날이었다. 한 분은 방문 몇 시간 후 바로 입소를 결정하셔서 입소 절차와 준비 사항을 안내하고 날짜를 확정했다.
그런데 방문은 했지만 입소를 결정하지 않은 다른 어르신의 보호자로부터 다음 날 전화를 받았다. 어르신이 입소하고 싶다며 연락을 주셔서 상황이 다소 난감했다. 그 보호자는 당연히 입소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고, 우리는 입소 의향이 없으신 줄 알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순서는 달라졌지만 두 달 후 이 어르신도 무사히 입소하셨다.
항상 새로운 어르신을 모실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인연이 있어야 만남도 이루어진다. 참으로 깊고 깊은 인연이다.
배정은
용인해바라기요양원 원장
간호사/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
용인시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노인분과실무위원
용인시 장애인 수급자격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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