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아아~”를 온전히 이해하는 날까지
K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왼쪽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편치 않아 중심이 늘 한쪽으로 쏠렸고 이미 몸은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K 할머니를 만났을 때 가족들은 할머니가 혼자 걸으실 수 없어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며 주간보호센터에서 감당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K 할머니는 센터에 오시는 첫날부터 지팡이를 잡고(물론 도움이 필요하다) 보란 듯이 스스로 걷기 운동을 하셨다. 잘 펴지지 않는 왼쪽 손에는 늘 말랑한 작은 공을 쥐고 조물조물 움직였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은 몸 전체로 전달되어 점차 조금씩 회복하셨다. 그 결과 K 할머니는 집에서 나오거나 들어가실 때를 제외하고 휠체어 사용을 현저히 줄이셨다.
뇌졸중은 K 할머니의 언어 표현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의 표현이 “아아~”였다. 말이라기보다는 소리 지르는 것에 가까웠다. 비록 단음절이지만 상황과 장소에 따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알아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침에 센터에 오시자마자 “아아~” 하시는 것은 내가 운동할 준비가 되었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K 할머니의 의지와 자신감과는 달리 몸은 기우뚱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한 걸음 한걸음에 정성과 오기가 담겨 있다. 매일의 정성이 쌓여 언젠가는 누군가 돕거나 지켜보지 않아도, 그 기우뚱함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이 K 할머니의 땀에 배어 있다.
오전 활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아아~” 하시는 것은 물을 마시고 싶다는 뜻이다. 한 손으로 잡고 드실 수 있도록 적정한 온도의 물이 전용 병에 담겨 있어서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어르신 쪽으로 병을 살짝 밀어드리면 된다. 활동을 마치시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의 “아아~”는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옷에 실수하지 않으실 수 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어르신께 허락을 구하고 옷을 내려드린다. 화장실에서 “아아~” 하시는 것은 바로 허락의 뜻이다.
K 할머니께 오늘도 운동을 열심히 하시고, 모든 활동에 열심히 참여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 후 듣게 되는 “아아~”는 나도 기쁘고 고맙다는 뜻이다. 그럴 땐 아이 같은 환한 웃음을 보여주신다.
K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신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귀하게 보살펴 주신다. 센터에서 귀가 하실 때쯤 이미 된장찌개 냄새가 마을 어귀까지 마중 나온다. 집에 들어가 보면 혹시나 배변이 어려울까 유산균 음료에 빨대가 꽂혀 있고, 어떤 날은 계절 과일이 접시에 놓여 있다. 또 다른 날에는 담백한 빵이 K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K 할머니는 맛있게 드시며 “아아~”라고 하신다. 고맙다는 뜻이리라.
“할아버지, K 할머니가 오늘 이거 드시고 싶다는 건 어떻게 아세요?” 여쭈었더니 “50년 넘게 같이 살았는데 그거 하나 모를까 봐요”라고 하신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았던 세월 속에서 굳이 동기화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나는 너고, 너는 나’다.
고백하건대 나는 K 할머니의 “아아~”가 무슨 뜻인지 절반도 맞추지 못한다. 아직 동기화가 덜 되었다. 그러나 요양보호사 선생님들과 할아버지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언제쯤 나는 K 할머니의 모든 “아아~”를 이해할 수 있을까. 부러움과 존경의 눈빛으로 선생님들과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일본의 노인요양시설 ‘요리아이의 숲’를 운영하는 무라세 다카오는 그의 책 《돌봄, 동기화, 자유》에서 돌봄 현장에서의 동기화에 대해 “둘이 함께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단순히 동조하고, 타이밍을 맞추고, 동시에 일어난다는 일반적 설명을 넘어서는 의미다.
할아버지와 요양보호사 선생님처럼 K 할머니와 진정한 동기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라세 다카오의 설명으로 찬찬히 살펴보자.
첫째, ‘둘’임을 기억하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한 마음이 오고 가려면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하다. 다수의 사람과 동시다발적인 만남에서는 일로서 만날 수는 있어도 마음까지 헤아리긴 어렵다. 비록 짧은 시간이어도 어르신과 일대일로 이야기 나누는 여유가 필요하겠다.
둘째 ‘함께’임을 잊지 말자. 돌봄 현장에서 가장 큰 어리석음은 바로 ‘내가 어르신을 돌본다’는 교만한 마음이다. 돌봄 관계가 일방적이면 돌봄을 받는 사람은 대상화(objectification)가 될 수도 있고, 돌보는 사람은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쉽다. 돌봄 종사자는 때때로 한계와 소진 상황에 부닥칠 때가 있는데 관계가 일방적으로 흐르면 경우에 따라 폭력적인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 무너질 수 있다. 잊지 말자. 우리는 어르신께 돌봄을 드리기도 하고, 어르신 역시 나름의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고 있는 공생관계라는 사실을.
셋째, ‘지금 여기를 인식’ 하도록 각성하자. 어르신이 받은 등급 또는 성별과 연령, 어르신이 보여주는 병증 등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지금 내 앞에 마주하고 있는 어르신께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전의 돌봄 경험으로 지금 만나는 어르신께 자칫 ‘복붙’ 하지 않도록, 우리는 늘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각성해야 한다.
K 할머니를 이렇게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는데 허무하게 되었다. 갑자기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렇게 강인했던 K 할머니는 퇴원 후 닷새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눈물도 나지 않을 만큼 믿기지 않았다. 할머니께 좀 더 마음과 생각을 포개고 싶었는데 말이다.
최근 여러 일로 마음이 힘들고 몸이 게을러지면서 1년을 등록한 헬스장에 석 달째 나가지 못했다. K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열흘 전부터 다시 새벽에 일어나 헬스장에 나가고 있다. 그동안 운동하지 않아 조금만 걷고 뛰고 기구를 사용하고 나면 통증이 남아 힘들다. 하지만 운동하고 땀 흘리며 그렇게 애쓰셨던 K 할머니의 마음과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아주 작게나마 동기화가 되기를 바라며 새벽에 일어나 걷고 뛰었다.
이혜주
우리동네노인주간보호센터 센터장
경기도사회복지사협회 부회장
(사)치매케어학회 이사
(사)한국주야간보호협회 이사
전, 안성종합사회복지관 총괄팀장
전, 안성시동부무한돌봄네트워크팀 센터장
전, 안성시사회복지사협회 회장