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한 공생관계를 통한 정서적 연결감

공생 / 윤석남 작가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의 드로잉 작품 중에
공생 / 윤석남 작가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의 드로잉 작품 중에

 

그림책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윤석남・한성옥)가 출간됐을 때 이 그림을 책과 함께 한정 판매하는 것을 보고는 책 제목과 설명에 매료돼 구매했다. 그림 제목은 ‘공생(共生)’이다. 제목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이해될 것이다.

그림 속 노인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어르신, 또는 복지 현장에서 우리가 사례관리로 만나는 어르신일 수 있다. 허리가 굽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어르신이지만 가만 보면 등에 온갖 곤충과 동물이 와서 놀고 있다. 비록 도움을 받는 어르신일지언정 나름의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선물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는 이런 관계가 복지 현장에서 많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움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일 수 있다는 공생성이 이뤄지는 것이 사회복지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등가교환이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동네노인주간보호센터를 이용하는 어르신들께 이러한 공생관계에서 오는 정서적 충족감을 실현하고 싶었다. 노인주간보호센터는 어르신들이 낮 동안 갇혀있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센터에서 매일 만나는 관계도 소중하지만 마을 주민과 느슨하게나마 만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드리면 삶에 생기가 샘솟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가능할지 고민하다가 센터 주변에 있는 식당, 카페 사장님을 만나 제안을 했다. 나와 어르신이 일대일 데이트하러 식당과 카페에 가겠다고. 일명 ‘우리 동네 마실 가기’다.

실행 계획에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단체로 가지 않는다. 이 활동은 어르신과 내가(또는 동료 중 1인)이 일대일 데이트로 즐긴다. 어떤 카페 사장님은 “하루 영업을 안 할 테니 어르신들 모두 모시고 오면 차를 대접하겠다”고 사랑을 표해 주셨다. 그러나 정중히 사양했다. 모든 어르신이 단체로 이용하면 자칫 ‘사회 적응 훈련’ 같은 프로그램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과 나, 이렇게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하면 어르신이 사장님(이웃들)과 만나 서로 소소한 안부를 나누며 반가운 교류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어르신이 센터에서는 미처 표현하지 못한 속 깊은 이야기도 하실 수 있다. 자연스럽게 타인과 만나는 일상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둘째, 내 식사와 음료값은 내가 내고 어르신이 드신 식사나 음료는 식당 또는 카페에서 대접한다. 우리 동네 마실 가기 활동은 분기에 한 번 진행한다. 자주 하고 싶지만 돌봄 현장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어르신 낙상사고 우려, 혹시나 모를 소화불량 등). 사장님들은 센터의 어르신과 자주 마실을 오는 게 아니니 어르신과 내 식사와 찻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마음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내 음식값은 결제하고, 어르신이 드시는 식사 또는 차만 비용을 받지 않기로 요청드렸다. 사장님이 어르신께 정성스레 대접하는 모습이어야 이 활동이 오래갈 수 있겠다 싶었다. 무료로 받기만 하면 서로가 부담될 수 있으니까.

셋째, 어르신과 사장님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도록 돕는다. 이 활동은 어르신께 느슨한 공생관계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 목적이다. 비록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어르신이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발음이 부정확하여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얼굴을 보며 환대하고 환대받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사장님은 어르신께 대접하는 기회를, 어르신은 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는 그런 관계 말이다.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저자 채정호 교수는 “지금 너무 아프고 힘들어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촉진하는 것이 우정, 사랑, 친밀감 같은 정서적 연결감입니다. 이런 연결감이 안정과 행복을 가져옵니다”라고 했다. 이런 정서적 연결감으로 어르신도 이웃들도 작은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 마실 가기 ' 첫 마실로 함께한 박인분 어르신과 이혜주 센터장 / 이혜주
'우리 동네 마실 가기 ' 첫 마실로 함께한 박인분 어르신과 이혜주 센터장 / 이혜주

 

2024년 6월, 드디어 ‘우리 동네 마실 가기’의 첫 발걸음을 옮겨 박인분 어르신과 분식점에 갔다. 어르신은 사장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셨고, 사장님도 환영해 주셨다. 어르신은 가락국수를, 나는 떡볶이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어르신의 요청이 있었다. 주방에서 한창 조리 중인 사장님을 부르시더니 어르신 옆에 앉게 하시고 축복기도를 하시겠다는 것이다. 바쁜 점심시간이라 사장님이 곤란해하실까 봐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사장님은 빙긋 웃으시며 기도해달라 하셨다.

“하나님, 우리 사장님이 이렇게 대접해 주셔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습니다. 사장님 건강하게 해주시고, 돈도 많이 벌게 해주세요. 이 식당에 손님이 개미 떼가 끓는 것처럼 해주세요” 개미 떼라는 표현에 살짝 웃음이 났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후에 사장님을 다시 만났는데, 그때 어르신이 해주신 기도 이야기를 하셨다. 그날 정말 행복했다고, 마음이 기뻐서 하루 종일 즐겁게 장사했다고 말이다. 나는 깨달았다. 어르신은 식사 한 끼를 공짜로 대접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주실 수 있는 존재인 것을. 꼭 식삿값이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 큰 충만함을 선사해 주신다는 것을.

 

정순자 어르신과 우리동네노인주간보호센터 직원 / 이혜주
정순자 어르신과 우리동네노인주간보호센터 직원 / 이혜주

 

정순자 어르신과는 카페에 갔다. 그동안 우울한 마음으로 밤에 잘 주무시지 못하셨다. 센터가 아닌 예쁜 카페에서 평소 좋아하는 선생님과 따뜻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셨다. “너무너무 행복해요”라는 말씀을 계속하셨다고 한다. 이튿날 어르신의 아드님과 통화했는데 카페를 다녀오신 후 가족들에게 즐거웠다고 자랑하시고 그날 푹 주무셨다고.

장영순 어르신과도 식당에 갔다. 당시 어르신은 여러 걱정으로 그만 대상포진까지 걸리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다. 사장님의 반가운 환대에 어르신은 푸짐하게 나온 비빔밥 한 그릇을 남김없이 드셨다. 그리고 사장님께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다. “죽고 싶기만 했는데 이렇게 살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 말씀에 사장님이 큰 감동을 받으셨다. "내가 만든 음식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니!" 하시며 사장님은 분기에 한 번이 아니라 더 자주 모시고 오라며 오히려 나에게 부탁하셨다.

2025년에도 ‘우리 동네 마실 가기’를 계속하고 있다. 가장 오랫동안 센터를 이용한 배추대 어르신이 센터 인근 식당에 다녀오셨고, 최근 남편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슬퍼하신 박옥주 어르신이 카페에서 오랜만에 웃으셨다.

신영복 선생님은 2015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청난 아픔이나 비극도 꼭 그만한 크기의 기쁨으로서만 극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은 기쁨으로도 충분히 견뎌져요. 사람의 정서라는 게 참 묘해서 그렇게 살게 돼 있는 거지요.”

앞으로도 ‘우리 동네 마실 가기’를 통해 어르신들이 이웃과 만나도록 주선하며 공생관계를 잘 만들어 가고 싶다. 서로에게 ‘작은 기쁨’이 쌓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말이다.

 

 

이혜주
우리동네노인주간보호센터 센터장
경기도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
(사)치매케어학회 이사
(사)한국주야간보호협회 이사
전, 안성종합사회복지관 총괄팀장
전, 안성시동부무한돌봄네트워크팀 센터장
전, 안성시사회복지사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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